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갑자기 술병 몇 개가 우루루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우리의 지영 씨가 드디어 꼿꼿하게 접고 있던 다리를 옆으로 펴느라 소란해졌다. 나도 좀 정신이 어리버리, 그 순간 보니 N이 줄칼을 들고 장미자 씨의 손톱을 다듬어주며 둘이서 눈을 맞춰가며 뭐라 뭐라 떠들고 있었다. 자! 제 말 모두 잘 들으세요. 이 라이팅 클럽의 운영 수칙을 말씀드릴게요. 나는 상체 주머니에서 쪽지를 펴들고 읽기 시작했다. 술 탓에 발음이 자꾸 헛나가는 걸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첫번째, 모든 회원이 이주에 한 번씩 자기가 써온 글을 발표해야 한다. 두번째, 모든 회원은 회원들이 발표한 글을 읽고 와 토론에 참여해야 한다. 세번째, 모든 회원은 인신공격성 코멘트를 삼가고 가능하면 긍정적인 코멘트를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네번째, 모든 회원은 한 달에 십 달러의 참가비를 내야 한다. 다섯번째……” 내가 다섯번째라고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또 술병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종이에서 눈을 떼고 좁은 집 안을 둘러보니 N이 레오폴드 옆자리에 앉아 술잔을 부딪치며 서로 수작을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야, 너 글 쓰는 사람 안 좋아하잖아.” 내가 N에게 삿대질을 했나, N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 사람 글 안 써. 집 짓는 사람이라잖아. 건축가.” “하하, 맞아요. 저 집 지어요.”
“허드슨 강의 오염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네. 강이 죽었어. 레오폴드 자네 그거 아나? 맨해튼을 보게. 저기는 내가 보기에 악마의 도시야. 밤이면 악마들이 나타나 높디높은 마천루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생지랄을 하지. 한 사람씩 골라서 귀를 통해 악마의 씨를 집어넣으면 그 사람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멀쩡한 사람들한테 총질을 해댄다네. 악마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니까 참을 수가 없는 것이지. 원래, 지옥에서 꽃이 더 잘 피는 법이지.” “와, 할아버지 진짜 멋있다.” 지영 씨가 할아버지를 더 부추겼다. 할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와 두 팔을 치켜들고 말했다. “자, 그럼 우리 술도 한 박스 비웠고 허드슨 강으로 산책이나 갑시다.”
모두들 부산하게 일어나 정신없이 옷을 입고 가방을 챙기고 하는 사이 우리의 장미자 씨가 장애인 보호 기관에 전화를 했다. “자, 다들 기다리세요. 여기서 아무도 운전을 해서는 안 돼요. 저를 도와주는 분이 올 때까지 다들 기다리세요. 음주운전은 절대 안 됩니다.”
잠시 후에 차가 왔다. 12인승 자동차를 개조한 차로 장미자 씨의 휠체어가 가볍게 차 위로 들어 올려졌다. 운전기사는 시에라리온에서 온 흑인이었는데 노래하듯이 말을 재미있게 하는 것 같았지만 역시 나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한국 사람들 참 좋다구, 한국 여자를 사귄 적도 있다는데.” 우리가 제일 골칫덩이라고 생각했던 장미자 씨는 벌써 한 번에 차에 타고는 운전기사의 말을 통역까지 하고 있는데 멀쩡한 인간들이 술에 취해 제대로 차 안에 타지도 못하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발밑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툭툭 발에 걸렸다. 해캔섹의 일요일 밤은 너무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