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크 미술(Nok Art)
나이지리아에 있는 노크 마을의 주석 탄광에서 테라코타 두상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던 것이 1943년의 일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 테라코타 두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후로 나이지리아의 곳곳에서 이와 유사한 양식의 도자기 파편들이 발견되면서 이것이 블랙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흔적임을 알게 되었고, 테라코타 두상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던 마을의 이름을 따 노크 문화(Nok Culture)로 명명되었다.
노크 문화는 기원전 5세기 이전에 형성되어, 기원후 약 200년경에 이르러 그 종적을 감추기까지 서부 아프리카의 중심문화였다. 노크 문화가 사하라 이남 블랙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임이 알려지면서 유물들이 무분별하게 파헤쳐져 노크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고고학적인 연구에 한계가 있긴 하지만, 노크 문화가 계속해서 서아프리카의 예술전통에 영향을 미쳐왔다는 견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부분 두상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 유물들은 구운 점토로 만들어진 것들이었으며, 예전에는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침식에 의해 파괴되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노크 테라코타는 그 크기가 10cm 내외의 작은 것에서부터 120cm가 넘는, 당시로써는 대형이라고 할 만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크기가 매우 다양하며, 크기가 실물로 제작되어 있는 것들은 개개인이 숭배하는 대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테라코타 상들은 대체적으로 일정한 양식적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수족과 몸통은 원통형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처리되어 있고, 입술과 귀, 코, 그리고 눈의 동공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으며, 눈은 하나같이 반달 모양으로 처리되어 있다는 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노크 테라코타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은 정성이 깃든 섬세한 헤어스타일과 조각들에 장식되어 있는 장신구들인데, 조형 디자인의 다양성과 창의성이 가장 빛나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노크 인들이 장식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거나 건강과 아름다움 같은 이상적인 주제에 몰두해 있었다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오랜 풍화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역력한 질병의 흔적을 담고 있는 것들 또한 눈에 띄는데,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일반적인 아프리카 미술의 특징이 그렇듯, 병에 걸린 형상은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노크의 인물상들이 양식화된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는 반면, 동물상들은 매우 사실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왜 동일한 시대와 공간 속에서 대상이 인물이냐 동물이냐에 따라 다른 기법이 사용되었던 것일까? 여기에는 아프리카 미술에서 종종 발견되는 또 하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만약 사실적으로 묘사된 인물상이 어떤 개인과 닮았다고 판단될 경우 마법을 부렸다고 문책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부족들은 아예 사람의 얼굴을 조각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양식화된 노크의 테라코타 인물상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동물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충분히 사실적인 표현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자신들의 숨은 실력을 굳이 감출 이유가 없다.
테라코타 조각상을 제작하는 것은 물론 나무를 다룰 때와는 매우 다른 기술을 필요로 한다. 일반적으로 나무 조각은 조금씩 조각들을 떼어내면서 형태를 완성해가는 제거기술을 요하지만, 테라코타는 조금씩 조각을 덧붙여가면서 형태를 완성해가는 첨가기술을 요한다. 그러나 노크의 테라코타는 많은 부분에서 나무 조각처럼 부피를 줄여가는 제거기술이 쓰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접근에 대해, 아직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나무 조각전통의 영향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베냉왕국의 미술
베냉(Benin)은 현재 나이지리아의 남부 지방에서 천 년 이상 세력을 장악해온 강력한 왕국이었다. 베냉의 역사에 의하면 기원후 900년에 세워졌던 오기소(Ogiso, 하늘의 지배자) 왕조에 이어 13세기경 이페(Ife) 왕의 아들인 오란미얀(Oranmiyan) 왕자에 의해 두 번째 왕조가 세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왕국은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예술 또한 활달하고 역동적인 왕국의 역사와 맞물려 크게 번성하였다. 오랫동안 베냉 황동 주조술의 기술적 완성도와 청동상에 나타나는 에너지는 유럽인들에게 대단한 찬탄의 대상이 되었다.
베냉의 미술이 밖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280년대였으나, 서구 미술계에 큰 충격을 던져주며 아프리카 미술의 실체를 알리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1897년 영국 해군은 베냉에서 징계조사를 벌이며 배상금 조로 베냉의 뛰어난 황동주조 미술품들과 상아조각 등을 모조리 쓸어갔는데, 이로 인해 아프리카 미술의 우수성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유럽의 탐험대들은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가 각 지역의 미술품들을 수집하는데 열을 올렸고 유럽사회에 아프리카 미술이 범람하게 되었다. 당시에 흘러들어온 많은 작품들이 대부분 박물관 등에서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으나, 상인들이 작품을 거래할 때 공급지를 비밀에 부쳤던 관행으로 말미암아 그 작품이 언제 어느 곳에서 수집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1897년 영국인들이 베냉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엄청난 양의 황동주조 작품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작품에서 보이는 기술적 정교함과 극도의 자연주의는 아프리카에 대한 19세기 서양의 일반적인 통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원시적 야만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는 베냉에 대한 문화적 편견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영국인들은 애써 당혹감을 감추며 그 작품들이 아마도 먼저 이 지역에 발을 들여놓았던 포르투갈인이나 고대 이집트인, 어쩌면 이미 사라진 이스라엘의 어떤 부족이 만들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설득력을 얻지 못했으며 그리 오래가지도 못했다.
베냉의 주조물들은 청동주조(Benin bronzes)로 표기하고 있으나 사실 대부분의 작품들은 황동주조물들이다. 베냉 인들이 황동에 집착했던 이유는 황동의 표면에 어리는 붉은 광택과 빛이 악한 세력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황동주조물들과 더불어 베냉 미술의 우수성을 보여준 것이 16세기 초에 상아로 제작된 가면이다. 이 상아 가면은 아프리카 미술의 위대함을 대변하는 대표적 모델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인용된 상아 가면은 베냉의 내란을 잠재우는데 큰 공헌을 했던 에시기에 왕의 어머니인 이디아를 상징하며, 이디아의 추도식 때 에시기에 왕이 어머니의 넋을 기리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 가면은 형태상 아주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는데, 머리 위 왕관을 표시하는 부분에 포르투갈인들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는 것이다. 베냉의 역사에 의하면 북쪽의 이갈라(Igala) 족들이 쳐들어와 왕국이 위험에 처해있을 때, 에시기에 왕이 포르투갈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물리치고 왕국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한다. 왕관 부분에 새겨져 있는 포르투갈인들은 말하자면 그 역사적 사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상아 가면 가운데 어떤 것들은 왕관 부분에 포르투갈인들 대신 폐어(肺魚)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들도 있는데, 포르투갈인들이 땅과 바다를 자유자재로 다니는 것을 물에서 헤엄치기도 하고 땅에서 움직이기도 하는 폐어의 특별한 능력에 비유한 것이다. 베냉의 미술에서 폐어는 초자연적인 힘이나 신비한 능력을 상징한다. 폐어는 건기가 시작되면 뻘 속을 파고들어 가 길고 긴 하면(夏眠)에 들어가는데, 이 기간 동안 심장의 박동이 완전히 멈추어버렸다가 다시 우기가 시작되면 꿈틀거리며 부활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