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잠녀 고아라가 환관 방비리에게
잠녀 고아라가 환관 방비리에게
1466년 7월 4일
나으리, 드디어 내일이 친잠례 날이에요. 아, 친잠례를 처음 치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고 당황스러운 것일까요. 사실 이런 상태가 여러 날 계속되어 사흘 전부터는 입맛까지 잃어 버렸어요. 무엇을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으리를 생각하면, 갑자기 떨리고, 머릿속 생각들이 전부 사라지곤 합니다. 혹여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여 증세를 호소했더니, 잠녀 옥지도 상차 어른 앞에서 같은 증세가 나타난다 합니다. 잠실에서 일하는 여인들에게만 생기는 병이 아닐런지요.
나으리, 오늘은 가슴이 뛰는 정도가 아니라,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말았어요. 아마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런 모양이에요. 인시에 잠실에서 바깥으로 나가보니,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검푸른 하늘 아래 천 그루의 뽕나무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지요. 해가 아직 떠오르지 않았지만 하늘에 밝은 기운이 스며든 듯했고, 지천으로 심겨진 뽕나무들이 수묵화처럼 신비하고 아름다웠어요. 옛날 중국에서는 동쪽 바다의 해 뜨는 곳에 있는 나무라 하여 뽕나무를 신목이라고 했다지요. 순간,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했어요.
세종 임금께서는 어떻게 궐 안에 이렇게 많은 뽕나무를 심을 생각을 하셨는지, 정말 천 그루가 맞을까 하는 새삼스런 생각을 하면서 아침 산보를 시작했어요. 백, 백하나, 백둘, 백셋… 이렇게 뽕나무를 세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나으리, 그때 누군가가 얼핏 뽕나무밭에 나타난 것이 보였어요. 교대시간은 아직 아니었고, 누가 허락도 없이 그 시각에 원유에 나타났을까 궁금했지요. 혹여 나으린가 하여 살금살금 다가가 놀래주려고 했지요. 엇, 나으리가 아니라 상, 상선 어른이셨습니다. 상선 어른이라면 환관들을 전부 지휘하는 높으신 분이시죠? 언젠가 그 어른 앞에서 환관들이 슬슬 기다시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키가 작은 전 상선 어른 말이에요. 엇, 놀랍게도, 전 상선은 제가 바늘구멍을 새겨놓은 뽕나무를 살피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귀성군이 작년에 바늘구멍을 낸 뽕잎을 가져가지 못한 이유는, 소용 박 씨의 연서사건 때문에 주상전하와 종친들이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고 귀성군도 올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우연히 중간에서 강 상차가 그 뽕잎을 가로채 전 상선에게 가져다 바쳤다고 하셨으니, 뭔가를 살피러온 것이 분명했어요. 전 상선이 문제의 뽕나무 곁을 기웃거리고 있었으니, 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마치 소용 박 씨의 서찰을 들킨 것처럼 가슴이 심하게 방망이질을 했고, 숨이 턱턱 막히면서, 호흡도 곤란한 상태가 되고 말았어요. 우리도 모르는 바늘구멍의 의미를 강 상차와 전 상선 어른은 이미 풀이를 한 듯하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의 진행사항을 그들이 더 많이 파악하고 있을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닌지요?
전 상선 어른이 사라진 후, 문제의 뽕나무 밑에 다가가 보았더니 바늘구멍이 난 뽕잎은 그대로였어요. 전 상선은 그 뽕잎을 발견하고도 모른 척 남겨놓았음이 분명해요. 전 상선도 그 다음 일어날 일을 기대하면서 말이에요. 만약에 귀성군이 제대로 뽕잎을 찾아내고, 백 여덟 번째 나무 밑에서 소용 박 씨의 서찰을 찾아낸다 해도, 그 뒤를 밟는 강 상차나 전 상선에게 들키고 말거예요.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요. 그렇게 되면 다시 소용 박 씨의 서찰이 문제가 될 것이니, 귀성군은 말할 것도 없고 원유를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이 조사를 받게 되고, 특히 바늘구멍과 관련된 저는 당연히 걸려들고 말거예요.
나으리, 이런 말씀드리게 되어 죄송해요. 엉겁결에 바늘구멍을 새긴 뽕잎을 떼어내 버리고 말았어요. 너무 놀라 무의식중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굳이 목숨까지 걸면서 서찰을 전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기 때문이에요. 너무 무서워서 순간적으로 취한 행동이지요. 소용 박 씨께서 가신 지 이미 일 년이 지났고, 죽은 자의 유언이니 어떻게 해서라도 전해주려고 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굳이 전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변명 같지만, 죽은 자의 뜻보다 산자의 생명이 더 중요하지 않을런지요. 자칫 잘못하면, 저뿐만 아니라 나으리와 잠실에서 일하는 잠녀들이 목숨을 잃거나 적어도 일자리를 잃게 될 테니까요.
나으리, 감히 말씀드리면, 소용 박 씨가 남긴 서찰의 내용을 우리가 먼저 뜯어보는 것이 어떨런지요. 뜯어보고 진정으로 꼭 전해야하는 내용이라면 다른 방식을 찾아보고, 전해주지 않아도 무방한 내용이라면 귀성군을 위해서라도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귀성군이 또다시 소용 박 씨의 서찰을 손에 넣은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경우, 주상전하의 진노는 불 보듯 뻔하고, 그 결과는 장담할 수 없을 거예요. 친잠례가 내일이니, 오늘 다시 뽕잎에 바늘구멍을 낸다 해도, 내일 그 글자가 눈에 보이지는 않을 거예요. 구멍 난 부분이 충분히 말라 글자가 드러나려면 며칠 더 기다려야 하니까요. 이제 너무 늦었으니, 다른 방책이 없는 것 같아요. 소용 박 씨의 서찰은 백팔 번째 뽕나무 밑에 그대로 묻어놓았어요. 제가 그 서찰을 혼자 뜯어볼 용기는 없고, 나으리께서 허락하시면 같이 뜯어볼 생각이에요.
나으리, 이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나으리께 알려드리는 것이 좋을 듯해서… 어제 잠녀 김옥지가 감찰상궁에게 불려가 혼쭐이 났어요. 행동이 방정치 못하다고 꾸중을 들은 것이지요. 최근 옥지가 잠녀들에게 벌레에게 가슴을 물린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래요. 저고리 안에 벌레가 들어가 어쩔 줄 모를 때, 마침 그곳에 있던 상차가 그 벌레를 제거해준 모양이에요. 물론 상차 이야기는 저에게만 한 것이니 안심하세요. 왜 감찰상궁이 벌레에 물린 이야기에 꾸중을 했냐고 물었더니, 그 이야기가 묘하게도 소용 박씨의 (가짜) 연서의 내용과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소용 박 씨의 저고리에 들어간 큰 개미를 귀성군이 잡아주다가 둘이 좋아하게 되었다는 내용과 비슷하다는 거예요. 최근 백성들 사이에 ‘가슴에 벌레나 개미가 들어갔다’라는 표현은 ‘외간남자의 손이 그곳에 닿았다’라는 은어로 사용되는 모양이에요. 옥지는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감찰상궁에게서 벗어났다고 했어요. 자칫 상차와의 일을 알고 묻는 줄 알고 실토할 뻔 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어요. 나으리의 친구 상차와 내 친구 옥지가 큰일을 당할 뻔 했어요.
나으리, 옥지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소용 박 씨 사건과 연루되어 죽은 환관들의 아내들 중한 사람인 김 씨와 옥지가 서로 아는 사이인 모양이에요. 궐에서 나간 전 대령숙수가 음식점을 차렸는데, 그 음식점에서 일하게 된 김 씨를 옥지가 궐 밖에서 한번 만난 모양이에요. 그 김 씨의 말로는, 나으리가 경복궁에 오시고 나서부터는 환관의 내자들이 더 이상 살맛이 나지 않는다고들 불평한다는 것이었어요. 아니 나으리가 환관들의 내자들을 아는 것도 아닌데 무슨 관련이 있어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옥지만 알라고 하면서, 사실 경복궁 잠실에서 양잠을 할 때 환관들을 위해 수나방이를 빼돌려왔다는 것이었어요. 누에가 고치를 만든 후 그곳에서 수나방이가 나오면, 그 일부를 환관들을 위해 사용했다는 거예요. 자기 남편만 그런 것이 아니고, 환관들의 수장인 전 상선이 나서서 한 일이라고 했어요.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캐물었더니, 수나방이가 남자들에게 음욕을 돋우어 주는 성질이 있어서 비록 환관이라도 여자를 그리워하게 만든다는 것이었어요. 전 상선 어른이 상차를 시켜 환관들에게 수나방이를 나눠줬대요. 문제가 되지 않을만한 환관들에게 처음에는 돈을 받지 않고 주었으나, 나중에 찾는 이가 많아지니 돈을 받기까지 했대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혹여 나으리와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특히 상차는 뽕잎에 바늘구멍을 낸 잠녀가 저라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라고 하셨으니, 생각만 해도 온몸이 오그라듭니다.
바늘구멍을 새긴 뽕잎을 따버렸지만,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전 상선은 내일 친잠례에서 귀성군을 주시하면서 그 뒤 일어날 일에 대해 세심하게 살펴보겠지요. 나으리, 우리가 오히려 이 상황을 이용할 방법은 없을까요. 아, 그러나 지금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가슴이 너무 심하게 뛰어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어요. 내일 나으리를 보면 모두 잘 해결될 것이고 믿고 싶을 뿐이에요.
고아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