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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들어 유럽 세계가 동방 세계를 기웃거린 속사정 가운데 의외로 언어 문제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바벨탑의 저주’ 이후 지상에서 자취를 감춘 보편 언어에 대한 관심이 이런 기웃거림을 촉발시켰던 것이다. 한때 잃어버린 ‘아담의 언어Lingua Adamica’가 거기 있었으면 했던 것이니, 프레스터 존의 왕국을 찾아 나선 선교사들의 서찰은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세계의 동쪽 끝 카타이(중국의 다른 명칭)라는 나라 사람들은 노래로 말을 한다는 거였다. 그들 귀엔 중국어의 성조가 그렇게 들렸던 모양이지만, 노래로 말을 하는 나라, 그 나라에서 아득한 기억 속의 실낙원을 떠올린 건 어찌 보면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런 충동은 중세 내내 지속되다가 17세기에 들어 ‘보편의 우주’라는 시대정신과 맞물려 한층 확산되었다. 그 가운데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다른 세상』(1659)이라는 우주 여행담은 오늘날 SF 소설의 할아버지뻘이 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다케다 마사야가 쓴 『창힐의 향연』이란 책에 의하면, 주인공 시라노는 달이 지구와 같은 천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달나라로 간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달나라에 도착한 시라노는 거기서 예언자 엘리야를 만난다. 엘리야에 의하면 달나라는 구약에서 말하는 낙원으로, 여기서 살던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과실을 먹은 죄가 두려워 지구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대목은 달나라의 언어다. 그곳의 언어는 이런 식이다.
—이곳의 상류 인사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확실히 구별되지 않는 거의 동일한 음으로서 겨우 음조가 다를 뿐이다. 마치 지구에서 딱히 정해진 가사가 없는 곡을 듣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훌륭한 발명이라 해야 하니, 실로 듣기에도 유쾌하다.
—다음은 서민의 언어이다. 이것은 몸을 여러 가지로 움직임으로써 언어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는 듯 보이지만 어쩌면 내 짐작이 틀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몸의 어떤 부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장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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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동방의 사정은 유럽인들의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혼돈(babel)의 땅 위에 사람의 무늬가 덧씌워지자 동방의 하늘에서도 우려의 목소리와 탄식의 씩둑거림이 꽤나 무성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양상은 서방의 하늘에 비해 보다 인간적이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황제(黃帝)의 사관(史官) “창힐(倉?)이 문자를 만들자 하늘이 곡식을 뿌렸고 귀신은 통곡했다”는 것이다.(『淮南子·本經訓』)
귀신의 통곡은 지상에서 더 이상 일거리를 찾을 수 없는 것에 대한 회한이었으리라. 그런데 곡식은 왜 쏟아졌던 것일까? 주석을 보면 귀신이 통곡한 이유가 단순히 회한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정은 이랬다. “창힐은 처음으로 새의 발자국 모양을 보고 서계(書契)를 만들었다. 그러자 사기와 허위가 생겨났다. 사기와 허위가 생겨나자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뒤쫓으며, 농사를 버리고 송곳과 칼을 날카롭게 연마하는 데 힘을 쏟게 되었다. 하늘은 인간이 굶주리게 될 것을 알고서 곡식을 뿌렸다. 귀신은 문서로 탄핵받을까 두려워 밤새 울었다.”(高誘)
‘문화’라는 것의 실상은 알고 보면 이런 것이었다. 그래도 당시의 문자에선 사물과 기호의 사이가 그럭저럭 괜찮았던 모양이다. 예전 시골 장터 어귀에서 마술 같은 손놀림으로 우리의 동심을 희롱하던 혁필화(革筆畵)를 떠올려보면 된다. 그림과 문자의 중간태쯤 되는 거기서 사물이 기호를 낳고 있는 것인지 기호가 사물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 탈변이 그림에서 기호의 방향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탈변의 결과 동방의 땅에서도 사물과 기호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어그러지고 말았다. 『논어』에서 ‘이름을 바로잡는(正名)’ 문제가 거듭 제기되는 걸 보면, 공자가 살았던 시대쯤이면 그 불화의 수준이 제법 심각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이 문제를 둘러싸고 사제지간에 낯 뜨거운 언쟁을 벌이는 일쯤은 이제 낯선 풍경만도 아니었다.
자로가 말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기다려 정사를 하려고 하십니다. 선생님께선 무엇을 우선하시렵니까?”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이름을 바로잡고야 말겠다.” 자로가 말했다. “이러하십니다. 선생님의 세상물정 모르심이여! 어찌 바로잡는단 말씀입니까?”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비루하구나, 유(由)여!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는 말하지 않고 가만있는 것이다.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하지 못하고, 말이 순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알맞지 못하고, 형벌이 알맞지 못하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다. 그런 고로 군자가 이름을 붙이면 반드시 말할 수 있으며, 말할 수 있으면 반드시 행할 수 있는 것이니, 군자는 그 말에 대해 구차하게 갖다 붙임이 없을 뿐이니라.”(『論語 ? 子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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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고 흘러 21세기 동방의 한 나라에서 기묘한 언어가 생겨났다. 그 기묘함은 저 유럽의 17세기가 발견한 달나라의 언어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대개의 언어는 인과율과 모순율에 근거하기 마련인데, 유독 이 나라의 언어는 그런 논리학을 한참 웃도는 것이었다.
달나라의 언어처럼, “이곳의 상류 인사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확실히 구별되지 않는 거의 동일한 음으로서 겨우 음조가 다를 뿐이다.” 그 ‘음조’는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권력 오남용’, ‘논문 표절’ 등등 찬란하기 그지없지만, 그것이 터하고 있는 ‘음’은 한 결 같이 동색이다. ‘불찰’과 ‘죄송’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이 나라 상류 세계 언어의 랑그인 셈이다. 그러니 최소한의 언어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선 이것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읍소를 하거나 그냥 우기면 된다. 언어의 리듬이 “딱히 정해진 가사가 없는 곡”처럼 워낙 유연한지라 얼마든지 빠져나갈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시라노가 이 나라에 와서 그들의 언어를 들었다면 분명 ‘훌륭한 발명’이라 무릎을 쳤을 것이다. 그런데 ‘유쾌함’을 느꼈을지 어떨지는 장담을 할 수가 없다.
더 요지경인 건 이 나라 언어의 독특한 문법이다. 가령 입으로는 ‘친 서민’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는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편다. 또 말로는 ‘통일 준비’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전쟁을 부추긴다. 그런데 이것이 전혀 모순이 아니라는 데 그 오묘함이 있다. 전 세계에 통용되는 색상적 통념과는 달리 이 나라의 ‘녹색’은 난개발의 상징이다. 그래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 ‘A’와 ‘not A’를 순연히 매개하는 어떤 DNA가 이 나라 사람들의 피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DNA 분석이 첩경이다.
어디 그뿐이랴. 하늘에선 주기적으로 신비한 ‘말씀’이 강림해 이 불편한 의미의 단층을 말끔히 메워준다. 보도에 의하면 얼마 전에도 두어 차례 이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구의 기상도가 악화일로에 놓여 있는 이 판국에 신이 이처럼 한가하실 리 만무하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쯤이야 사탄의 요설로 치부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 메시지에 이 나라 언어의 또 다른 속성이 담겨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제 목소리를 제가 듣는 못된 습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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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공상철
중국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문화적 자산을 문명사적 지평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몇 분과 함께 『루쉰(魯迅)전집』 한국어판 완역 작업에 임하고 있다. 숭실대학교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