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主戰)과 주화(主和)
옛글을 읽다 보면 종종 실소할 때가 있다. 예컨대 이웃나라에서 군대가 쳐들어올 판이다. 국력과 군사력을 헤아려보면 싸워서 이길 승산이 없다. 그런데 주전파(主戰派)는 전쟁을 해야 한다고 우긴다. 주화파(主和派)는 비겁한 자, 비루한 인간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결과는? 결국 처참한 몰골로 얼어붙은 땅에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을 하고 만다. 기묘한 것은 거센 목소리로 주전(主戰)과 척화(斥和)를 외쳤던 자들의 당파와 그 후손은 전쟁을 초래한 책임을 지기는커녕 승승장구하면서 영원히 권세를 누린다는 것이다. 주화파의 후손은 몰락하여 흔적이 없다. 병자호란 이야기다.
실학자 성호는 어떤 쪽인가. 주전인가, 아니면 주화인가. 우선 그의 전쟁에 대한 소견 한 토막을 들어보자.
나는 전쟁이 날 경우, 화친을 빌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화친하고 항복을 빌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항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라가 땅이 깎이고 약해지는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왜냐? 집에 대대로 전해져오는, 큰 값이 나가는 보배가 있다고 하자. 남이 와서 그것을 빼앗으려 한다. 싸운다면 사랑하는 내 자식이 죽을 것이고, 주면 아비와 자식이 그나마 편안하게 살게 된다. 사랑하는 자식의 목숨을 집안에서 물려온 보배와 바꾸어야 할까? 아니면 상대와 힘을 견주어보고 그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어야 할까?
나는 오월왕(吳越王) 전씨(錢氏)가 했던 일에서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다. 그는 부득이한 상황이 되자 항복하였으니 이것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고, 나라를 이롭게 하자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화친과 항복을 빌다(乞和乞降)」, 13권, 인사문〕
전쟁이 날 것 같으면 화친, 곧 외교적인 해결이 최선이고, 힘이 모자라면 싸우려 들지 말고 항복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한다. 좀 비겁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맞서서 다툴 경우 ‘사랑하는 자식이 죽는다’. 비겁해 보이지만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보화를 내어주면 ‘부자’가 모두 소중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성호는 역사에서 그 전례를 찾는다. 오대(五代) 때 항주 일대에 있었던 오월국(吳越國)의 왕 전숙(錢?)은 송(宋)나라가 천하를 석권하자 버틸 수 없음을 알고 미리 항복하여 전쟁을 피한다. 이런 생각에서였다. “백성의 생명을 생각하자. 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번지는 생각이다. 사람의 생명이 중요한가, 국가가 중요한가. 근대 국민국가의 국가주의 교육은 워낙 개인의 대뇌와 신체의 밑바닥까지 침투해 있거니와,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다는 생각이 편만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한 인간이 죽을 경우 그에게 우주의 모든 존재가 지워진다. 개인의 죽음 앞에 도대체 국가란 무엇이란 말인가. 성호에게는 무엇보다 인간 개체의 생명이 우선이다. 그다음이 백성, 지금으로 치면 국민이고, 그다음이 국가다. 아마 왕은 또 그 다음일 것이다.
「화친과 전쟁(和戰)」(13권, 인사문)에서 성호는 이웃에 있는 적국과의 관계 설정은 단 두 가지뿐이라고 말한다. ‘화친할 만하면 화친하고’ ‘외교를 단절할 만하면 단절하는 것’이 그것이다. 곤란한 것은 ‘그 중간의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단절하는 길’은 곧 전쟁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 길이 있다. ‘단절하면 반드시 노해야 하고, 노하면 반드시 침공해야 하는’ 것이다. 즉 먼저 침공하는 경우다. 만약 단절했을 경우 상대방이 먼저 침공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의 힘을 헤아려 막을 수 있으면 막고, 만약 자신의 힘으로 대적할 수가 없어 막을 수가 없으면 패배하여 멸망을 당해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간명하다. 성호는 냉정하게 판단하건대 이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한다. 곧 “약한 입장에서 강한 자를 대처하는 데 다른 어떤 방법도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라. 인적이 없는 어두운 밤에 총을 든 강도를 만났다. 그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장 곤란한 경우는 다음과 같은 경우다.
막지 못할 것을 이미 잘 알건만, 패배하여 멸망당하는 것은 싫다. 걱정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가득하건만, 겉으로는 상대를 무시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여 반드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당하고서야 화친을 빌고 항복을 비니, 그것이 무모한 짓거리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옛날 추(鄒)나라 목공(穆公)이 노(魯)나라와 싸워 지고서도 뉘우칠 줄 모르고 백성을 많이 죽여 이기고자 하였으니, 자신의 역량을 살피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다(「화친과 전쟁」)
워낙 힘의 차이가 나서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다. 싸우면 반드시 패배한다. 하지만 지기는 싫다. 겁도 나지만 드러낼 수가 없다. 때문에 큰소리를 치다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당한 뒤에야 비로소 항복한다. 성호는 그 예로 『맹자』 「양혜왕」 하편에 실린 추나라 목공의 경우를 든다. 추나라는 약소국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작은 나라다. 이웃에는 노나라가 있다. 싸움이 붙었지만 상대가 되지 않는다. 목공은 맹자에게 묻는다. 내 부하들이 33명이나 죽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아무도 죽은 자가 없으니 괘씸하기 짝이 없다. 이들을 죽이자니 다 죽일 수가 없고, 살려두자니 그들이 자기 윗사람이 죽는 것을 고소하게 여기며 도와주지 않는 것이 미워서 견딜 수 없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졌다면 왜 졌는가 자신을 돌아볼 만도 한데, 반성할 줄 모르고 백성 탓을 한다. 맹자는 답한다. 평소에 백성을 굶기고 학대했으니, 그 백성이 당신의 전쟁을 돕겠는가? 정신 좀 차리시라.
성호는 아마 병자호란 때를 상상했을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그 사태다. 욱일승천하는 기세의 청나라 군대를 막을 도리가 없다. 마음속에는 공포가 들끓고 걱정이 가득하다. 하지만 밖으로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며 죽기까지 싸우자고 큰소리를 친다. 결과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남한산성 아래 얼어붙은 땅에 인조가 머리를 찧으며 항복을 하고 말았다.
성호는 『맹자』의 「양혜왕」 상편 한 구절을 인용한다. “작은 것은 큰 것을, 적은 것은 많은 것을, 약한 것은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없다.” 작은 것이, 적은 것이, 약한 것이 크고 많고 강한 것을 이겼다는 이야기는 어쩌다 있는 예외일 뿐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던 것은 아마도 단 한 번의 희귀한 사례일 뿐이다. 이길 수 있을 때 싸워야 하고,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하는 법이다. 이순신이 적은 수의 함대로 떼로 몰려드는 일본 수군을 이긴 것은, 배후에 지리와 인화, 전술 그리고 우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물정 모르는 강경론자들은 늘 영웅적인 투쟁을 들먹이면서 싸움과 전쟁을 지껄인다. 성호는 그 철없는 강경론자를 비판한다.
사마귀가 팔뚝을 휘둘러 수레바퀴를 막는 것처럼 허풍이나 치고 우쭐거리다가 요행히 멸망하지 않으면, 헐떡이던 숨이 조금 가라앉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전에 내뱉었던 말을 다시 입에 올리고는 짐짓 노여워하면서 큰소리를 쳐대는데, 말만 꺼내면 군대요 전쟁 이야기다. 이것이 저 시장바닥에서 얻어터지고는 집에 돌아와 캄캄한 방 안에서 혼자 용기를 부리는 것과 무어 다르랴?(「화친과 전쟁」)
아마 이 대목에서 성호는, 입만 열면 북벌을 외치는 노론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요즘도 전쟁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같은 민족 간에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호의 다음 말을 들려주고 싶다.
당나라 사람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한 장수가 공을 이루면 만 사람의 뼈가 마른다(一將功成萬骨枯).” 정말 뼈에 사무치는 말이다. 맹자는 “땅을 다투고 성을 다투어 사람을 죽여 죽은 사람이 성에 가득하다면 이것이야말로 큰 죄다”라고 하였다.
다만 외적의 침입은 막지 않을 수 없다. 생각지도 않게 강한 외적이 쳐들어온다면, 나는 그것을 막을 방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라는 스스로 막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힘에 의지해야 하는 법이다. 만약 평소 백성을 후하게 길러놓지 않았다면, 난리가 났을 때 어떻게 백성의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화친과 항복을 빌다」)
한 사람 전쟁 영웅의 이름 뒤에는 무수한 범인들의 죽음이 있다. 한니발과 나폴레옹과 광개토대왕과 연개소문과 맥아더의 이름 뒤에는 소중한 생명을 잃은 원귀들이 있는 것이다. 전쟁은 백성과 국민의 목숨을 요구하지만, 그것으로 생기는 이익을 차지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것은 아마도 조국과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전쟁을 부추긴 자들일 것이다.
다시 물어보자. 성호는 주전파인가, 주화파인가? 나는 성호를 오직 개인과 백성의 생명을 위하는 생명파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