장미자 씨는 자동차 한가운데 고정 장치에 묶여 있었고 양쪽으로 N과 레오폴드, 할아버지와 지영 씨, 그리고 내가 앉아서 앞사람을 보며 죽어라 수다를 떨었다. 자동차가 언덕배기를 올랐다가 내리막을 내려갈 때는 다들 몸이 옆사람 쪽으로 쏠리면서 괜히 웃었다. 할아버지는 기분이 좋은지 황성옛터를 중얼거렸고 지영 씨는 휴대폰을 들어 앞사람 옆사람 얼굴을 계속해서 찍어댔다. “미국은 참 좋은 나라야. 다리가 불편한 내가 부르기만 하면 한밤중에도 차가 온다니까.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다 데려다 준다구.” 장미자 씨가 말했고 우리는 다들 입을 맞춰 “정말 미국은 좋은 나라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운전기사가 우리를 내려놓은 곳은 쇼핑센터와 어린이 미술센터가 한 건물에 있는 허드슨 강변의 주차장이었다. 주차장 뒤쪽으로 돌아가면 바로 강이었다. 불빛이 손끝에서 떨어지는 반짝이 가루처럼 빛나는 건너편의 맨해튼 풍경이 눈앞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뉴저지에서 맨해튼의 밤풍경을 본 건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펜스에 턱을 대고 강바람을 맞으며 맨해튼을 건너다봤다. “아자, 열심히 씁시다.” 레오폴드가 강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강 산책이 끝난 후 어떻게 헤어졌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에라리온 출신의 운전기사가 모든 사람들의 집에 들어 한 사람씩 내려주고 갔던 것 같다. 내가 제대로 인사나 한 건지 기억도 안 났다. 다만 월요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 얼굴이 무섭게 부어올라 있었던 걸로 봐서 N과 내가 오랜만에 라면을 끓여먹고 잤던 것 같다. 얼굴이 애 낳은 여자처럼 잔뜩 부풀어 있었다.
아침 내내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어떤 생각 하나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긴 실 같은 것이 몸에서 풀어져 나와 어딜 가도 따라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술을 많이 마시기도 했지만 뭔가 변화가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갑자기 왜 라이팅 클럽이 시작된 날, 세탁소 남자 생각이 간절하게 났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때 마침 천기가 통한 듯 내 휴대폰이 울렸고 나는 거기에 찍힌 번호가 세탁소 남자라는 사실에 거의 기절할 뻔했다. 그도 내가 그리웠던 것일까? 다시 만나자고 하면 뭐라고 반응해야 할까,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이었다.
“안녕하세요? 접니다.” 나는 좀 기쁘기도 하고 뭔가 농담을 하고 싶어서 목소리에 교태를 섞었던 것 같다. “어머, 저에게 전화를 다 하시네요. 왜요? 혹시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잘 지내시죠?” 나는 건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넌 이제 나한테 걸려들었다는 듯한 뉘앙스로 말했다. “그럼요 잘 지내죠. 제가 매일 질질 짜기라도 할까 걱정하셨어요? 그러는 분은 잘 지내시죠?” 상대방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네 저는 똑같습니다. 다른 게 아니구.” 왜 그때 나는 하필, 그때 나는 그런 이상한 얘길 꺼냈는지 모르겠지만 “나, 야외용 튜브 샀어요”라고 말해버렸다. 그는 몇 초 동안 침묵하더니 전화기를 입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영인 씨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다구 하네요. 이모가 그러는데 무슨 시설에 가 계시다고 하더라구요.” 나는 그 순간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매우 차분해졌다. “정말 미안합니다. 영인 씨한테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그제야 나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