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9일
메릴 윈 데이비스의 『다윈과 근본주의』(이제이북스, 2002, ICON BOOKS08)를 읽다. - 이제이북스에서 나온 ‘ICON BOOKS’ 시리즈는 유명 사상가의 이론을 정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21세기의 논쟁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유명 사상가들의 이론을 재조명하거나 해석한다. 메릴 윈 데이비스의 『다윈과 근본주의』 역시 다윈의 진화론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다윈에서 출발한 진화론과 성경 직해주의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창조과학 사이의 싸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99년 8월, 미국 캔자스주 교육위원회는 교과과정에서 진화를 뺄 수 있도록 허용하는 안건을 근소한 표 차이로 통과시켰다. 미국에서 진화교육이 논란이 되고 있는 곳은 캔자스주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주에서 메인주에 이르기까지 무려 13개 주에 달한다. 또 몇몇 주에서는 창조과학을 진화론과 같은 과학적 탐구로 동등하게 대우해달라는 요구가 제기되고 있다. 1960년대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 집단에서 유래한 창조과학은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자신들의 믿음을 뒷받침하거나, 진화학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 모든 사례를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제시한다.
창조론자들과 진화론자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오늘의 전투는,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었던 때부터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던 논쟁의 재연이다. 때문에 이 논쟁을 지켜보는 언론과 대중들은 두 진영 간의 논쟁이 ‘과학과 종교’ 사이의 혈전이며, 많은 경우 다윈과 진화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뿐이며, 또 진화와 근본주의 사이의 전투는 이성의 빛과 교리의 어둠 사이의 전투라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오늘의 과학은 갈릴레오가 박해를 받던 중세 시대가 아니다.
이 책의 지은이는 독자들에게, 공립학교에서 진화교육을 금지하려는 창조과학 진영의 이의제기를 ‘종교재판’이라는 망령과 동일시하면 안 된다고 주의시킨다. 지은이는 오히려 그와 반대로, 과학자들이 그들의 적인 기독교인들처럼 근본주의자일 수 있으며 나아가 기독교 근본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는 ‘과학적 근본주의’도 상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진화론자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다윈과 다윈주의 및 다윈주의적 사유를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른 것만큼이나, 과학 내에서도 그것을 보는 관점은 제각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은이는, 창조과학도 진화론에 대한 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거부할 때, 진화론자들 역시 기독교 근본주의와 똑같은 과학적 근본주의가 될 수 있으며, 그런 행위야말로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다양한 입장을 무시하고 침묵시키는 근본주의자들의 병폐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하는데, 진짜 이 말이 뜻하는 부류는 1611년에 나온 킹 제임스 성경번역본을 따르는 무리를 말한다. 성경 무오류뿐 아니라, 오직 하나의 번역만을 옹호하고 있는 킹 제임스 성경번역본의 지지자들은 이 번역본에 나오는 사건을 추적하고 연대를 역산하여 기원전 4004년 10월 13일에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선포한다. 신이나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우스꽝스럽지만, 저 창조일은 1701년부터 공인된 킹 제임스 성경에 인쇄되었다.
지은이에 따르면 교부나 신학자들로 하여금 이런 꼼꼼한 계산을 하도록 만든 게 르네상스며, 그 당시의 지식사회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런 이성적인 논증이, 오히려 예전에는 의심받지도 언급되지도 않았던 성경에 대한 온갖 의문의 갑문을 열어젖혔다. 다윈의 연구는 바로 그런 지식사회학의 풍토 속에서 나온 작업이면서, 그의 창조적인 측면도 그 시대의 사회로부터 필연적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즉 다윈의 진화론을 설명하는 기본 개념인 자연선택조차 과학적 사실이기보다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전성기에 살던 빅토리아조 중기 중산계급이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사회적 가치’를 고취시킨, 모든 생명에 적용되는 단일한 설명”에 불과할 수 있다.
『종의 기원』이 다윈의 손에 여러 번 개정되었느니 만큼, 다윈의 이론이 불충분하거나 오류가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이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의 이론이 실제 증거 위에서 어떤 관점을 취해도 무방한 구조, 즉 거대 이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윈주의가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과학을 서양문명의 새로운 권위의 원천으로 확립”하기로 작정한 권력과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산 계층과 반교권주의자들에게 다윈주의는 자신들의 지위와 우월성을 드러내는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지은이는 한 시대의 인정이 다윈주의의 유일한 진리성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고 본다.
종교가 과학자에게 종교적 신념을 강요하던 중세와 달리, 현대에는 과학이 종교에게 인간의 기원에 대해 강요하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최초의 다윈주의는 유물론적 해석 이상의 여지, 즉 창조론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겨 두었으나, 20세기 다윈주의자들은 점점 공격적이 되었다. 그 한 예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이다. 다윈은 유전자학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다윈주의에서 비롯한 근본주의 유전학자들은 “유전자가 모든 생물의 유일한 결정 프로그램”이며 “유전자는 우리 ‘행위 규칙들’의 유일한 근원, 즉 ‘도덕률’의 대안”이라고 주장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다윈주의자들의 바로 이런 공격성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면서 다윈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내가 보기엔 이것이, 이 책에서 지은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다윈주의에 반대하면서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아닐 수도 있을 가능성을 위해 싸웠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만의 협소한 환원적이고 특수한 목적을 위해 전투를 해왔을 뿐이다.” 그래서 전선은 종교냐 과학이냐를 선택하는 이원적인 문제로 축소되었다.
자연과학자들은 자신의 정적인 종교인들이 지닌 신학적 열정을 갖고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들 역시 종교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종의 신학적 정설과 같은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 책의 지은이는 다윈주의를 그런 신화적 정형을 갖춘 체제로 간주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상대주의 입장에서 도킨스의 극단적 다윈주의ultra-Darwinism를 공박한다.
사족이다. 아주 흥미롭게도 지은이는 창조과학자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과학적 이론’이 아니라, ‘상대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말한다. 이게 진짜일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다윈주의가 빅토리아 시대의 이익을 대변하는 과학이었다면, 왜 창조과학은 미국에서만 기승을 부릴까? 웬만하면 창조과학도 다윈주의 내의 한 이견으로 볼 수 있다는 지은이의 주장을 수긍해주고 싶지만, 창조과학의 지역적 특색에 대한 설명이 없는 저 주장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