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13.
1986년, 할리우드가 만든 반공․반소 선전물 하나가 우리나라에 개봉됐다.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백야White Nights>(1985). 이념 선전이 낯간지럽긴 하지만 줄거리나 볼거리가 다 괜찮았던 그 시대의 수작으로, 서울에서만 36만의 관객이 보았다. 이 영화는 많은 화제를 낳았는데, 라이오넬 리치가 부른 <세이 유 세이 미Say You Say Me>가 1986년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은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라이오넬 리치의 노래가 명곡임은 분명하지만, 많은 관객의 인상에 박힌 노래는 따로 있었다.
영화 주제곡은 영화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 주면서, 줄거리의 중심을 잡아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단연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키로프 극장에서 이사벨라 로셀리니 앞에서 춤을 출 때 흘러나왔던 노래야말로, 이 영화의 주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가슴을 쥐어뜯는 그 장면은 사랑했던 두 연인의 과거를 압축해주면서,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마음을 바꾸어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탈출을 돕는 전환점이 된다. 이때 흘러나온 음악이 <뒤로 가는 말Fastidious Steeds>이다.
*블라디미르 비소츠키(Vladimir Semyonovich Vysotsky,
러시아어: Владимир Семёнович Высоцкий, 1938년 1월 25일 ~ 1980년 7월 24일)
우리가 생전 처음 경험하는 무거운 탁성濁聲을 들려준 그 가수는 <백야>의 삽입곡으로 간신히 우리에게 알려졌지만, 그는 오랫동안 구소련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인기 가수였다. 장 마크 마리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성림, 1990)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한 평전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는 1938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던 해는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분수령을 이루었던 해로 기록되지만, 육군 소위였다가 대령으로 제대하게 되는 아버지와 노조 중앙회에서 독일어 통역으로 근무했던 어머니는 아무 탈이 없었다. 훗날, 비소츠키의 어머니는 그가 최초로 내뱉은 말은 “달이 떴다!”였으며, 두 살 때부터 여러 편의 시를 감정 표현까지 곁들어가며 암송했다고 회상한다. 이런 것을 보면, 비소츠키의 유년은 1941년의 나치 침공과 종전 이후의 대기근에도 유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46년, 부모가 이혼하면서 비소츠키는 독일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가게 된다. 아버지는 거기서 재혼을 했는데, 이때 어린 비소츠키는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배웠다. 지은이는 부모의 이혼이 어린 비소츠키에게 끼쳤을 영향에 대해서는 크게 괘의치 않는데, 청소년기부터 싹이 튼 비소츠키의 반사회적 성향과 평생 끊지 못한 음주벽은 아마도 이때의 상처 탓이 아닌가 짐작된다.
1953년, 스탈린이 죽었다. 소련의 문화사가들은 스탈린이 죽기 몇 해 전부터 청소년들 세계에 ‘부랑아blatnoi' 집단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부랑아들은 학교를 대신해 ‘거리’를 택한 청소년들로, 이들은 “사회의 규칙과 법률을 따르기를 거부한 반항아이자 주변인들이었다. 경찰의 탄압 정책과 강제 수용소 체제의 산물인 이 부랑자들은 모두 법을 벗어난 사회의 주변인들이었고 우범자들이었고 깡패들이었고 절도범이었고 최하층민들이었고 쫓기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특히 노동자들에게 지나치게 잔인했던 스탈린 시대의 형법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집단 농장이나 공장의 규율을 지키지 못하거나 거기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면서 스스로 사회적 낙오자가 된 청년들이다. 소련 사회의 특권층 자제였던 비소츠키는 표면적으로는 학교의 모범생 노릇을 하면서, 거리의 부랑아들에게 매료되었다.
비소츠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 자격증을 받았지만, 대학보다 연극 학교에 들어가고자 했다. 부모의 반대에 부닥쳐 건축 기사 양성소에 입학했던 그는 1년 만에 중퇴하고 모스크바의 배우 학교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당시 유행하던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술을 연마하던 그는 4학년 때인 1960년, 푸시킨 극단의 여배우 이자와 첫 번째 결혼을 한다. 이때 그는 서정시와 대중음악을 결합해서 인기를 얻은 알렉산드로 갈리치를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고, 갈리치와 협업을 한 블라트 오쿠드쟈바를 본받아 기타를 배우게 된다. “시인이 부르는 노래”라고 불러야 할 이 독특한 장르는 비소츠키의 막대한 성공으로 러시아 대중음악을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는 특징이 되었다.
배우 학교를 졸업한 1961년, 비소츠키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이 해에 그는 타르코프스키의 첫 번째 영화인 <이반의 어린 시절>에 출연 제의를 받았고(어쩐 이유로 그 행운을 잡진 못했다), 자신의 첫 번째 노래인 <문신>을 작곡했다. 이 노래는 제목에서부터 부랑아의 세계가 반영되어 있는데, 레프 코차리안이라는 친구가 그 노래를 녹음한 것이 계기가 되어 비소츠키라는 위대한 대중 가수 겸 서정 시인이 탄생하게 된다.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녹음테이프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소련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방송과 음반 산업을 국가가 독점한 구소련에서 녹음기와 테이프의 역할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생전에 비소츠키는 700여 곡의 노래를 작곡했고, 그것들은 모두 대중이 자기 손에 들어온 녹음테이프를 직접 복사해서 전달하는 방식으로 알려졌다. 소련 정부는 한사코 자신들이 만든 ‘표준화’에 어긋나는 그의 노래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소련의 반체제 지식인들이 비소츠키를 좋아했던 것 같지도 않다. 까닭은 비소츠키가 소위 ‘체제 저항’을 목표로 하기보다, 소련 사회에서 밀려난 부랑자들의 은밀한 열망․근심․분노를 노래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때문에 1980년에 사망한 이후, 그는 그 어떤 반체제 인텔리보다 더 “참된 민중의 시인, 대중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비소츠키는 가수로 유명했지만, 자신은 가수보다 배우라는 직업을 더 좋아했다. 유명세를 떨치면 떨칠수록 옥죄는 검열 그리고 끊을 수 없었던 음주벽과 함께 연극에 대한 열정이 몰아세운 과로는, 마흔두 살 난 그에게 심장마비사를 안겼다. 그럼에도 그는 가수나 배우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시인으로 남기를 바랐다. 스위프트보다 낫고 불가코프나 고골보다 뛰어나다고 확신했던 그는 자신이 부른 노래에 대해 이렇게 자평했다. “많은 사람이 제가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기타 때문인 것 같아요. 하지만 저 자신은 그것들을 노래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기타를 동반한 시 낭송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기타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박자를 맞출 수 있는 악기라면 피아노든 무엇이든 별 상관이 없겠지요.” 비소츠키의 시집은 페레스트로이카 국면을 맞은 1987년부터 여섯 권이나 연속적으로 출간됐다. 이 책『블라디미르 비소츠키』에는 46편의 자작시(노래시)가 부록으로 실려 있으나, 좀 더 충실한 번역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