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사건으로 온 나라가 복수의 념으로 들끓던 그날, 30년 넘게 소설을 썼다는 어느 노작가는 ‘졌다’는 한 마디로 항복 선언을 했다. 바로 그날, 명색이 학자인 나는 내 고장 난 인식의 가늠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 사전에 항목 하나를 추가했을 뿐이었다. 진실의 판별이 신념의 문제로 대체된 마당이었으니, 내 나름의 방식으로 시시비비를 따져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래 내용은 그날 추가한 「國」이라는 항목에 관한 것이다.
【본의(本義)】 ‘나라 國’, 사람의 마을이라는 의미. 이것의 구성 원리는 첩첩이 벽을 쌓음으로써 안위를 보장받는 전형적인 토건적 세계관.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음. 먼저 땅 위에 네모난 벽을 쌓음.(므) 그리고 그 오른쪽에는 진한(秦漢) 시대 중무장 보병의 기본 무기인 과(戈)를 세웠음. 훗날 ‘혹시’, ‘어쩌면’ 등의 의미로 쓰이게 되는 이 글자(或)는 성벽 위에서 무기를 든 병사들이 사주경계를 하고 있는 모습. 그런데 이것도 불안했는지 이 바깥에 외벽을 하나 더 둘렀음.(國) 그러니까 이 글자는 저 피비린내 무성하던 혼란기의 산물로 전쟁 공동체의 모습인 셈. 공동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적잖은 시사점을 제공.
▶ 참조: ‘nation’을 ‘민족’ 혹은 ‘국족’으로 번역할 때 여기서의 ‘族’ 역시 같은 맥락임. 광장 한가운데 깃발이 꽂혀있고 그 아래 화살이 놓여있는 모습. 외부 적과의 전쟁에 기꺼이 참전할 수 있는 집단의 범위를 일러 그렇게 불렀음.
【반의(返義)】 ‘갈 수 없는 나라 國’, 고암 이응로의 해석물. ‘동백림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뒤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꿈꾼 그만의 나라. 이 나라는 뿌리 깊은 공동체의 원형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서 출발함. 그 구성 원리는 다음과 같음. 먼저 ‘나라 國’에서 바깥의 성벽을 시원하게 걷어내 버렸음. 그리고 그 안의 작은 성벽 자리에 기린같이 생긴 동물 하나를 세움. 그 오른쪽 살벌한 무기가 있던 자리엔 아름드리나무를 심고, 또 기린의 등 위로 뭔가를 얹은 다음 그 위에 초롱초롱한 눈망울 세 개를 앉힘. 이 눈망울들을 통해 하이톤으로 뭔가를 재잘거리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냄으로써 공동체 전체에 싱그러운 공기를 조성. 결국 ‘나라 國’에서 벽을 생명으로 거듭나게 했고 쇠를 녹여 나무를 심은 형태. ‘나라 國’에 내포된 양의 원리가 음의 원리로 문명사적 전환을 이룩한 형태. 현실 사회에서 구현되기는 근본적으로 불가능.
【오용 사례】 국격(國格): 2010년 3월을 즈음하여 만들어진 권력 발 신조어. 어조가 불순하고 화성이 불협한 것이 애초부터 수상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음. 글자 자체의 의미는 ‘국가의 격조’ 내지 ‘공동체의 품격’이라는 뜻. 그러나 실상은 본래 의미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 오히려 최근 들어 ‘글로벌 호구’라는 신조어와 동의어가 되어가는 추세. 이 단어가 실제적으로 지시하는 바는 아래 기사를 참조.
정부는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국격을 높이기 위한 세부 추진과제 80개를 선정하고, 5대 추진방안 및 국민실천 4대 과제를 본격 추진키로 했다. (…) 5대 추진방안은 ▲질서가 지켜지는 기본이 된 나라 ▲나누고 배려하는 따뜻한 나라 ▲전통과 미래가 어우러진 문화·기술 강국 ▲투명하고 경쟁력 있는 선진 시스템 ▲세계와 함께하며 존경받는 나라다. (…) 4대 실천운동은 ▲끼어들기·꼬리물기·갓길운행·음주운전 안 하기 ▲공공장소와 휴대전화 시 작은 목소리로 하기 ▲깨끗한 거리와 간판 만들기 ▲사이버 예절 지키기다. |
----------------------
필자 소개
공상철
중국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문화적 자산을 문명사적 지평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몇 분과 함께 『루쉰(魯迅)전집』 한국어판 완역 작업에 임하고 있다. 숭실대학교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