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
진창현 자서전 『세계의 명장名匠 진창현』(혜림커뮤니케이션, 2002)을 읽었다. 그는 1929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나 열네 살 때, 공부를 더 하겠다는 욕심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는 세 명이나 되는 손위 이복 형들이 있었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막노동과 공장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주경야독을 하던 중에,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조선도 따라 해방됐다. 그때 일본에는 240만 명의 재일조선인들이 있었는데, 60만 정도가 귀환하지 않고 잔류했다. 이들을 재일조선인 1세대라고 하는데, 일본 정부는 이들에게 국적을 부여하지 않고 영주권만을 보장했다.
500년간 농업 국가였던 조선을 강점한 일본은 조선인의 농토를 빼앗았다. 토지조사를 한다는 포고를 붙여놓고 기간 내에 신고하지 않은 토지를 몰수하는 방법으로, 일제는 일본어를 읽고 쓸 줄 모르는 농민의 땅을 강탈했다. 땅을 빼앗긴 농민은 북(만주·연해주)이나, 남(일본)으로 농토와 일자리를 찾아 유민이 됐다. 해방이 되자 일본의 앞잡이로 간주되었던 중국 쪽의 조선인들은 귀환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나, 일본 쪽의 조선인들은 생계나 교육 등의 이유로 귀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진창현은 학업을 계속하고자 체류를 택했다.
종전이 되어서도 궁핍과 조선인 차별은 가시지 않았지만 그는 선착장의 짐꾼과 인력거꾼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메이지대학교 영문과 야간부에 입학했다. 교사가 꿈이었던 그는 대학교 3학년 때 교직과정의 학점을 모두 따고, 교원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교원 자격증을 얻고서야 그는 국적이 달라서 교사가 될 수 없다는 사정을 알게 된다. 실의에 빠져 귀국을 고려하고 있을 즈음, 어느 집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갑자기 바이올린 소리를 떠올렸다. 그가 고향에서 소학교에 다닐 때 일본인 교사가 그의 집에 살았던 적이 있었고,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던 그 교사가 잠시 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그 길로 대학가의 고물상을 찾은 그는 일본에서 가장 흔했던 스즈키 바이올린을 사서, 바이올린 학원에 등록했다. 직업 연주자가 되겠다는 꿈보다 <지코네르바이젠> 같은 곡을 직접 켜보고 싶다는 소박한 염원에서였다. 불투명한 장래로 암울하던 어느 날 그는 ‘바이올린의 신비’라는 강연 포스터를 보고, 바이올린에 대한 궁금증과 강연자의 특별한 이력에 끌려 강연장을 찾게 된다. 강연자 이토가와 히데오 교수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 공군의 주력기였던 제로 전투기를 설계한 공학자였다. 그는 이날 강연에서 300년 전의 명기인 스트라디바리우스에 대한 연구를 들려주면서,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음은 영원한 수수께끼이며 인간의 노력으로는 복원해 낼 수 없는 영원한 신비”이며 “인간의 과학 기술로는 로켓을 만들어 달에는 갈 수 있을지 몰라도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음을 재현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불가능’이란 단어와 ‘영원한 신비’라는 단어가 자극적인 울림이 되어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진창현을 뒤흔들었다. “아무 잘못도 없이 꿈을 좌절당하고 인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그 당시의 나로서는 내 앞에 가로놓인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보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이상하게도 바이올린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지만, 그의 귀는 좋은 소리를 감별하는 데 유별났다. 그래서 자주 들렸던 악기상의 주인에게, 바이올린을 만들고 싶으니 장인을 소개해 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여든이 넘은 어느 장인을 찾아가 제자 되기를 청했다. 젊은 제자가 생긴 장인은 처음에는 숙식은 물론 도구까지 모두 물려주겠다며 기뻐했으나, 그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듣자 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 일을 안타까워 한 악기상은 이후로, 동경에 있는 바이올린 장인들을 거의 다 소개해 주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문전박대당했다. 그는 수제 바이올린 장인의 도제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바이올린을 만드는 공장에 들어가 기초적인 기술을 먼저 배우자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키소에 있는 스즈키 바이올린 공장을 찾아갔는데, 쉬울 줄 알았던 그것마저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때가 스물여덟 살이었고, 그동안에도 생계를 위해 온갖 일을 섭렵했다.
과장하자면, 진창현은 바이올린 발명했다. 아무도 그에게 바이올린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키소에 살면서 퇴근하는 스즈키 바이올린 공장의 공원들을 붙들고 물었던 게 그가 배운 바이올린 제작법이었다. 공원들은 자기가 맡은 공정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체를 짜맞추는 일은 온전히 그만의 일이었다.
서른 살 무렵에서야 자신의 바이올린 1호를 제작한 그는, 바이올린이 40개 넘게 만들어지자, 그 가운데 완성도가 높은 열점을 골라 졸업 이후 한번도 발 딛지 않았던 동경으로 올라갔다. 악기상을 몇 군데 들러보았지만 바이올린을 사주겠다는 곳은 없었다. 그러다가 모교 근처에 있는 악기점에서 악기 브로커를 만났다. 그는 진창현의 바이올린을 세심하게 시험해보더니 “세공은 아직 부족”하지만 “소리는 상당히 좋”다면서, 악기점에 내놓고 팔기는 어렵지만 음질이 좋으니 바이올린 교습용으로 판로를 찾아보라고 권했다, 그러면서 일본 바이올린계의 세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인 시노자키 히로구츠를 소개해주었다. 그날 시노자키는 진창현의 바이올린 열 점을 대당 3천 엔에 모두 샀다. 그러면서 진창현에게 동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집을 얻어 주겠다는 제의를 한다. 서른두 살에서야, 바이올린 장인의 길이 비로소 열린 것이다.
진창현의 바이올린이 대당 3천 엔일 때, 대졸 월급자의 월급은 5만 엔이었으니 그야말로 헐값이었다. 그런데 한 학생이 그 바이올린으로 일본 최고의 예술대학이라는 동경예술대학에 합격하는 일이 생겼다. 음악대학에 입학하려는 학생들은 대당 4백만 엔에서 5백만 엔 정도의 것을 사용했다. 개중에는 2천만 엔이나 3천만 엔이나 되는 고가의 바이올린을 가진 학생도 있었고, 심지어는 2억 엔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를 가진 고등학생도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의 이름은 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마흔다섯 살 무렵에는 그의 바이올린이 150만 엔을 호가하게 됐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출발에 불과했다.
1976년 필라델피아 시에서 열린 국제 현악기 대회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드날렸다. 전 6개 종목에서 5개의 금메달을 석권한 것이다. 또 1984년에는 미국 바이올린 제작자협회로부터 세계에서 다섯 명밖에 없는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 칭호를 수여 받았다. 현재 그는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로 불린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박대했던 수많은 일본 장인들이 그를 문하생으로 받지 않으려고 “바이올린은 누구한테 배우는 게 아니라 직접 해보는 방법”밖에 없다고 둘러댔을 때는 무척 야속하고 섭섭했다. 그러나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자신의 제작 비결을 후대에 전하지 않았고, 진창현은 “나중에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보고”서야 그들의 핑계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도 명장이 되고 싶은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속에 “보편 원리를 스스로 터득”하는 직관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