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2일
이광수의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실천문학사, 1998)를 읽다. - 이광수는 30세이던 1921년과 32세였던 1923년 여름에 한 차례씩 금강산을 찾았다. 『금강산유기』는 그가 행했던 두 차례의 금강산 유람을 일지형식으로 적은 것으로, 실천문학사는 1998년 11월부터 시작될 금강산 관광에 맞추어 이 책을 출간했다. 그런데 책을 내기 위해 좀 서둘렀던지 화보가 없어서, 맨송맨송한 게 읽기가 수월하지 않다.
두 번의 금강산 유람을 기록한 이 책은, 당연히 첫 번째 여행기(13~170쪽)와 두 번째 여행기(171~212쪽)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여행기와 두 번째 여행기는 양적으로 큰 차이가 나는데, 유람을 하는 지은이의 심리도 꽤 많이 차이가 난다. 두 여행기 사이에 「민족개조론」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이광수가 처음으로 금강산을 방문할 무렵은, 그가 민족해방 운동에서 완전히 퇴각하여, 민족개조론자로 막 전향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첫 번째 여행을 마치고 난, 그해 연말(11월)에 「민족개조론」을 집필했다. 하지만 그를 일선동조론이라는 구렁텅이로 인도할 민족개조 사상의 맹아는, 1917년에 기행문 형식으로 발표했던 「대구에서」라는 사설에 이미 나타나 있다. 이광수는 그 글에서 조선 청년들이 정치적으로 과격해지거나 범죄자로 타락하는 까닭은 ①일본인들이 모든 일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며 ②조선 청년들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총독부에 두 문제의 해결책을 헌책獻策하면서, 하급 기술직이나 사무원 자리에 조선 청년을 고용할 것과 조선 청년들을 문명으로 감화시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솔, 1999)를 쓰면서 문제의 저 사설을 분석한 김윤식은, “이러한 글을 다른 사람이 아닌 춘원이 썼다는 것, 또 다른 곳이 아니라 총독부 기관지에 썼다는 것은 춘원의 생애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만하다”(1권, 546쪽)고 강조하고 있는데, 춘원이 민족개조 사상을 꽤 오랫동안 품고만 있었던 것은, 공표하기까지 꽤 많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던 때문이다.
이런 심경 속에서 이루어진 첫 번째 금강산 여행은, 단순한 유람일 수 없다. 아래는 거기서 뽑은 두 대목이다.
우리는 제사장(祭司長)이요, 비로(毘盧)의 봉머리에 올라 우문의 장막(帳幕) 속에 자고 향을 피우고 천하만민(天下萬民)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비는 거룩한 천제(天際)를 드리는 것이 아닌가 하였습니다. 나는 극히 엄숙한 마음으로 불길을 따라 하늘로 우러러보며 백성을 생각하였습니다. 아아, 원하옵나니 나로 하여금 이 몸을 저 불 속에 던져 만민(萬民)의 고통을 더는 제물(祭物)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116쪽)
이 돌무더기는 금강산 길 도처에 있는 것이니, 이 역시 누군지 모르는 먼저 간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후에 오는 사람을 위하여 ‘이리 가면 갈 수 있다’하는 지로표(指路標)로 쌓은 것이외다. (…) 이 돌을 세운 사람이 그것을 세울 때 마음은, 이름을 천추만세(千秋萬世)에 전한다는 영웅의 마음보다도 존귀한 것이외다. 그 돌을 세우던 손과 사람을 상상해보시오.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아름다운가. 이 지상에 왕국을 세울 것은 오직 이러한 마음이외다. (107쪽)
그는 금강산을 오르며, 민족의 제사장이자 번제물이 되겠다는 각오와, 앞으로 자신이 걷게 될 행로가 민족의 지로표라는 확신을 다졌다. 예언자들이 산에서 내려오거나 황야를 헤매다가 돌아와 사자후를 토하듯이, 첫 번째 금강산 여행을 마친 그는 한달음에 「민족개조론」을 쓰고, 이듬해인 1922년 12월에 그것을 발표했다. 집필 완료와 발표 연대가 1년이나 차이 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이광수는 이 대목에서도 꽤 망설인 듯하다.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이듬해인 1923년, 이광수는 두 번째로 금강산 여행을 한다. 그런데 이 여행기에서는 첫 번째 여행기에서 볼 수 있었던 자기 확신과 각오가, 뚜렷하게 표시가 날 정도로 지워져 있다. 그는 「민족개조론」을 공표한 직후 분격한 청년들로부터 여러 차례 신변의 위협을 당했을 뿐 아니라,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 일시에 명망을 잃었다. 그는 쉴 새 없이 비가 퍼붓는 보광암 암자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한다.
부귀는 무엇이며 공명은 무엇이며 또 빈천(貧賤)은 무엇이며, 국가는 무엇이요, 고락(苦樂)은 다 무엇인가. 천지도 그저 유유(悠悠)하고 물소리와 산빛은 그저 한가하구나. 나라고 하는 한 생명이 유유한 천지간(天地間)에 태어났으니 그 몸이 한 점 바람과 같고 마음이 한 점 구름과 같고 스러져감이 봉머리에 안개와도 같다. 아아, 이러고저러고가 다 무엇인가 - 이러한 생각이 납니다. 그러할 때에 승려의 신세가 부럽고 황혼의 종소리가 그리워집니다. (173쪽)
물론 속진을 버리고 선경에 들고 싶다는 생각이 두 번째 여행에서 갑작스레 솟아난 것은 아니다. 첫 번째 여행에서도 “공명(功名)은 무엇이며 부귀는 무엇이냐, 제국(帝國)은 무엇이며 자유와 평등은 무엇이냐. 이러한 자연 속에 풀뿌리 나뭇잎으로 일생을 즐김이 나의 속 사람의 소원이외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앞의 상념에 “그러면서 이를 못하고 세상의 여러 가지 의리와 욕망에 글려 만장홍진(萬丈紅塵: 속된 이 세상) 중에서 분투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나의 생활은 모순이요 분열이다”(87쪽)라는 결단을, 서둘러 갖다 붙이지 않았던가? 선경을 희망하면서도 속진에서 할 수 있는 ‘내 몫의 할 일’이 있다는 것, 이런 생활이 모순이고 분열이더라도 그 길을 가겠다는 확신과 각오를 다지는 한에서, 그는 지사요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여행기를 보면,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이후 그는 지사와 지식인으로서의 각오와 확신을 눈에 띄게 잃어버렸다. 다시 거기서 한 대목.
고(苦)도 공(空)이요, 낙(樂)도 공이라, 인생이 공화(空華: 눈앞에 어른거리지만 잡을 수 없는 것)니 공화에서 나오는 것이 모두 공이라. 고는 무엇이며 낙은 무엇이뇨. 고를 피하고 낙을 축(逐)함도 모두 공이로다. 사생도 그와 같으니 생(生)도 공화이며 사(死)도 공화라. 다만 윤회 일선(一線)의 억천 겁(劫)을 관통할 뿐이로다. 바람이 구름을 날리니 나도 바람이요, 구름도 나며, 풀숲에 벌레가 우니 풀도 나의 전신(前身)이요, 벌레도 나의 전신이로다. 무궁무제(無窮無際)한 공공(空空) 중에 신비한 겁화(劫火: 불교에서 인간 세계를 태워 재로 만들어버리는 큰 불)만이 번뜩이니 나의 성(性)도 그를 따라 명멸(明滅)하는도다. (198~199쪽)
근대 민족국가의 태동과 함께 인기를 끈 게 ‘여행기’로, 춘원 이광수가 친구들과 함께 금강산 유람을 떠나던 시대는 여행을 통해 민족 혹은 국가의 신체를 상상하던 때였다. 수도(首都)는 심장, 도로와 강은 혈맥이라는 식으로 국토를 상상할 수 있게 되면서, 지금까지 국민의 인식 밖에 있었던 국토와 국가의 구성원은 하나의 유기체로 포개어진다. 이때부터 국토는 나의 신체가 찢기듯이, 외부의 세력에 의해 찢겨지고 피 흘릴 수 있는 인격체가 된다. 바로 이런 때문에, 여행을 발견한 것은 민족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국토 여행에 따라붙는 ‘자연 예찬’마저 민족주의가 다듬어 낸 미의식이랄 수 있다.
1927년에 출간된 육당 최남선의 『금강예찬』은 그런 ‘국토 사상’의 산물이다. 하지만 춘원의 『금강산유기』는 단순한 국토 사상이나 자연 예찬에 머물지 않고, 불교의 형이상학으로 나간다. 「민족개조론」을 공표한 이후 크게 굴절된 춘원의 심정이 그 일단을 잘 보여 주고 있지만, 이광수의 생애에서 불교는 그를 키운 동학이나 그를 가르친 기독교보다 더 근원적인 종교 감정이었다. 더 알고자 하는 사람은 김윤식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보면 되는데, 2권에서 두 대목을 인용한다.
춘원이 처음 외부 세계와 접촉한 것은 천도교(동학)였지만, 그의 문학 정신에 불교보다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천도교 관계 작품은 수운 최제우를 소재로 한 단편 「거룩한 죽음」(1923) 외에는 한 편도 없다. 그것도 <개벽>에 발표하기 위함이었다. 두 번째는 기독교였다. 과연 기독교는 톨스토이를 통해 본 것이기는 하나, 미션 스쿨에서 오산학교에 이르고 또 상하이 망명에까지 줄기차게 나아갔지만, 가톨릭을 다룬 「순교자」(희곡, 1막), 소설 「금십자가」(1924) 등에 겨우 멈추고 이 역시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는 거의 모든 작품에 스며 있다. 단순한 소재에서 그러함이 아니라 역사소설이나 「재생」 같은 현대소설에서조차도 불교적 원리가 은밀히 작용된다. 다시 말해 춘원 소설의 비밀인 창작 방법론 속에 불교의 원리가 스며 있는 터이다. 인과 법칙이 그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운명론이 아니다. 즉 운명이고 팔자라 하여 모든 것을 체념해 버리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운명을 초극하여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진취성과는 더욱 관련이 없다. (89쪽)
한번 굳어 버린 그 사상은 워낙 강해서 다른 아무리 그럴 법한 사상이 들어와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너무 일찍 노성해버린 비극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불교에서 시대와 사회에도 미동하지 않는 인류의 본성, 그 불변성, 그 비혁명성, 그 현상 유지성, 그 비개조성을 보았고, 이를 인과 법칙이라 했고, 여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자기주장인 민족개조론을 저도 모르게 부정하고 민족성의 현상 유지적인 쪽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것이 춘원에겐 금강산이었다. 금강산행은 따라서 춘원에겐 놀이나 관광이 아니라 ‘치성 드리기’였고, 자기 성정을 확인하는 무의식적 경향성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천도교 이전의, 그의 유년 시절의 변화 없던 깊은 산골의 샤머니즘과 불교적 민속 신앙이 엉킨, 변화 없는 한국적 삶의 원색을 모르는 사이에 찾는 행위이기도 하였다. (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