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고은
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 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다
그리하여
길을 만들며 간다
길이 있다
길이 있다
수많은 내일이
완벽하게 오고 있는 길이 있다
『내일의 노래』에서 전재. (고은, 창비,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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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이의 한마디]
새벽에 눈이 떠졌다
이은혜 (영신고 교사)
거실에 나가 창밖을 보니, 엉켜있는 도로위에 심각한 표정으로 차들이 서 있다. 서 있다기 보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쏟아질 준비를 하고 있다. 다들 급하게 가야할 곳이 있나보다. 방안으로 들어가, 컴퓨터 바탕화면에 떠 있는 구글 어스 아이콘를 눌러본다. 세계 곳곳 내가 원하는 곳을 치면, 기다렸다는 듯, 엔터와 함께 빠르게 화면이 전환된다. 너무 빠른 속도에 머리가 어지럽다. 소주 몇 병을 마시고, 일어날 때보다 더 어지럽다. 현실과 달라도 너무 달라 그런걸까.
나는 목적지를 향해 뛰다시피 걷고 있다. 그런데, 가는 길마다 어둡고, 가는 길마다 높은 벽이 있다. 이제… 걷는 속도가 느려져 터벅터벅 걷기 시작한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까지 제대로된 길이 있을까 의심스러워진다. 이 때, 고은선생님의 "길"이란 녀석이 다가와 속삭인다.
"길이 있어야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건 아니잖아." "벽이 있다고 그냥 뒤돌아 가야만 하는것도 아니고 말이야!"
"길"이란 녀석은 오늘도 내 어깨를 치대며 조용히 말을 건다. 길이 없는 것이 어쩌면 희망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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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고 은
시인. 1952년 20세의 나이로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법명은 일초(一超)로 효봉선사의 상좌가 된 이래 10년간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며 시작 활동을 하다가 1958년 『현대문학』에 시「봄밤의 말씀」「눈길」「천은사운」등을 추천받아 등단하였다. 1960년 첫 시집『피안감성』을 간행하였으며 1962년 환속하여 시인으로, 어두운 독재시대에 맞서는 재야운동가로서의 험난한 길을 걷기도 하였다. 1984년 『고은시전집』을 냈고 1986년『만인보』간행을 시작하였다. 전세계 10여개 언어로 50여권의 시집, 시선집이 간행되었으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 시 아카데미 회원 한국대표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백두산』, 『머나먼 길』, 『허공』, 『개념의 숲』, 『오십년의 사춘기』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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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은혜
"나는 남편이 "나도 영신고 학생 할래!"라고 말할 정도로 아이들을 귀찮게 하는 3년 차 신규(?)교사(서울 영신고 사서교사)다." 학교 밖에서는 (한국학교도서관협의회 사무처장과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 모임의 연수국장) 머리 써야 하는 직책을 맡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하는 단순 잡일이 적성인 사람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방과 후에 도서관 마니아들(학생)과 2~3시간씩 독서 수다 떠는 것을 낙으로 삼는 아낙네이면서 학교도서관을 학생들의 "꿈꾸는 방"으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방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