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 조금 넘어 달구가 집에 놀러 왔다. 달구는 그 사이 다 읽은 『슬픈 열대』를 돌려주려고 왔단다. 나는 그를 반갑게 맞는다.
“달구야, 어서 와. 잘 지냈지?”
나는 방석을 내어주며 그를 내 무릎 가까이에 앉힌다.
“네, 형은 어떻게 지냈어요? 옥희 누나, 보고 싶지 않아요?”
“당연히 보고 싶지. 하하.”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나도 모르게 멋쩍게 웃고 만다.
“형, 이 책 잘 읽었어요. 음 여전히 어렵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읽기를 잘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무척 두꺼운 책인데, 그리고 쉬운 내용도 아닌데 그걸 다 읽었다니 참 대견하다. 나는 그 책을 받아들며 설레는 마음으로 달구에게 묻는다. 같은 책을 읽은 두 사람이 그 책에 대해서 각자가 느낀 감상을 이야기하는 것, 나는 이것이 사람의 생활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달구야, 너 혹시 이 부분 기억나니?”
나는 『슬픈 열대』의 어느 한 부분, 내가 좋아하는 문장이 있는 부분을 펼쳐서 읽는다.
“신세계의 도시들은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이것들은 중간적인 단계를 거침이 없이 첫 생성기로부터 바로 노쇠기로 접어드는 것이다. 유럽의 어떤 도시들은 천천히 그리고 평화스럽게 쇠퇴하고 있으나 신세계의 도시들은 영원한 청춘을 간직할 수 없는 하나의 고질(痼疾)과도 같은 계속적인 고열을 지니고 있다.”
내가 이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문장이 묵시록적인 거대한 암시를 단단하게 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 어렴풋이 기억나요. 그런데,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어요.”
“그래, 그렇잖아도 네가 이 책을 다 읽으면 너와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야. 저자인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인데, 그는 이 세계의 진화 과정을 열대가 훼손되는 과정으로 봤어. 열대란 순수의 세계, 그러니까 순수의 시공간을 상징한다고 보면 되지, 여기에서 말한 신세계는 열대의 순수성을 상실한 공간이지. 열대의 순수성이라는 건 사실 말이 거창하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어떤 질서라고 보면 돼. 그런데 그것을 상실한 신세계의 공간은 언제나 고열로 들끓고 있다는 거야. 그 고열은 신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끝없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거야. 다른 이보다 더 빨리 가려고, 더 앞서 가려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더 많은 기쁨을 취하려고 다들 자신에게 적합한 속도를 망각하고 열을 뿜어내는 거야.”
“…”
달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좀 더 설명해달라는 눈빛이다.
“달구야, 나는 말야. 우리 동네가, 우리가 사는 이곳이 이 슬픈 열대처럼 느껴져서 무척 씁쓸해. 너무 비관적인 예감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마을도 고질을 앓다가 죽어갈 것만 같아. 청춘을 잃고 순수마저 잃어버린 거지. 모두들 자기 속도를 모르고 날뛰는 것 같거든. 매일 땅바닥에 부리를 박고 실컷 배를 채우는 비둘기도 그렇고 붕붕거리는 오토바이들도 그렇고 매일 수천 개의 타이어를 만들어내는 공장도 마찬가지야. 탐욕과 이기심으로만 빚어진 표정을 가진 사람들은 또 어떻니.”
“형, 형 말을 들으니 저도 기분이 우울해지는데요. 그렇다면 이 세계는 보편적 질서와 그것을 훼손하려 드는 것과의 싸움터이겠군요.”
“그래 잘 봤어. 보편적 질서라는 게 다름 아닌 순수이고 그것을 훼손하려 드는 것이 바로 야만이지. 레비 스트로스는 또 책 속에서 지나친 소유와 지나친 비참 사이의 간극이 인간다움의 차원을 파괴한다는 말도 했어.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가 모든 것을 바라며 살아가는 사회로, 모든 것을 바라면서도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 사회로 진화해갈 거라고 암울한 전망을 했지.”
“그건 또 무슨 말일까요?”
달구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나는 곰곰 생각에 잠긴다. 과연 훼손과 파괴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회를 진화하는 사회 혹은 진보하는 사회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그건 아마도, 인간 사회의 격렬한 분열을 예고한 걸 거야. 우리의 사회는 결코 합치될 수 없다는. 선과 악의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하늘을 날던 비둘기가 아무렇지 않게 땅을 더럽히는 것처럼. 내가 쓰는 시가 하늘에 닿지 못하는 것처럼.”
“후유.”
달구가 한숨을 쉬는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레비 스트로스가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계기가 자신이 더 이상 대학교수가 될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세속적 욕망을 포기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서야 세계의 비밀을 볼 수 있는 영민한 눈을 갖게 된 거지. 우연한 일이겠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니? 만약 레비 스트로스가 대학교수가 되었다면 그는 이 파괴되어가고 멸실되어가는 인간 세계의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 불후의 명저 역시 태어나지 않았겠지.”
“흠, 그렇구나.”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한다. 이제는 뭔가 유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달구는 다름 아닌 옥희 씨의 소식을 내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랑의 메신저가 아닌가.
“뭐 다른 이야기는 없니. 식당은 잘 되고?”
“하하, 옥희 누나 이야기 듣고 싶은 거죠? 옥희 누나는 잘 지내요. 여전히 주방 일에 홀서빙에 바쁘죠. 하지만 요령껏 일을 아주 잘해요. 옥희 누나는 식당 쉬는 날만 기다리는 눈치예요.”
나는 달구의 말에 말없이 웃는다. 달구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식당에는 여전히 오는 사람들만 와요. 세탁소 박씨 아저씨, 목욕탕 손씨 아저씨는 거의 매일 오죠. 계씨 형제들도 오고, 왕 경장과 정 순경도 오구요. 예전과 다른 건 새엄마가 미용실에 간다, 찜질방에 간다면서 자리를 자주 비우는 거예요. 그런데, 어제는 손씨 아저씨가 저녁때 와서는 혼자서 술국이랑 술을 시켜서 빠르게 먹고는 작정을 한 듯 새엄마한테 시비를 걸더라구요. 새엄마가 아버지랑 옥희 누나랑 나를 내몰아서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잘은 모르겠는데, 두 사람 대화 중에 오토바이 상회 계씨 형 얘기가 자꾸 나오더라구요. 저는 예전부터 눈치를 좀 채고 있었는데, 목욕탕 손씨 아저씨는 새엄마를 좋아하고 새엄마는 계씨 형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 손씨 아저씨가 질투심 때문에 어제 시비를 걸었던 모양이에요. 제법 큰소리도 나고 그랬어요. 아버지는 가게 앞에서 말없이 담배만 태우다가 남산 공원 쪽으로 걸어가시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