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동에서 처음 들었던 소문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다. 내가 돌아다니는 판이라고 해보아야 좁고 좁은 문단,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녀의 이름이 그 좁은 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호프집 닭과 함께일 때도 있었고, 과메기 먹는 술집에서 과메기와 함께 입속으로 넘어갈 때도 있었다. 사람들의 말, 공통된 소문은 그녀가 글을 아주 잘 쓰는 아나운서라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아나운서가 말만 잘하면 됐지, 글을 써서 뭐 한담’ 비아냥대며 마치 연예인이 아이들 우려 책 팔아먹는 사람 취급하며 입을 비죽거렸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녀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유명한 아나운서라고 했지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얼굴도 아니었다. TV를 건성으로 보는 습관(‘2NE1’이나 ‘티아라’ ‘애프터스쿨’이라면 말이 다르겠지만)이 몸에 밴 이유이기도 했지만, 사람 기억하는 데 있어 천성적인 게으름이 아마도 가장 큰 탓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연히 자주 가는 부암동 닭집에서 마주친 적이 있긴 했었다. 그때 가벼운 인사를 나눴던 것도 같고. 일행 중 하나가 저들 중 한 사람이 아나운서 유정아라 알려주어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으나 나는 닭다리를 뜯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전히 소문은 그 자리에서도 살아나 그녀가 냈던 클래식 음악 관련 책이 화제로 올랐었다. 아주 재미있고 글솜씨가 좋다 하여 닭다리를 씹으며 속으로 ‘그럼 나도 한번 읽어봐야겠군’ 했던 것이 그녀에 대한 관심의 전부였다. 글쟁이에게 글솜씨 좋다 함만큼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일이 더 있겠는가. 그러나 그때뿐, 나는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다시 보게 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몇 달 후 한 케이블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적어도 내 딴에는 처음이라는 얘기.
아! 그 목소리
후에 놀랍게도 그녀를 기억해낸 것은 그녀의 낮은 음성을 듣고서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친숙하고 낯익어서 아주 오래전에 알고 있던 사람처럼 느껴진 것이었다. 그녀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긴장을 풀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동안이나 일정한 시간에 뉴스 진행을 했다 하니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린 시절 숙제를 했을 것이고, 밥을 먹기도 했을 것이며, TV 앞에 누워 졸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 본 적 있지요?” 나는 만나자마자 인사랄 것도 없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그렇지요? 부암동에서 봤었지요. 아무개, 아무개 선생과 같이 있었지요? 아마.” 그녀는 정확히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닭집에서의 스침을 말이다. 인사를 나눈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같이 있던 내 일행 모두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이런 일이. 나는 짐짓 당황했다. 아는 체는 종종 친근감을 드러내기 위해 에둘러 써먹는 방법 중 하나였는데, 그녀의 또렷한 기억력 앞에서 나는 조금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사람에 대한 관심과 기억력은 친숙함과 친근함을 더하는 매력이 있었다.
나와는 다른 말법
아무리 방송 녹화였지만 소설에 대한 이해와 관심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예전에 아르바이트로 아나운서들을 인터뷰해서 잡지에 기사를 쓴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녀들에게 받았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무사히 녹화가 끝나고 나는 서둘러 도망치듯 방송국을 빠져나왔다. 이상하게도 뭔가를 들킨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언제 날 잡아서 저녁이라도 먹어야지요.” 나는 으레 주고받는 빈말 인사라 생각하고 받아넘겼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난 후, 그녀에게서 정말로 전화가 왔다. “우리, 했던 약속 지켜야지요.” 같이 방송에 나갔던 다른 소설가, 나도 알고, 그녀도 잘 아는 평론하는 선생 등이 멤버로 꾸려져 만날 약속을 잡게 되었다. 그녀는 말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간과했었다. 나와는 다른 말법의 사용자.
그러나 이러저러한 핑계로 나는 공수표를 날린 자가 되었고, 시간이 흘러 어느 술자리에서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문단 술자리였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 옹색한 변명과 떳떳하지 못함으로 나는 가벼운 목례만을 한 채 슬슬 그녀를 피해 다녔다. “우린 오늘도 별 얘기를 나누지 못했네요.” 자리가 돌고 돌아 옆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 그녀가 말했다. “그러게요.” 순간 나는 그녀가 새침데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심히 힐끔거려보니(낯선 사람을 대하는 문인의 표본)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문단 술자리에서의 그녀 모습이 굉장히 친근해보였다. 까칠하고 까다로운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잘 웃고, 신기해하는(아나운서를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몇몇에게는 얘기도 잘 받아주고,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그러다 취하는 게 아닌가. 엉망으로 취했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말이 맞겠다.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인데 아나운서가 가진 이미지에 대한 선입견이 오히려 그녀를 더욱 소탈하게 보이게 했다. 그러나 그날도 내가 먼저 자리를 떴으니 우리는 다시 만나야 했다.
엄친딸
그로부터 얼마 후 좋은 기회가 왔다. 그녀에 대한 인상기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것이다. 흔쾌히 수락했다. 인터뷰를 핑계 삼아 여의도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단둘이 마주 앉아 나는 형식적인 질문들을 이어나갔다. 나누는 얘기들로 무엇을 쓸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냥 술이나 마실 것을 하고 후회하면서.
“초등학교 들어가서는 되게 얄미운 애였던 거 같아요. 남들이 저를 어떻게 얄미워했다는 건 생각이 안 나는데, 예방 주사 같은 거 맞거나 그럴 때 저는 무서워서 안 맞고 선생님한테 얘 안 맞았어요, 얘도요 하고 이르는 애 있잖아요. 나중에 선생님이 넌 맞았니? 그러면 아니요, 당돌하게 말하는 아이요. 그건 아주 어렸을 때고,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말이 없는 아이였어요. 말이 없던 제가 말로 먹고사는 직업을 가질 줄은 몰랐어요.”
우리가 풀어낸 첫말은 어릴 적 이야기였다. 무엇인가에 근원을 두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게 상처이건, 위안 또는 자랑스러움이건 그 근거가 현재를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그러한 근거가 되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굉장히 딸을 가혹하게 키웠어요. 칭찬에 인색했지요. 사춘기 때는 어머니에 대한 사소한 반항들로 점철되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나를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리는 식이었죠. 무엇인가를 설명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생각되던 때니까. 어쩜 그게 저를 단단하게 만든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무조건 잘해야 했거든요.” 이러한 근거가 그녀를 좋은 대학에 가게 했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민주화 열망으로 가득했던 시절, 대학을 다녔다. 으레 당시의 평범한 학생들과 다를 바(그녀는 사회학과를 나왔으니) 없을 거란 생각에 무심코 대학 시절을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저는 무엇에건 몰두는 하지만 광은 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연애 말고는 모든 것이 그랬던 것 같아요. 당시 저 하나만 강남 아이였어요. 시대적 현실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고, 왜 그래야만 하는지도 잘 몰랐어요. 조금은 철없는 여학생이었지요.” 그녀의 쑥스러워하는 웃음 속에서 소녀 시절의 앳된 표정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말하기? 글쓰기!
“저는 말하는 것보다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대뜸 그녀가 말했다. 여전히 말하는 것보다는 글을 쓰는 것을 즐긴다고도 말했다. 말은 직업이고 글은 열망이라고도 말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왜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지를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탓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말을 바르게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재미있게 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최근 두 번째 책을 냈고,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었다. 클래식 음악 관련 책에 이어 『유정아의 서울대 말하기 강의』가 그것이다. 부재로 붙은 ‘소통의 기술, 세상을 향해 나를 여는 방법’이라는 말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책을 열어보기 전 짐작은 ‘말하는 기술’ 같은 스피치에 관련된 책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짐작과는 달리 말하는 법 혹은 기술보다는 무엇보다 ‘소통’하기 위한 체계,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기 위한 가장 좋은 환경과 열정을 작가의 의지로 담아놓은 책이었다. 무엇보다 딱딱할 것만 같음에도 그녀의 유려한 글솜씨는 뛰어난 가독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재미없을 것 같은 책인데 굉장히 재미있게 잘 읽힌다는 얘기다.
“글쓰기와 말하기가 다르지 않아요. 로마 시대에 있었던 소년들에 대한 교육에서 알 수 있는데, 수사학이라든지 웅변술 같은 거요, 결국은 그게 표현이잖아요. 글로 표현하느냐 말로 표현하느냐. 처음에는 남의 글을 낭송하다가, 몇 가지 단계를 거쳐 요새 필사하는 것처럼 그걸 똑같이 쓰기도 했다가, 자기의 말로 바꿔 쓰기도 했다가, 그 다음에는 장르를 바꾸기도 해요. 그리고 나중에 그것을 낭독하는 거예요. 결국은 자기가 자기의 말로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말하기를 전제로 한 글쓰기를 하는 것이고, 그게 인문학 교육의 기본이 되는 거지요. 정말 기본인데 이런 말하기에 대한 책이 없어서 자신감을 갖고 출발했어요.”
그녀가 안다. 글이 결국 사람이라는 거. 산문의 수준이 현저하게 위축되어 그 역할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이 시대에 좋은 산문쟁이 하나를 얻은 기분이다. 더군다나 나는 그녀가 말솜씨보다 글솜씨가 월등히 좋다고 단정해버리는 축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이는 그녀의 아나운서로서의 능력을 무시하게 되는 것인가. 그러나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말을 할 때엔 간혹 더듬기도 했지만(물론 TV에서의 모습이 아니라) 몇 번이고 정제되어 나온 그녀의 글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낮은 목소리 누님
저녁을 곁들인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많은 사람이 오고 갔지만, 그날은 그녀도 나도 끝까지 자리를 함께했다. 그녀는 여전히 맑은 눈을 말똥거렸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초저녁에 이미 취해서 횡설수설 인터뷰고 뭐고 모든 것을 망각 너머로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무슨 말을 했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가물가물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는 또렷했다. 내가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기로 한 그 약속!
안부를 물은 지도 오래된 듯해 그녀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그치 않아도 누나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네~.’ 평소 존경하는 가야금 선생의 공연 초대와 함께 전해진 누이로서의 살가움, 우리는 이제 정말 친해진 건가. 아무래도 한번은 더 만나봐야 알 것 같다. 나, 그녀와는 다른 친교법親交法의 소유자니까. (*)
유정아ㅣ1989년 KBS 아나운서로 입사해 <열림 음악회>, <클래식 사전> 등의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한낮의 음악실>, <저녁의 클래식> 등 FM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1997년 퇴사 후 프리랜서 방송인으로 다수의 토론 및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신문, 잡지에 다양한 주제의 글을 기고해왔다. 현재 중앙대 겸임교수이며, 2004년 서울대에서 말하기 강의가 개설된 이래 5년째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KBS 한민족 채널 <출발 동서남북>, KTV <북카페>, 예술의전당의 <11시 음악회>를 진행하고 있다. 클래식 에세이 『마주침』, 『유정아의 서울대 말하기 강의』를 펴냈다.
백가흠ㅣ소설가. ‘나비’ 편집위원.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광어」로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우리 시대의 극단적인 정신세계와 불편한 현실을 아이러니와 판타지로 녹여내는 개성적인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소설집으로 『귀뚜라미가 온다』, 『조대리의 트렁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