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 수수께끼 같은 친구여, 말해 보아라, 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 아버지? 어머니? 누이나 형제?
- 나에겐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형제도 없소.
- 친구들은?
- 당신은 오늘날까지 내가 그 의미조차 모르는 말을 하고 있구려.
- 조국은?
- 그게 어느 위도 아래 위치하는지도 모르오.
- 미인은?
- 불멸의 여신이라면 기꺼이 사랑하겠소만.
- 돈은 어떤가?
- 당신이 신을 싫어하듯, 나는 그것을 싫어하오.
- 그렇군!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느냐, 불가사의의 이방인이여?
- 나는 구름을 사랑하오… 흘러가는 구름을… 저기… 저기… 저 찬란한 구름을!
『파리의 우울』에서 전재.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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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이 세상 밖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이지혜
모의고사가 끝난 날이었다.
재수학원을 나와서 종로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군중 속에 뒤섞여 한 여름의 종로를 걸으면서, 외로웠고, 좀 울적했고, 더웠고, 낯설었다.
광화문을 지나고 경복궁을 지나서 안국동에 있는 정독도서관까지 걸어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도서관에 가면, 어떤 책들이 강렬하게 나에게 텔레파시를 보낸다.
“당신에게 나를 읽히고 싶어요.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이 내 몸을 열고, 당신의 뜨거운 시선이 나를 한줄한줄 정성껏 훑어주기를! 나를 사랑해주기를!” 하고.
나도 모르게 끌려간다.
내가 책을 선택하는 걸까? 아니면 책이 나를 선택하는 걸까?
아니면, 서로에게 끌리는 것일까?
그날, 내게 텔레파시를 보내온 책이 바로 보들레르의 시집이었다.
그리고 ‘이방인’을 읽는 순간, 뭐랄까, 내가 휘발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의 외로움과 나의 욕망들이 모두 휘발되어 구름이 되어 흘러가는 듯한 느낌.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모나미 볼펜으로 시를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 후로,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로 달아나고 싶을 때마다 노트를 꺼내 정독도서관에서 베껴 적은 시, ‘이방인’을 읽곤 했다.
수학시간에, 영어시간에, 국어시간에, 야자시간에… 나의 열아홉 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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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1821-1867)
명문 중학교에 기숙생으로 다니던 중 품행 문제로 퇴학을 당했고, 파리 법과 대학에 다니며 문학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술, 마약, 여자에 탐닉하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성년이 된 후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댄디 생활을 즐기다가 엄청난 빚더미에 앉아 결국 금치산 선고를 받았다. 1845년에 미술 비평 『1845년 미술전』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문학 비평, 에세이 등을 발표했다. 1857년 시집 『악의 꽃』을 출간했으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벌금과 시 6편 삭제라는 판결을 받았다. 『악의 꽃』과 함께 그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보여주는 소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은 도시의 서글픈 삶에서 발견한 우울의 상징을 날카롭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가 추구하는 미학의 훌륭한 본보기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중편 소설 『라 팡파를로』, 에세이 『내면 일기』, 『인공 낙원』 등이 있으며,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번역하여 프랑스에 소개한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1866년부터 실어증과 마비 증세를 보이다가 1867년 8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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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윤영애
전 대학교수. 상명대학교 불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후 퇴임했다. 지은 책으로는 『파리의 시인 보들레르』, 『지상의 낯선 자 보들레르』 등이, 옮긴 책으로는 『악의 꽃』, 『화가와 시인』, 『시와 깊이』, 『보헤미아의 작은 성들』 등이 있으며, 보들레르에 관한 여러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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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지혜
십 년간 사랑했던 애인에게 차이고 나서, 반년 정도 폐인모드로 지냈는데, 만약 술 담배를 할 줄 안다거나 남자를 밝혔다면 아마 그쪽으로 중독됐었을 텐데, 다행히(?) 책에 중독되어 폐인기를 집 근처 도서관에서 보냈었다. 그 시기에 나에게 강력하게 텔레파시를 보낸 책들이 바로 심리학 서적들이었고, 그 뒤로 아예 진로와 전공을 바꿔서, 지금은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가끔,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흘러왔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구름에 내 마음을 실을 뿐. 저 찬란한 구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