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
김나정의 『내 지하실의 애완동물』(문학과지성사, 2009)을 읽다. - 보통 창작집의 제목은 그 책에 묶인 작품 가운데 한 작품을 골라 표제로 삼는다. 그런데 아홉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는 『내 지하실의 애완동물』의 경우, 표제와 같은 제목의 작품이 없다. 작가가 낱개로 발표된 작품을 취합한 창작집에, 창작집에는 없는 별도의 제목을 내세우는 일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다. 하나는, 그간의 창작이 하나의 기획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을 넌지시 혹은 명료히 밝히기 위해서. 둘은, 별도의 제목을 통해 개별적으로 발표된 작품에 사후적인 전체성을 부여하거나 그러한 효과를 얻는 것.
모든 창작집이 그렇듯이, 여기 실린 아홉 편의 작품 역시 일정 기간 동안, 불시에 들어온 청탁에 충실히 응한 결과다. 하지만 작가는 앞서 제시했던 두 가지 의도 가운데, 첫 번째 사항을 의식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많은 작품이 ‘환대’라는 일관된 주제를 파고들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등단작인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에서 ‘소녀’는 여인숙 주인이 주워 온 아이고, 「이것은 개가 아니다」의 ‘개’ 또한 백수나 마찬가지인 형이 주워 온 개다. 괄호를 뜻하는 약물이 곧 제목인 「<< >>」에서는, 재개발 지역에 마지막까지 남은 구멍가게의 아들(‘괄호’)이 한겨울에 길거리에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여자’(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를 업고 와서 지하실에 눕혔고, 「주관식 생존문제」의 열한 살 난 ‘배철’은 두 번 파양 당하고, 세 번째 입양 부모를 만난다.
위에 열거된 소녀·개·여자·배철은 차례대로, 여인숙 주인의 성 노리개이자 무급 사환으로 착취당하고, 또다시 길거리에 버려지고, 강간을 당하고 살해되며, 세 번째 입양 부모로부터 파양 당한다. 까닭은 이들이 방문객이 아닌, ‘낯선 이(타자)’이기 때문이다. 방문객과 낯선 이를 구별하는 가장 큰 표식은 초대장의 유무다. 방문객은 초대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거주자의 환영을 받는다. 하지만 낯선 이가 가진 특징은 초대장이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낯선 이는 거주자로부터 오물이나 악마(범죄자)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말하자면 소녀·개·여자·배철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다. 나의 거주지를 침입한 그들은 나의 식량과 시간을 빼앗으며, 나의 정체성과 세계의 온전성에 균열을 낸다.
하지만, 이 낯선 이 또는 초대 받은 손님이야말로 그들을 맞이한 자들의 환대 능력을 시험하는 천사가 아닌가?: “낯선 자들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알지 못하는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브리서」 13:2) 낯선 이를 받아들이는 능력은, 나를 개방하는 것과 상관되고, 세계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수락하는 것과 상관된다. 낯선 이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무한이라는 초월적인 비밀의 한쪽 귀퉁이를 만나게 되고, 맛보게 되고, 품게 된다. 그것은 은총이다.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의 여인숙 주인, 「이것은 개가 아니다」의 형, 「<< >>」의 괄호, 「주관식 생존문제」의 세 번째 입양부모는, 낯선 이를 환대하는 법을 몰랐다. 그들은 낯선 이로 다가온 소녀·개·여자·배철을 ‘애완동물’로 여겼는데, 동물이란 ‘얼굴을 가진 존재’ 다시 말해 나와 대등한 타자가 아니다. 그들은 ‘애완’ 될 때, 겨우 환대를 받지만, 사전적으로 ‘동물이나 물품 따위를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거나 즐김’을 가리키는 애완愛玩이, 인간에게 향해질 때, 그것은 차가운 환대에 지나지 않는다. 「<< >>」에서 괄호는 길에서 업어온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를 그야말로 지하실에 감금하거니와, 꼭 지하실에 감금하지 않았더라도 소녀·개·배철은 모두 ‘내 지하실의 애완동물’이다. 바로 이런 뜻에서 『내 지하실의 애완동물』이란 제목은, 앞서 말했던 작가의 두 가지 의도를 잘 충족시키고 있다고 할 것이다.
환대라는 주제가 지방의 항구 도시나 서울의 재개발 지역보다 더 큰 공간으로 심화·확대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준 작품이 「하멜른」이다. 조그마한 시골 읍내(?)로 중국인 가족이 들어와 중국 식당(중국집)을 열지만, 읍내 사람들은 “쥐 고기를 다져 만두소를 채운다”는 소문으로 중국집을 문 닫게 하고, 어느 겨울에는 저수지의 살얼음이 깨어져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중국 아이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한다. 이 작품은, 환대라는 주제가 얼마나 오늘의 세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얼핏 보여준다. (왜 ‘얼핏’인가 하면, 중국인 가족의 일화는 작품의 첫머리에만 잠시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일화는, 이 작품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이다) 세계화와 다민족·다문화 시대에, 환대는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윤리의 시험장이다.
지구의 마지막 날을 그리고 있는 「너희들」, 현실의 고단함으로 인해 지구의 종말을 고대하게 된 「우리 동네 꽃도령」, ‘행운의 편지’를 패러디하여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저주하는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바둑이도?」, 어린 남동생이 유괴당하여 피살되자 모든 여자를 유괴범으로 의심하게 「구」는, 환대가 무너진 세계의 끔찍한 살의殺意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환대가 없는 세계는 차라리 어서 끝장나기를 바라야 하는 세계며, 그 세계에서는 모든 타인이 죽기를 고대하거나, 살인을 저지른 악인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