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 블랙홀
안현미
칼 쎄이건의 저서 [코스모스]를 참조하자면 약 150 억년의 나이를 가진 우주의 역사를 달력의 1년으로 줄인다면 지구의 탄생은 9월 중순 어느날 일어난 사건이며 그후 10일쯤 지나 최초의 생물이 싹트며 인간의 조상이 불을 사용하게 된 것은 12월 마지막 날의 마지막 15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으며 지나가는 시간을 잠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잠시 사는 것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으며 지나가는 시간을 잠시 씹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잠시 사는 것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삶을 인용해서 살고 있는 것만 같은
불혹, 블랙홀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꼭꼭 씹어 먹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는 일만으로도
나는 잠시 너를 사랑하는 것
* 어디선가 읽고 메모해두었지만 어디서 읽은 건지는 잊었다. 잊어먹는 동안도 나는 살고 있었던 것이고 곤드레나물밥은, 시간은, 가끔 맛있었다.
-----------------------------------
작가 소개
안현미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넌 사막에서도 살아 돌아올 여자’ 라고. 또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넌 입 닥치면 신비로와!” 그러나 또 누군가는 내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하다 한다. 그러니까 나에 대한 소개라는 게 당최 가당키나 한 것인가 싶다. 그럼에도 나는 기적처럼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첫 번째 시집 『곰곰』에는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시절들에 대한 아주 사적이지만 시적인 시들을 묶었고 두 번째 시집 『이별의 재구성』에는 사랑했으나 결국에는 이별해야 했던 시간들과 그 시간들과 함께 사라져간 당신들에 대한 기억을 기록했다. 세 번째는?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첫 번째 보다는 두 번째 시집이 좋다 하고, 누군가는 첫 번째 시집이 더 좋다 한다. 그들 모두에게 세 번째 시집이 더 좋을 거라고 허풍 떨고 싶지만 나는 겨우, 쓸 뿐이다. 매일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