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발칙한 정원사
글_박연준
이연미? 너도 좋아할 거야!
“너도 좋아할 거야. 우리랑 잘 맞으니까.”
민정언니의 말이었다. 몇 달 전부터 이 책의 편집자인 김민정 시인이 내게 소개해주고 싶은 화가가 한 명 있다고 했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그림을 보고 나서 내 작은 눈이 반짝, 동그랗게 뜨인다. 클클 웃다가, 빤히 들여다보다, 돌연 진지해지기도 하는 나를 보라. 그녀의 그림은 독특하고 우아하며, 괘씸하고도 사랑스럽다. 마치 풍선껌처럼 사람을 홀리는 구석이 있다. 무심코 쩍쩍 씹다, 조심조심 부풀려보다, 나중엔 얼굴만큼 후우~ 커다랗게 꿈꾸다 펑! 돌연 터지는 풍선껌. 그런데 이상하다. 사라진 건 풍선껌이 아니라 나다. 나는 이상한 나라로 뿅, 사라진다.
이연미 화가는 「완벽한 정원」, 「불타는 정원」, 「불타는 정원 속 새 한 마리」, 「불타는 갈대밭」 등 정원을 소재로 한 그림을 주로 그린다. 이 그림들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입술에 면도날이 슬쩍 닿은 듯 서늘한 느낌이 든다. 기발한 표현에 미소를 짓다가도 등 뒤로 서늘한 나뭇잎 한 장 슬쩍 떨어진 듯, 자꾸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동식물들도 인상적이다. 식물들은 섬뜩하고 우스꽝스럽다. 다리가 있거나, 사나운 이빨을 가지고 있다. 잎맥이 아닌 정맥이 돋아난 듯 검은 피를 뚝뚝 흘리는 이파리도 보인다. 당장이라도 입이 생겨 말을 하거나 뒤뚱뒤뚱 뛰어갈 것만 같은 초록들. 한편 사람이나 짐승들은 어딘지 모르게 음침하고, 휑한 눈을 희번덕거리며 캔버스 밖을 노려보고 있다. 그들은 도처에서 피를 뚝뚝 흘리기도 하는데 그 핏줄기가 꼭 뿌리 같아 보여, 그들을 한곳에 정박시켜놓을 것만 같다.
이 유연함이라니. 동물이 식물 되고, 식물이 동물 되고, 하늘이 땅 되고, 땅이 하늘 되는 그녀의 정원. 그녀는 ‘완벽한 정원’을 꿈꾼다고 했다. ‘13개의 다리가 있는 구름’이 떠 있는 곳. 그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니다. 이상한 나라의 정원사다.
몇 가지 구차한 변명
정말이지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를 만나지 못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이건 누군가의 음모가 있었던 거다. 고대하던 ‘정원사’와의 만남이었기 때문에, 속으로 날짜를 꼽으며 은근히 기다렸기 때문에, 누군가가 훼방을 놓은 것이 분명하다.
2009년 12월 9일, 원래대로라면 이연미 화가를 만나러 파주로 갔어야 했다. 하지만 못 갔다. 전날 밤, 나는 네 번 토하고, 세 번 설사를 했다. 처음엔 단순히 체한 줄로만 알았다. 새벽 3시 45분에는 방바닥에 쭈그려 앉아 혼자 손을 따보겠다고 눈물겨운 씨름(오른손으로 등을 두드리고는 재빨리 왼쪽 엄지에 실을 친친 감은 후 눈 감고 바늘로 톡 찌르는 행위)도 했다. 하늘에서 누군가가 날 봐주길 바랐다. 스스로 생각해도 내 모습이 너무 처량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혼자 손을 따느라 낑낑대는 노처녀라니. 그때만 해도 나는 파주에 있는 그녀의 작업실에 갈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설사는 멈추지 않았고, 아침이 되어도 변기를 붙잡고 꽥꽥대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병원에 가니 급성 장염이라고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이메일상으로 인터뷰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박연준(이하 박)│이연미 화가님, 안녕하세요? 오늘 직접 만나 인터뷰를 즐겁게 하고 싶었는데, 사정상 이렇게 먼저 만나네요. 그림을 꼼꼼히 살펴봤는데요, 독특하고 흥미롭더라고요. 저랑 비슷한 또래라 호기심도 더 생기고요. 어떠세요, 요즘 파주에서 작업하시는 거로 알고 있는데 작업은 잘되시나요? 작업 스타일도 궁금해요.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하기도 하나요?
이연미(이하 이)│네, 안녕하세요? 그림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평소 꾸준히 작업하려고 나름 노력하는 편이에요.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은 작업을 해야 한다는 교수님의 가르침이 있으셨거든요. 보통 전시를 3개월 정도 앞둔 상태에서는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 작업에 매달리는 편이에요. 여기 파주출판단지로 이사 오고 나서는 거의 잠자고 밥 먹는 시간 빼고는 작업에 매달린다고 보시면 될 거예요. 그런데 전시 없을 땐 또 그냥 놀아요. 음악은 주로 CCM을 듣는데 정말 바쁠 땐 라디오를 틀어놓기도 해요. 이번 작업할 때는 91.9를 주로 들었네요.
박│언제부터 그림을 그렸어요?
이│그림을 처음 그린 기억은 유치원 때부터였어요. 그때 대회에서 상을 타서 어린 마음에 화가가 되어야지, 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도 재능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화가가 될 거라고 생각해왔어요. 그때의 꿈이 변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네요.
박│그림 소재가 굉장히 재밌어요. 작품의 소재는 대부분 어디에서 찾으세요?
이│주로 노트에 드로잉을 자주 해요. 그리고 나중에 그 드로잉들을 벽에 붙여놓고 보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르죠. 주일 예배 시간에 설교는 잘 안 듣고 드로잉을 자주 하는 편이에요. 점점 작업이 성경의 내용을 강하게 띠어가고 있거든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는 안 하고 딴생각하면서 혼자 놀기를 잘했어요. 그때의 습관이 지금까지 계속되면서 드로잉이라는 방법으로 표현된 거죠.
박│작업을 할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이 있나요? 작가 노트를 보니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게 하는 것’과 ‘유머’를 가장 중요시한다고 나와 있던데요, 저도 이연미 화가님 그림이 유머러스한 부분이 많아서 좋더라고요.
이│저는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 작업이 좋아요. 같은 동물이나 식물을 그리더라도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익숙한 모습이 아니라 약간은 낯설게 표현하고자 해요. 현실과 상상 속 영역의 경계를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합니다. 유머는…… 음, 너무 진지하면 재미없잖아요. 제 그림을 보고 어, 재밌다, 라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살짝 입가 한쪽이 올라가는 정도? 사실 ‘창조’와 ‘유머’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특징이기도 하고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이기도 하죠.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만드셨다고 성경에 나오듯이 우리가 갖고 있는 재능으로 음악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소설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저는 모든 창조의 영역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재능을 닮은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박│좋아하는 화가가 있으신가요?
이│음, 글쎄요. 저는 딱히 어떤 화가가 좋아요, 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안타까운 일이죠. 대학 시절 가장 영향을 받은 작가는 뒤샹이에요.
박│만화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다고 들었어요. 최근 인상 깊게 본 만화가 있다면요?
이│글을 깨친 이후부터 정말 많은 만화책을 섭렵했죠. 수업 시간에 주로 만화책을 보고 따라서 그리곤 했으니까요. 그러다 대학에 가고 어느 순간부터 만화책을 더이상 안 보게 되더라고요. 사실 만화의 절정은 90년대 초·중반이었어요. 제가 나이가 든 건지 지금 나오는 만화책은 그때만큼 재밌지가 않거든요.
박│책은 어때요? 많이 읽으시나요? 좋아하는 작가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이│책은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실제 많이 읽지는 못해요. 사실 작업실을 여기 출판단지로 옮기면서 책을 많이 읽을 계획을 갖고 있어요. 바로 옆에 북카페도 있거든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는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좋아해요. 『개미』와 『타나토노트』를 아주 재밌게 읽었거든요.
박│또래 화가들과도 자주 만나나요? 서로 자극을 받고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지 궁금해요.
이│동기들 중에도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는데 자주 보지는 못해요. 가끔씩 전시를 하면 전시장에 가서 자극을 받는 정도죠. 저는 주로 혼자서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업하는 편이에요.
박│미술계에선 젊은 작가들의 파격적인 작품을 대할 때 어떤가요? 보수적인 편인가요, 아니면 관대한 편인가요?
이│젊은 작가들이니 파격적인 작업을 해도 어느 정도 관대한 편이죠. 현대 미술에서도 나이를 떠나 점점 자극적인 작업을 원하는 상황이고요.
박│어릴 때부터 화가만 꿈꿨나요? 그림 말고 달리 하고 싶은 일이 또 있었다면요?
이│글쎄요, 한땐 만화가도 생각해보고 의상 디자이너도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다 그림하고 관계되는 것들이라서 가장 중심이 되는 순수 미술을 전공으로 택했죠.
박│이연미 화가의 작품을 보면 「완벽한 정원되기」, 「완벽한 10층 목탑 되기」 등 그림에서 ‘완벽한’ 세계를 추구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이연미 화가에게 ‘완벽한 세계’란 어떤 세계인가요?
이│완벽한 정원은 실은 결코 완벽해질 수 없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죠. 저에게 있어 완벽한 정원은 아담과 이브가 살던 에덴동산을 나타내거든요. 하지만 두 사람이 쫓겨난 이후 완벽한 정원은 모습을 감추어버렸죠. 제 그림은 그 정원을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작업들이에요.
박│그러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정원이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 에덴동산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표현한 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어느 평론가는 이연미 화가의 작품에서 ‘심오한 기독교’의 그림자가 보인다고, 종교 그림이라고까지 이야기를 하던데요. 가령 「불타는 정원」 시리즈도 성경의 한 구절을 읽고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고요. 종교가 작품에 미치는 영향이 큰가요?
이│종교가 저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죠. 그렇다고 처음부터 부러 종교에 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아니에요.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제 안에서 흘러나왔다고 보시면 될 거예요. 예를 들어 이번에 전시하게 될 「불타는 정원」 작업도 우연히 종교의 영향에 놓이게 됐는데요. 처음 그 작업을 스케치하고 집에 와서 성경을 읽었는데 우연히 「이사야서」 1장의 내용을 보게 되었죠. 그런데 작업의 이미지와 성경 구절의 이미지가 너무나 똑같이 다가와서 그 구절을 계속 생각하면서 작업을 하게 되었어요.
박│그렇군요. 앞으로도 ‘정원’ 시리즈를 계속 그리실 건가요? 또 다른 계획이 있으신가요?
이│당분간 정원 시리즈를 하면서 다른 시리즈도 시도해볼 생각이에요. 자세한 계획은 비밀이에요!
박│앗, 비밀이라고 하니 더 궁금해지네요. 그렇지만 잠자코 기다리렵니다. 앞으로 더 좋은 작품 그리시길 바라며,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네. 감사합니다. 이번 전시회, 꼭 보러 오세요!
어느 날
그녀는 카프카의 『성』에 나오는 K처럼, 문 닫힌 에덴동산 주위를 서성이는 젊은 유령일까? 아니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폐쇄된 에덴동산에서 남몰래 나무를 가꾸는 발칙한 정원사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부디 이 완벽한 정원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그리고 어느 날. 우린 전시회에서 처음 만났다. 저기 멀리서 그녀가 걸어온다. 자, 우리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인사해야지. 안녕? (*)
이연미 | 2005년 다빈치 갤러리의 <Fantastic Nature>를 시작으로 <I don't know what>(국민아트갤러리), <The Closed Garden>(Tokyo-gallery+BTAP, 도쿄)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2009년 개인전 <The Closed Garden 2nd Story ― 불타는 정원>(인터알리아)을 열었으며, <Wonderful Pictures>(일민미술관), <Young Generation Artist_KOREA>(withspace gallery, 789 artzone, Beijing), <Narrative Play 2009>(갤러리 호) 등의 단체전에 참여할 계획에 있다. 2009~2010년 파주출판도시 아트플랫폼 1기 레지던시 작가로 선발되었다.
박연준 |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