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
황석영의 『심청』(문학동네, 2003)을 읽다. - 얼쑤! 해설자는 이렇게 썼다. “『심청』과 더불어 한국문학사 전반은 이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완전 돌겠군. 얘는 죽기 전에 수전증부터 걸릴 거고, 그다음엔 손목 관절염으로 고생할 거야. 그러다가 죽고 나면 시뻘겋게 달군 집개로 혀뿌리가 뽑히는 고문을 억날겁이나 당할 거고. 얘야, 한국문학사의 전반은 어디메뇨? 대체 그 전반이 어디라서, 이 소설이 또 한국문학사의 후반을 새로운 단계로 진입시킨다는 거냐? 어쩌자고 원고지에 이런 똥칠을 하며 살까?
아해는 『심청』을 가리켜 “우리 문학사 전체에서도 볼 수 없었던 풍부하고도 무시무시한 현존을 포착해낸 소설”이란다. ‘빨기’대장님,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 빨아 줄 수 있죠? 흠, 이 해설을 쓴 아해의 부모는 자기 아들이, 제 이름 걸어 놓고 이런 따위의 글을 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 나 같으면 차라리 마소馬牛를 낳고 말겠다. 이제 해설자는 자신이 쓴 『심청』의 찌라시를 꼭 자식들에게 읽혀야 할 것인데, 그 자식들이 아둔하지 않다면 반드시 이렇게 물을 것이다. ‘어이, 빨기대장, 비평이 뭐야?’
비평은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작품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밝히는 것과 동시에, 그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으나 말하지 못했던 것까지 함께 밝혀야 한다. 전자가 공감이라면 후자는 비판이다. 이런 각오와 균형이 없는 비평은 제정신을 가지고 쓴 비평이 아니다. 먼저 아해는 이 작품을 일컬어 “작가 자신의 분명한 의도 하에 전면적으로 재구성된 심청전”, “다시 씌어진 이전의 심청전들과도 다르다”는데 뭐가 다르다는 걸까? 심청이 ‘창녀만들기’는 최인훈의 희곡 「달아 달아 밝은 달아」를 날것으로 찜 쪄 먹은 건데. “심청은 눈을 감고는 한번 빙긋이 웃었다. 오물조물한 입이 조금 움직였을 뿐, 실컷 울고 난 사람의 웃음처럼 그건 아주 희미했다”는 『심청』의 마지막 구절은, 할머니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심청이 “교태를 지으며/환하게 웃는다/갈보처럼”이라는 지문을 끝으로 막幕이 내리는 「달아 달아 밝은 달아」에 대한 오마주다.
해설을 쓰면서 아해는 그야말로 아낌없이 사정한다. 차례대로 “모더니티의 악마성”, “한계에 직면한 모더니티의 어떤 가능성”, “심청에게 모더니티 그것은”, “세상은 이처럼 모더니티의 높은 파고이다”, “모더니티의 거대한 파고”, “모더니티라는 높은 파고”, “모더니티의 가장 큰 희생양”. “모더니티의 거센 파고”, “모더니티의 위력”, “잔혹한 모더니티의 파고”, “모더니티의 파고”, “이 지독한 역설이 모더니티의 속성”, “모더니티의 악마성”, “모더니티의 지옥도”, “모더니티가 구축한 욕망의 모델”, “동아시아 모더니티의 살풍경과 모더니티 전체의 아이러니와 광기”, “광기의 모더니티”, “모더니티의 세계”, “모더니티의 시·공간”, “모더니티 그것이 호명해주는 대로”, “모더니티의 대행자들”, “모더니티의 질서 바깥”, “견고한 모더니티의 세계”, “모더니티의 대행자”, “모더니티 체제는 극도의 공포 그 자체”, “모더니티의 악무한적인 연쇄”, “모더니티가 안고 있는 모순”, “모더니티의 가장 커다란 희생자”, “모더니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인간 자신을 철저하게 상품화하는 모더니티”, “자기만을 배려하는 모더니티”, “심청전에서 심청을 길러 낸 수많은 어머니들의 이타성이 이처럼 모더니티 전반을 가장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로 다시 살아난 셈이니, 이것 하나만으로도 황석영의 『심청』은 한국문학사에 의미 있는 새로운 전통을 일궈낸 일종의 문학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그래, 저 소설이 네 눈엔 사건으로 보인다는 말이지? 내겐 저 소설보다, 오히려 네가 쓴 해설이 더 사건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문학 비평이 얼마나 ‘망쪼’ 났는지를 절단해서 보여주는, 스캔들로서의 사건. 아니, 아니야! 개도 웃고 지나가는 ‘주례사 비평계’에 아직도 스캔들이 가능하다니? 비평이 스캔들 아니라 ‘스컹크’가 된 지는 오래지. 맡아 봐라. 같은 책 표4에 추천사를 쓴 웬 노추한 양반의 글, 벌써 몇십 년째 스컹크로 건재하고 계시는 쉰내 나는 ‘작것’의 글을. 얼쑤!
비아그라라도 낫게 삼켰나, 이 노인이 일필휘지한 것 한번 보소. 황석영 선생의 『심청』이 “동아시아문학에 도달한 한국문학의 새 경계”란다. 황석영 선생이 그려 놓은 심청이를 보고 “성창”이란다. 그런데 이 노인네는 성창이란 말을 최인훈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문학과지성사, 1979)에 붙은 이상일의 해설에서 베껴왔군. 봐. “「달아 달아 밝은 달아」의 심청이 청루에 팔렸다가 풀려나는 것처럼 보이는 그 구도의 이면에는 성스러운 추악의 다른 일면인 성창聖娼의 어슴푸레한 흔적이 있다.” 참 지독하지? 그런데도 냄새를 맡지 못한다면, 소위 비평가란 것들끼리 매일 ‘비역 파티’를 해서가 아닐까? ‘피 방귀’를 뀌면서 말이야.
해설 전문을 통해 유일하게 정직했던 증상(모더니티 타령)이 보여주었듯이, 모더니티든 모더니티의 비극이든, 『심청』이 그 어떤 모더니티와도 관계되지 않는다는 게 아해에겐 난관이었다. 애초에 『심청』은 어떻게 시작했던가? 심청은 원래 하늘나라에 살던 남해관음南海觀音이다. 그 관음보살이 죄를 짓고 지상으로 정배당한 게 심청이다. 다시 말해 심청은 죄속을 하기 위해 창녀가 되었어야 할 팔자였으니, 그녀는 자신의 의지가 환멸과 만나는 모더니티의 세계와 별 상관없는 설화 속의 주인공이다. 게다가 심청은 또 왜 중국으로 팔려갔던가? 성난 바다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혹여 이 작품이 비극이라면 그 기원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구비설화의 모티브를 황석영 선생이 잘못 집어삼킨 데 있지, 열다섯 살 난 소녀가 모더니티와 조우한 데 있지 않다. 심청은 모더니티가 아니라 기원전 2,000년 전, 아브라함 대代에서 끝난 인신공양의 희생자였다.
심청은 중국 난징·진장, 대만, 싱가포르, 일본의 류큐·나가사키의 집창촌(혹은 화류계)을 주유한다. 아해는 그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심청의 삶으로부터 모더니티의 발톱이 동아시아를 침탈하는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했던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 심청은 동아시아의 정세를 관찰할 수 있을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황석영 선생은 그저 우리나라의 ‘큰 마담’들 몇 분을 가까이서 흠향했던 모양인데, 육전·해전·공중전을 다 치룬 요정 마담이 남한 정도는 ‘카바’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서세동점에 흔들리는 동아시아 역사를 감당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어이, 황구라, 당신은 주인공을 설정을 잘못한 거야.
아해는 모더니티를 형용사처럼 나열했다. 그런데 저 잡다한 모더니티 가운데 아해가 꽤 공들여 설명을 시도했을뿐더러, 심청이란 인물과 밀착된 것으로 여겨지는 모더니티는, 모더니티와 여성의 성 상품화 현상이다. “근대화의 모순은 여성, 혹은 여성의 상품화에 집중적으로 관철된다. (…) 상대적으로 비교적 오랜 훈련이나 전문성 없이도 자신을 상품화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여성이다. 그렇게 그들은 여공으로, 매춘부로 살아가게 되며 아직도 자본주의적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부양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몸과 인격을 상품화하는 여성은 주변부 모더니티의 가장 큰 희생양이자 그것이 만들어낸 가장 큰 위험이다.” 얼쑤!
서양 열강에 의한 갑작스럽고 강제적인 동아시아의 자본주의화는 여성을 상품 즉 매춘부로 만들었다니, 그게 심청이 맞닥뜨렸다는 모더니티의 높은 파고란다. 아해는 그러니까, 매춘부는 자본주의나 산업화 시대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형국인데, 이건 매춘에 대한 기초적인 오해다. 매춘은 자본주의나 산업화 이전부터 존속했던 가장 오래되고 손쉬운 여성의 직업이었다. 그걸 새삼 증명할 필요는 없는데, 자본주의나 산업화가 매춘과 관련한 유의미한 사항은 매춘부의 증가가 아니라,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매춘을 엄격히 ‘관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므로 근대화나 서양 열강에 의한 강제적인 동아시아 개항이 대다수 식민지 여성을 성 상품화했다는 논리는 문사의 헛소리다.
모더니티는 아해의 헛소리와 달리, 동양 여성에게 자아를 교육시키고 자신의 육체에 자긍을 갖게 했다. 예컨대 아해가 인용해 놓기도 한 “나는 힘이 좋아. 힘을 가지고 싶어요. (…) 힘 있는 것을 꾀어서 가지면 되잖아요. (…) 나는 유혹할 거예요. 그러다가 내 맘대로 그만두면 지들이 어쩔 거야” 같은 대목은, 아해에 의해 악마화되고 악무한으로 규정된 모더니티 ‘밖’으로 나가기 위한 지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자신을 배려하고 보존하는 기술로 얼마든지 바꾸어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작중의 심청은 오늘날 ‘슬레이브걸slavegirl’이라고 일컬어지는 육체적 매력을 이용해서 전근대적 세계로부터 근대적인 세계로 무단 횡단을 감행하고, 아해가 ‘가부장적인 모더니티 세계’라고 썼을 게 뻔한 현실을 발아래 굴복시킨다. 심청은 모더니티가 선사해준 자신감과 자긍심으로 무장했기에 유곽을 벗어날 기회가 있는데도 번번이 유곽 생활을 수긍한 것이다.
소설의 대미에 나오는 수수께끼 같은 “빙긋이 웃었다”와 “웃음처럼”은, 심청이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모더니티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그녀는 중국으로 팔려간 뒤 동아시아를 떠돌면서 한번도 아버지를 그리워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았다. 왜 아니란 말인가? 아버지(심봉사)는 저 혼자 살겠다고 어린 딸을 청나라 선원들에게 제물로 팔았고, 선원들은 그녀의 가슴께에 동아줄을 동이고 바다에 빠트린 후 혼절할 때서야 건져냈다.
다시 말해 저 아해의 ‘모더니티’ 인식은, 동양을 수탈당하고 능욕당하는 여인의 위치에 놓고, 모더니티를 강간범(남성)으로 간주한 지극히 이분법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오리엔탈리즘적인 모더니티 이해다. 모더니티 해석에 대한 나의 이견이 근거 없고, 아해의 말이 더 설득력 있다면, 안 그래도 별 볼 일 없는 『심청』은 더욱더 허접한 작품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정신줄을 놓은 아해는 좋겠다. 황가의 소설에서 “항상 청춘의 욕동”을 느낀다니! 많이 하시도록!
사족. 이 허접한 소설은 ‘미모의 여성’에 대한 환상, 혹은 무한한 성적 능력(오르가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질투가 투사된 ‘포르노’의 일종이다. 황구라뿐 아니라, 남성 구라꾼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여자? 얼마나 좋아? 예쁘게만 태어나면 무슨 문제가 있어? 나 같으면 돈도 벌고 재미도 보고, 평생 창녀로 살 거야!’ 그런데 이런 판타지는 식상하지 않았나? 그러니 『심청』을 쓴 작가는 ‘남창’ 얘기도 한번 써주면 좋겠다. 제목은 『석영』·『보선』, 어느 것이나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