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연구하기로 결심하다
장정일 | 웹진 나비에서 의욕적으로 시작하는 논픽션 읽기의 첫 번째 서적으로 『그들의 새마을운동』(푸른역사, 2009)을 이문재 선배와 제가 함께 고르고, 읽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자이신 김영미 선생님을 모셨습니다(인사). 원래 약속이 오후 3시였고, 제가 정시에 왔는데도 두 분이 먼저 와 계셨군요. 무슨 얘기를 나누시던 중인 것 같았는데…
이문재 | 새마을운동은 전국적으로 벌어졌는데, 왜 하필이면 경기도 이천시를 선택했는지 그게 궁금해서 먼저 물어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가깝지 않은 오지가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장정일 | 저도 그게 궁금했습니다. 예를 들어 술자리에서 농담조로 말하는 B·Y·C(봉화·영주·청송) 같은 오지로 들어가야, 새마을운동 이전과 새마을운동 이후가 더 확연히 드러나는 게 아닌가,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김영미 | 방법론과 주제가 정해져 있었다면 표본을 정했겠지만, 처음 이 연구를 할 때는 새마을운동으로 주제가 정해진 것도 아니었고, 이 책에서와 같은 방법론이 정립된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일단 민중의 삶과 지역 속으로 들어가자는 의지가 더 컸죠. 민중의 역사를 쓰자는 일념으로 부천·속초·양양·평택 등 여러 지역들을 탐사하고 지역민들과 인터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천시에서 시사市史를 정리하겠다면서 연구비를 지원해 주었어요. 그래서 이천에서 먼저 시작을 하게 된 거죠.
장정일 | 그럼 이천 시사를 정리하겠다는 일환으로 이 지역이 선택된 건가요?
김영미 | 네, 이천시의 마을사를 정리하겠다는 걸로 지원을 받은 거죠.
장정일 | 그랬군요. 원래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등정팀이 작전을 먼저 짜는 것처럼, 문재 선배와 제가 먼저 만나 대략의 질문들을 모아봤어야 했는데…
이문재 | 여기 높은 산이 계시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면… (웃음)
장정일 | 그럼 제가 준비해 온 대략적인 질문부터 해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책을 쓰시기 전에 했던 연구를 먼저 정리해주시고, 이 책을 쓰시기 전의 작업 즉 『동원과 저항 -해방 전후 서울의 주민사회사』(푸른역사, 2009)와 이번 책의 연관성을 좀 말씀해주십시오.
김영미 | 제가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던 때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 현대사 붐이랄 수 있는 시대가 열려서 미군정기와 관련된 연구 성과들이 많이 나올 때였습니다. 저도 그 일환으로 미군정기를 연구했고, 93년에 미군정기 입법기구(미군정기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 관한 석사논문을 썼어요. ‘분단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기 위한 작업이었죠. 그런데 입법기구로 석사논문을 쓰니까 정책만 있고 사람은 없는 거예요. 그때 나온 연구 성과들의 대부분이 미국의 대한對韓정책, 정치엘리트들의 노선 등을 중심으로 연구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진보적인 연구라고 하더라도 민중사회가 탐구되기보다는, 민중운동을 지도했던 엘리트들의 이념적 지향이 잘 됐느냐 잘못 됐느냐, 민족적이었느냐 반민족적이었느냐 이런 식의 평가를 내리기 위한 연구가 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역사라는 것은 미국과 이승만과 여운형과 박헌영과 김일성, 이런 엘리트들이 만들어가는 건가 하는 허망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보통 사람들은 그 시대에 뭐 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 거죠. 다시 말해 보통 사람들에 대한 접근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게 당시 현대사 연구 풍토였는데, 그건 민중이 배제된 민중사, 민중사를 표방하지만 상당히 엘리트적인, 정책결정론적인 연구가 아니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책이 곧 역사가 아니잖아요?
장정일 | 정책사로 석사논문을 쓰시고 나서, 역사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셨군요.
김영미 | 우리는 국가권력이 대단히 강하다고 얘기를 하지만, 국가권력이라는 것도 신이 아니잖아요. 국가 정책이라는 것도 사람들의 생활공간에서 많은 수정과 시행착오를 겪고 역사적 실제를 구성하게 되는데 역사가들은 마치 그게 역사인 것처럼 접근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문제의식하에서, ‘나는 무엇을 연구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고, 사회사를 연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박사과정에 들어간 96년도부터는 해방공간에 나온 신문의 사회면만 읽기 시작했죠.
장정일 | 모든 신문을 말입니까?
김영미 | 전국적인 범위를 놓고는 그 사회의 변화를 볼 수 없죠. 지역을 한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의 지역 사회와 관련된 모든 기사들을 보는데, 사회면 가운데서도 한 귀퉁이의 자투리 기사들만 중점으로 읽으면서, 동洞단위의 움직임들을 추적했습니다. 그런 작고 구체적인 변화를 주목해 보면서 정치와 사람들의 생활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본 겁니다. 그렇게 해서 씌어진 게 『동원과 저항』입니다. 사실 해방공간에서 정치운동이 굉장히 활발한 것처럼 보이지만―그 당시 해방은 굉장히 혁명적인 것이라고 보이지만―실제 해방공간 정치에 사람들을 동원했던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은 식민지시기에 이루어진 동회洞會 시스템이 그대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던 거죠. 지금은 동회, 동사무소 이런 단어가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원래 동회라는 것은 식민지시기 도시에서 유지와 지역주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일제의 동원조직이었죠. 흥미롭게도 해방 직후에 서울에서 이루어진 정치운동도 그 주민 동원의 중요한 기반은 동회조직이었습니다. 서울 시내에 있는 약 300여 개의 동회를 이용하면, 동회장 당 100명씩의 인원만 동원해도 정치 집회를 열 수 있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해방공간의 좌익과 우익의 정치적 집회는 단순히 그 집회에 많은 사람들이 갔다고 해서 좌익을 지지하고, 우익을 지지했다고 단순화시킬 수 없죠. 동회장을 통한 식민지 동원시스템을 과연 누가 장악하고 있느냐에 따라 동원력의 차이가 달라졌던 거니까요. 저의 박사논문이기도 한 『동원과 저항』은 식민지 시기와 연속선상에서 동회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했던 연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정일 | 말씀을 들어보니까 『동원과 저항』에 이미 민중의 삶을 복원하겠다는 『그들의 새마을운동』의 의중이 일부 드러나 있군요. 또 식민 시대의 유산인 동회가 해방공간의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동원과 저항』의 발견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일제시기의 농진운동과 연속성을 갖는다는 『그들의 새마을운동』의 발견과 서로 닮은 데가 있군요. 진도를 내기 전에 방금 하신 말씀에 대한 질문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일제시기 이전에 우리나라에는 동회와 같은 게 없었습니까?
김영미 | 동이라는 것은 자연발생적인 것이니까, 전통시대에도 자치적인 네트워크로써 주민들을 묶어주는 조직을 동회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 같은 경우 식민지 동회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인 1930년대 이전에 동회와 같은 주민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은 생활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예를 들어 상여를 같이 구입한다든지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치기구로서 동회라는 것이 있었죠. 또 대다수 마을에는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동리의 신이 있다고 믿으면서 동제(洞祭:마을제사)라는 것을 지내기도 했죠. 그런 게 있었는데 일제시기에 도입된 동회제도라는 것은 도시 주민들이 생활의 편의를 함께 해결하는 단위이면서, 하부단위에는 없는 국가와 행정기관을 연결해주는 행정사무도 담당하는 것입니다. 국가 입장에서는 효용성이 굉장히 큰 거죠. 일본도 당시에는 동 단위에서는 사무적 행정기관이 배치되어 있지 않은데,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카이(町會)를 조직해서 행정보조사무를 하니까, 국가는 그것을 잘 통제하기만 하면 국가의 정책을 시행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세포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일본의 정회제도를 조선에도 도입한 겁니다.
장정일 | 일제 이전에도 경조·상조·부조를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동회가 있긴 했는데, 일제가 들어오면서는 국가권력이 자신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행정의 하부에 통치를 위한 스트로우를 하나씩 꼽은 게 동회로군요. 그리고 그게 해방 직후부터 현재까지 죽 이어져 온 거구요.
김영미 | 그렇죠. 동회라고 할 때 동회는 주민자치모임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역원(임원)들은 돈도 받지 않았어요. 이건 그냥 봉사니까, 국가는 하나도 행정비용을 들이지 않고 무보수로 지역유지들을 동원할 수 있는 거죠.
이문재 | 아까 정일형도 말했지만, 선생님께서는 처음 내신 책부터 지금까지의 연구가 연속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영미 | 중요 연속성은 보통사람들의 존재와 삶이 어떻게 정치랑 결부되어 있었느냐, 그런 것을 규명하기 위한 사회사라는 거죠. 『동원과 저항』은 자료적인 부분에서 볼 때 신문에 나타나 있는 자투리 기사가 중심이었는데, 그걸 하면서 한계를 느꼈습니다.
이문재 | 그래서 현장으로 들어가신 거군요.
김영미 | 맞습니다. 보통사람들과 밀착한다고는 했지만, 신문에 보도된 사람들조차도 너무나 엘리트였던 거죠. 그래서 현장으로 더 들어가야겠다, 자료적 한계를 어떻게든 극복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문재 | 학계 내부에 이런 변화가 왜 이제야 일어났는지, 물론 그런 계기가 선생님의 개인적인 각성일 수도 있지만, 학계 분위기의 변화 같은 것도 듣고 싶습니다.
김영미 | 학계 전반의 분위기 변화를 제가 외람되게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변화는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진보적 역사학의 토대는 역시 맑시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민족문제와 계급적 갈등이 대단히 치열했기 때문에 맑시즘에 경도된 분위기였죠. 그런데 맑시즘은 굉장히 확신에 찬 이념이고 계급계층 관계에 입각해 도출되는 민중이라는 존재는 미래사회를 열어나갈 존재였습니다. 이처럼 이 이론 자체가 너무 확고하기 때문에 민중의 존재 양태라든가 한국사회의 특성 등을 면밀하게 보지 않고 도식적으로 역사적 변화의 문제를 봄으로써 오히려 민중들이 연구대상에서 소외되지 않았나? 맑시즘으로 한국 사회나 세계를 다 분석할 수 없다는 것을 서서히 자각해가면서, 맑시즘을 보완하거나 대체할 만한 새로운 사회분석틀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면서, 또한 한편으로는 ‘어떤 하나의 이론을 가지고 사회를 본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고민도 하게 되고, 그렇다면 역사학은 무얼 할 것인가? 결국 역사학은 그 대상을 좀 더 겸허하게 면밀하게 사회 변화를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까지 하게 된 거죠.
이문재 | 역시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가 가장 큰 영향을 준 거로군요.
김영미 | 그렇습니다.
장정일 | 1990년대 이후의 역사적 연구 동향이 일상적이고 사회사적으로 된 것은, 우리나라 학계와 사회 내부적인 변화와 요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 외국의 역사이론을 급급히 수입한 것은 아니군요.
김영미 | 그렇죠. 아날학파나 미시사 이론이나 관련 서적은 이미 이전에 나와 있는 거였습니다. 다만 당시의 우리나라 역사 연구에는 더 시급한 것들이 있어서 아무도 안 본 거죠.
‘새마을운동’에 대한 이분법적 해석을 넘어서
장정일 | 자, 그러면 이제 겨우 산기슭에 당도한 건가요? 『그들의 새마을운동』을 읽으면서, 이 책 이전에도 새마을운동에 관한 연구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새마을운동』 이전의 새마을운동 연구는 어땠는지요?
김영미 | 국가주의적 관점(리더십 관점)에서 주로 접근했죠.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박정희 정부의 효율적 근대화, 집중적이고 효율적인 농촌 근대화가 바로 새마을운동이었기 때문에 그 리더십이 굉장히 훌륭하다고 평가되죠. 그 선상에서 그런 효율적 리더십을 어떻게 발현시키게 되었는가, 그 메커니즘이 무엇이었느냐를 분석하려는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 부정적인 입장에서, 새마을운동은 농촌을 근대화시키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유신이라는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농민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려 했던 권위적 동원 체제라고 보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보냐 하면, 방금 예로 든 상반된 두 입장 모두가 대단히 ‘위로부터의 새마을 연구’라는 것입니다.
이문재 | 과연 새마을운동이 없었다고 해서, 박정희의 리더십이 없었다고 해서, 농촌이 더 나빠졌겠는가, 아니 새마을운동이 없었다면 오히려 농촌이 더 좋아질 수도 있었을 거라는 얘기가 이 책 안에 녹아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논쟁적이기 때문에 다시 논의되겠지만, 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이 있는지요?
김영미 | 저는 도시 부산에서 출생했는데 다행히―역사학자가 되라고 그랬는지 몰라도―초등학교 2학년 때 시골 남해 설천면 할머니 댁에 1년 정도 보내졌습니다. 그때가 새마을운동이 막 중반기에 접어들던 시기였어요. 수업하다가도 겨울철에 보리 밟으러 가고, 퇴비를 수집하러 풀 베러 가고… 집단적인 정신을 많이 심어주려고 한 것 같아요. 학교 갈 때도 ‘부락깃발’ 아래 모여서 줄지어 가고, 올 때도 부락깃발 아래 모여서 오고. 개인을 집단적으로 동원하려고 했던 기억들이 남아있습니다. 마을에서 학생회 같은 회의도 많이 했던 것 같고.
장정일 | 그때 어른들이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시는지요? 잘살게 해준다니까 싫어하지는 않았겠지요?
김영미 | 제 9살 때 기억으로는, 마을을 위해서 하는 거다. 그러니 이 일은 좋은 거다. 그러나 무척 귀찮다. 하지만 빠지면 안 된다… ‘마을을 위해서’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자발적 복종심을 유발했던 것 같습니다.
이문재 | 이 연구를 하시기 전에, 역사학도로서 새마을운동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지요?
김영미 | 연구 전에는 관제적 농촌운동이었다는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연구대상으로 삼을 가치조차 없다고 여긴 거죠. 그런데 연구를 하면서는 정책 지배자의 의도도 있지만, 여기 합류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공동체에 대단히 헌신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은 아래로부터 새마을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국가의 동원이라는 이질적 의도의 상호 결합물이라고 보게 된 거죠. 새마을운동은 국가가 아래로부터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그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욕망들을 포섭해낸 굉장히 관제적인 운동이었지만, 이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자기 공동체에 대한 헌신성은 제대로 평가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장정일 | 방금 대중의 자발성과 욕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묘하게도 임지현 씨를 주축으로 한 ‘대중독재’팀의 논리를 상당히 연상시킵니다. 물론 국가 동원과 새마을운동에 참여한 대중의 자발은 이질적인 조합이라고 조건을 다시긴 했지만, ‘대중독재’팀의 연구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요?
김영미 | 비슷한 입장이라고 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악한 독재자가 착한 민중을 자신들의 이익에 동원의 기재로 사용하고 있다고 보아 왔지만, 민중은 착한 바보가 아니죠. 민중은 항상 착한 피해자이고 당하는 존재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나 자신이 그런가? 내 부모가 그런가?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들이 학력이 낮다고 해서 자신의 이해를 지켜나가는 데까지 나약한 존재는 아닙니다. 일제시기 농촌진흥운동을 봐도 민중들은 빵을 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대단히 영악하죠. 독재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고, 대중과 어떤 거래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어떻게 동원되고 있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에 주목해야 된다는 것이 ‘대중독재’론입니다. 권위적 지배 체재였던 이승만·박정희 체제에 대한 너무 쉬운 이분법을 사용해왔던 거죠. 단 ‘대중독재’팀은 서양사 분석하시는 분들이 중심이기 때문에 한국사 분석에는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정일 | 그렇다면 그 입장과 선생님의 입장은 큰 차이가 없다고 봐야겠네요.
김영미 | 네, 저는 비슷한 입장이라고 보시면 돼요. 대중독재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쇼킹할지 모르지만 역사학계에서 그런 이분법적 해석을 넘어서야 한다는 얘기는 90년대부터 이미 많이 나왔습니다. 윤해동 선생님의 『식민지 회색지대』(역사비평사, 2003) 같은 책도, 식민시대가 민족과 반민족, 친일과 독립운동으로 양자화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제 사람들의 삶은 동원되(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하는 중간지대에서 자신의 생존권을 옹호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동원과 저항 사이를 오간 행위들도 봐야 한다고 말하죠.
이문재 | 학계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역사학계에서는 특정 사회나 시기를 바라보는 일정한 구도나 틀이 있잖아요? 그러나 말씀하셨듯이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죠. 기존의 역사학적 인간 이해와 달리, 인간이나 사회는 선과 악이 버무려져 있는 매우 복합적 것이 바로 문학의 접근법입니다. 역사소설에 그려져 있는 사람들이 배신도 하고 모함도 하는 게 그런 거잖아요? 역사학계에서는 왜 이제야 인간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지 아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합니다. 논지에 좀 어긋나는 질문이지만, 학계에서도 인간과 사회를 좀 더 총체적으로 보려고 하는 노력이 있어야 역사의 대중화, 대중의 역사화가 제대로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영미 | 굉장히 중요한 말씀인데요. 그래서 새로운 역사학에서는 히스토리history는 곧 스토리story에서 왔다고 합니다. 역사라는 것은 원래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인데 근대 역사로 오면서 과학이 되고 이론이 되고 구조가 되면서 오히려 그 속에서 인간이 배제되었습니다. 그런 근대 역사학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던 역사학, 새로운 역사학의 주체로서 인간을 복원시키는 역사학이 ‘인간이란 단순히 저항하고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이 다 복합적으로 내재화되어 있는 존재’로서 그리려고 하니까, 문학과 상당히 근접해진 셈이죠.
장정일 | 『그들의 새마을운동』은 박정희의 교시와 독려에 의한 새마을운동이 있기 이전에 ‘새마을’이 있었고, 자율적인 농촌운동가들 즉 ‘새마을운동 이전에 새마을운동가들이 있었다’는 주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증 연구로서 이천시 부발읍의 아미리마을과 이천에서 활동한 이재영 씨를 사례로 들고 있습니다. 아직 이 책을 읽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부연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김영미 | 새마을운동은 지금껏 박정희와 국가의 새마을운동으로만 역사적으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기획되기 이전에도, 국가의 농촌근대화운동이란 것은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는 것을 먼저 지적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50년대만 해도 절대다수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농촌의 근대적 변화는 어느 정권에서나 대단히 중요한 거였습니다. 실제로 이승만 시기에 있었던 농지개혁 역시 ‘지주-소작’ 관계라는 구체제를 청산함으로써 커다란 농촌의 변화를 이끌어 낸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승만 시대에는 농촌을 개발하기 위해서 모범적인 지역사회를 조성하고 농촌 엘리트들을 양성하기 위한 ‘지역 개발 사업’도 있었습니다. 쿠데타 이후에 잠시 중단됐지만, 박정희 정권 역시 60년대에 농촌 갱생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도시 개발에 집중하느라 농촌에는 예산을 쓰지 않아 실패했죠. 이처럼 일제시기에 있었던 농촌진흥운동에 이어서 해방 후에도 정부 주도의 농촌근대화 운동은 계속 있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장정일 | 박정희로서는 농촌근대화 운동을 꼭 성공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들이 많았죠.
김영미 | 그렇죠. 60년대 도농격차가 너무 심하게 벌어졌기 때문에, 도시만큼 농촌도 근대화되어야 했습니다. 또 농촌은 박정희의 정치적 지지기반이니까 민심을 수습해야 했죠. 유신에 대한 안정적인 지지기반 창출하기 위해서라도 새마을운동을 성공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한된 예산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쓸 것이냐, 그 부분에서 박정희의 탁월한 선택이 잘하는 마을을 지원하겠다는 거였습니다.
장정일 | 도농 간의 격차를 해소하긴 해야 하는데 예산은 없고, 이때 자생적으로 새마을운동을 벌이고 있던 청도의 한 마을에 대한 보고를 받고 그곳을 시찰한 것이 “박정희 정부로서는 서광”을 본 것과 같았다는 말이 이 책 367쪽에 나와 있죠. 그런데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새마을 이전의 새마을’과 정부에 의해 새마을 지도자로 표창된 ‘새마을 지도자 이전의 새마을 지도자’의 기원을 쫓아가 보니, 일제시기의 농촌진흥 운동에 그 뿌리가 있더라는 거죠.
김영미 | 일제시기에 이루어졌던 농촌진흥운동과 박정희의 새마을은 굉장히 유사합니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식민지시기에 했던 거죠.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자조’를 강조하면서도 ‘위로부터의 동원’과 ‘강제’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은, 식민지 시기의 농촌 운동에 대한 자기반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시기에 일제에 의해 이루어졌던 권위적 농촌 근대화에 동원되었던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헌신성도 있겠고, 식민지 재배세력에 대한 지지 협력도 있겠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해방 이후에 정확한 비판이 없었습니다. 비판을 할 수 없는 분위기였죠. 극단적으로 엘리트에 있어서의 친일파 처벌이 보류되었을뿐더러, 사회적으로 식민지 체제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반성할 시간이 없이 반공 사회를 만들어갔던 탓입니다. 때문에 오히려 반공을 위해서 식민지 체제는 끌어안아야 되는 자산으로 둔갑됐죠. 그래서 식민지 시기의 농촌운동이었지만 농촌진흥운동은 훌륭한 운동이었고, 마찬가지로 박정희 시기의 새마을운동도 훌륭하다고 다 같이 긍정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가지게 된 거죠.
장정일 | 이 책을 읽고 모순된 감정을 느꼈었는데, 마침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책은 박정희 비판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근대 국가라면 누구나 하는 국민 동원을 박정희도 똑같이 한 거니까.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박정희 비판서로 보입니다. 그래서 느끼게 되는 모순된 감정이란, 이 책이 박정희를 비판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반대급부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 다시 말해 농촌진흥운동은 수긍하게 되는 듯한 모순을 느꼈는데,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은 수긍될 게 아니라 반성되어야 하는 거였군요. 문재 선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문재 | 박정희가 농촌을 근대화시키고 국민을 동원시킨 구조가 일제 때와 똑같았다고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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