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
클래식 애호가들이 집안의 음반 수납장이나 음반점의 진열대에서 ‘뭐 좀 새로운 게 없을까’ 하면서 궁리하다가 번번이 뽑아드는 것이 바흐다. 모차르트도 이런 경우에 드는 작곡가이지만, 물리지 않기로는 바흐를 따라올 작곡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음악가의 평전이라면 모차르트가 인기인데 반해, 바흐의 평전을 읽었다는 사람들은 잘 없다. 까닭은 모차르트의 삶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형적인 예술가형인 반면, 그처럼 극적인 구석이 없었던 바흐 평전에서는 자칫 골치 아픈 음악 이론을 대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탓이 아닐까?
독자를 안심시키려는 듯, 혹은 떠보려는 듯, “일생동안 일어난 행운의 사건들과 지겨운 사건들을 열거하는 것이 연대기 기록자의 의무일까? 연대기 기록자는 우리를 ‘인간’ 바흐에게 좀 더 가까이 데려다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저 그의 ‘작품’에 대해서만 말하면 되는가?”라고 말하고 있는 마르틴 게크의 『J. S. 바흐』(한길사, 1997) 역시 이런 기우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 책은 여느 작곡가들의 평전에 비해, 바흐의 작품과 음악 이론에 많은 공을 들인다.
체코의 모라비아 지방에서 살던 바흐의 가계는 1545년 개신교 박해를 피해 독일의 베히마르에 정착했다. 그곳에 안착해서 빵 굽는 일을 했던 바흐의 조상은 부업 삼아 여기저기서 보조 연주자 노릇을 했는데, 대를 내려오면서 마침내 부업이 주업으로 바뀌었다. 바흐의 할아버지들은 모두 시의회 음악가와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으며, 바흐의 아버지와 숙부들 또한 궁정과 시의 음악가나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훗날 바흐는 무려 53명이나 되는 자기 집안의 음악가들에 대한 짤막한 전기인 『음악가 집안 바흐 일가의 기원』을 쓰기도 했다. 이런 가계가 말해주는 것은, 음악가로서의 요한 세바스찬 바흐를 이야기할 때, ‘음악성’이란 타고나는 것인가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집안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음악가들, 아니 음악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바흐의 예술적 천재성이 유전이나 환경 그 어느 한 쪽에만 치우쳐서는 충분히 답변이 되지 않는다.
바흐는 1685년 3월 21일, 아이제나흐의 궁정 트럼펫 연주자이자 시의 관현악단 지휘자인 암브로지우 바흐와 그곳의 모피 제조자의 딸인 엘리자베트 레머히르트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들은 대부분 유년기나 청소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으나, 살아남은 두 형은 당연히 음악가가 되었다.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난 바흐는 열 살이 될 때까지 그 도시에서 자랐는데, 음악으로 가득했던 그 작은 도시는 바흐의 ‘근원적 장면(원초경)’이나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일생 동안 튀링겐-작센 지방을 벗어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가 태어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할레에서 그보다 몇 주 일찍 태어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과 사뭇 다른 삶이다. 대부르주아의 유복한 아들이었던 헨델은 대도시였던 함부르크는 물론이고 현대음악의 진원지였던 이탈리아에서 배운 뒤, 영국으로 건너가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그에 비하면 바흐는 시골의 붙박이 목사를 연상시킨다.
모차르트가 아버지로부터 극성스러운 영재교육을 받은 것과 달리, 바흐는 평범한 음악 교육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아버지의 사촌형으로부터 작곡기법을 배웠다. 그리고 열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대로 죽자,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가정을 꾸리고 있던 열네 살 위의 맏형이 그를 거두었다. 형의 수입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바흐는 라틴어 학교에 다니면서, 교회 아동 합창단원이 되어 장학금을 받거나 교회에서 음악을 연주했다. 그러면서 직업상 형이 필사해야 했던 유명 작곡가들의 악보나 형이 쓴 작품들을 악보로 옮기면서 그의 장기가 될 오르간 음악을 익혔다.
지은이에 따르면 바흐는 “자기가 처한 사회적?정신적 공간을 완전히 통달한 다음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고, 그 공간을 벗어나지 않고도 예술가로서 그 공간을 초월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꽤 정확한 이 인물평은, 두 번의 결혼 생활에서 무려 20명의 자녀를 낳고 길렀던 바흐의 삶을 관통한다. 라틴어 학교와 수도원의 기숙학교를 마친 바흐는 열일곱 살부터 평생 교회와 궁정에 소속된 음악가로 살았다. 갓 교회 연주자가 되었던 젊은 시절에는 연주해서는 안 되는 불협화 반주음과 지나치게 화려한 방식으로 합창단의 노래 반주를 한다는 지적을 받을 만큼 반항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으나, 스물세 살에 결혼하고부터는 그마저도 사라진 듯하다. 대신 그는 평생 동안 교회음악이나 궁정이 엄격하게 금한 음악적 영역을 자신에게 맡겨진 예술적 도전으로 여기고, 그 속에 귀의 만족을 위한 음악과 자율적인 예술의 이상을 새겨 넣었다.
당대의 음악가들이 밥벌이를 했던 교회는 음악가들에게 “교회의 좋은 질서를 지키는 가운데 음악이 너무 길지 않도록, 또한 음악을 오페라식으로 만들지 않고 청중에게 경건한 신앙심을 일깨우도록 만들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점점 세력이 커지고 있던 시민계급은 귀족의 특권이었던 음악에 접근하고 싶어 했고 “음악이란 이제 더는 교회와 계급의 조건 안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을 베푸는 자율적인 미적 창조물로 체험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시민계급은 궁중의 제도적이고 제정적인 가능성들을 갖지도 못했고, 귀족계급처럼 순순한 만족만을 추구하는 것도 에토스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음악정책의 새로운 방향이 교회의 공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필연이며 또한 미덕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서양 음악사의 최고봉이라는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물론이고, 그가 작곡한 숱한 칸타타가 있다. ‘음악을 통한 드라마’로 지칭되기도 하는 이 음악들은 교회 음악 안에 숨어 들어간 ‘작은 오페라 혹은 오페레타’이다.
음악학자인 지은이는 바흐의 작곡방식을 ‘모든 것을 하나 속에’와 ‘모든 것을 하나로부터’라고 설명한다. “앞의 것은 서로 다른 장르들을 하나의 작품 안에 통합시키려는 바흐의 성향으로 드러나고, 뒤의 것은 가능한 한 적은 재료로 가능한 많은 음악적 실체를 얻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나타낸다. 바흐가 비발디로부터 영향을 받아 발전시킨 협주곡이나 그가 심취했던 대위법에서처럼 독립적인 성부나 주제 또는 악기들을 조화롭게 결합시켰던 그의 신기는, 언제나 마르지 않는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바흐 해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