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5일
탬신 스파고의 『푸코와 이반 이론』(이제이북스, 2003, ICON BOOKS 14)을 읽다. - ‘이반’은 이 책의 원제 ‘Foucault and Queer Theory' 가운데, ‘Queer’에 상응하는 번역어다. 명사·형용사·동사로도 모두 사용 가능한 퀴어는 ‘정상적인’ 또는 ‘정상화하다’에 대립하는 용어다. 이 단어는 미국에서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은어로 사용되었지만, 80년대 이후 동성애 운동가들이 오히려 자신들을 긍정하기 위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했다. 퀴어 이전의 ‘게이’는 남녀 동성애자만을 뜻했으나, 퀴어는 이성애 체제에서 소외된 성적 소수자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다.
역자가 퀴어의 대응어로 선택한 ‘이반’은 한국의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단어다. 원래는 ‘二般'이란 한자를 썼으나, 동성애 인권 운동가들에 의해서 ‘異般'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퀴어와 같이 동성애자만 아니라 이성애 체제에서 소외된 성적 소수자 모두를 가리키는 단어로 정착했다. 이반의 어원은 불확실하지만 종로의 게이 커뮤니티에서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게 정설로, ‘일반(一般)’이라는 단어를 비튼 게 ‘이반(二般)'이라고 한다.
여성들이 성별(gender)을 분석하는 적극적 집단이라면, 이성애의 규범을 거역하는 퀴어 집단은 성의 정치학을 연구하는 데 앞장섰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성애와 동성애의 대립, 생물학적인 성과 문화학적으로 정의된 성별의 대립,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대립을 포함하여 생물학적인 성(sex), 사회적 성별로서의 성, 섹슈얼리티(sexuality)에 대한 기본적인 가정들에 도전함으로써, 정체성의 정치를 실현한다.
이반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고, 자신들의 정체성에 시민권을 부여하기 위해 의지한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이 미셸 푸코다. 푸코가 이반 이론의 원조는 아니지만, 그는 이반 이론의 촉매 구실을 했으며 본보기와 선례가 되었다. 그런 뜻에서 푸코는 이반 이론의 계보학 가운데 기원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미완이 되어버린 『성의 역사』는 푸코가 이반 이론에 기여한 중요한 책이다. 거기서 푸코는 “성이 인간 삶의 자연적 특성이 아니라 구성된 범주”라는 주장을 했다(본질주의에 대항하는 구성주의적 관점은 푸코 철학의 특징이다). 푸코는 성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제도와 담론”이 수행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우선시했으며, 당연히 정상/비정상과 같은 성에 대한 모든 지식 역시 그 자체로 자연적이기보다는 “문화적이고 특정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다.
푸코는 이반 운동가들에게 위와 같은 ‘담론 이론’만 제공한 게 아니라,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계보학적으로 전복해 주었다. 그것은 ‘동성애자’라는 범주 혹은 종(種)이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근대에 구성된 ‘지식의 범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19세기 이전만 해도 남색(sodomy)과 같은 성적 습성은 교회에 의해 비난받고 법률로 금지되었을 뿐, 그들을 동성애자라는 종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16세기의 남색가들은 자신의 수치스러운 행위를 고백하도록 강요받았다면, 19세기 후반부터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자인해야 했다.
권력이 이처럼 동성애자라는 새로운 종과 범주를 구성해야 했던 까닭은 “발전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필요에 부합하는 생산적이면서 가임적인 인구(또는 노동력)를 보존하고 증진”시키기 위해서였다. 마땅히 이러한 재생산 체계 내에서 “동성애적 욕망과 실행은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할 문제였으며 생식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비정상적 행위”였다. 동성애가 수치스러운 습성에 지나지 않고 “일탈적이고 비정상적인 유형의 인류”를 가리키는 범주와 종으로 분류됨으로써, 동성애는 체계적인 관리 대상이 되고 효과적인 배제의 대상이 된다.
동성애자들은 푸코의 담론 이론과 계보학으로 무장하고서야 자신들을 위해 말하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정당성과 자연성을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반 운동가들은 성이 문화적 산물이라는 푸코의 문제의식에 시사 받아, “동성애가 특유의 문화적 범주이듯이 이성애도 분석이 필요한 역사”를 가졌다고 발전시켰다. 즉 똑같은 문화적 산물인 이성애/동성애 가운데, 동성애가 이성애의 보충인 것 같지만 실은 이성애가 동성애에 의지하고 있다는 주장이 그렇다. 예를 들어 1988년의 영국 지방정부조례는 학교에서 “동성애를 조장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성애를 옹호하는 이와 같은 엄청난 법적·정치적·문화적 지원이 없다면 이성애의 우위는 상당 부분 무너지고 말 것이다.
동성애와 이성애가 서로를 보충하는 개념적 짝인데도, 어떻게 해서 동성애는 이성애와 동등한 대립자가 되지 못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지은이는 “어떤 대립도 찬란한 고립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모든 것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서 작용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전통적이고 상호의존적이면서 동시에 적대적인 남/여 대립은 이성적/감정적, 강한/약한, 능동적/수동적 등과 같은 다른 대립물과 연결됨으로써 자신의 위계적인 구조를 갖게 된 것처럼, 이성애/동성애 역시도 그것을 지탱해주는 대립물의 관계망에 의해 서로 다른 위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에 대한 푸코의 분석과 그와 관련한 후기구조주의 및 이반 운동가들의 독해는, 하나같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주체가 허구라고 말한다. 나의 것이라고 믿었던 나의 개별성과 자율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논리 위에서, 나의 성적 주체성 또한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인 결정이 아니라 “문화적 관계망”에 의해 지각되고 결정될 뿐이라는 게 푸코로부터 출발한 이반 이론의 결론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우리는, 남/여 성별조차 “이성애라는 개념에 기반해 구조화된 담론적 실천”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주디스 버틀러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버틀러의 논의는 지금까지 말해왔던 문화 결정론(구성론)으로 환원하는 감이 있다.
사족이다. 아래의 한 대목은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이 푸코 읽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실제로 인용에 뒤이은 기술이 그 사실을 밝혀주고 있기도 하다).
버틀러가 주목하듯이 푸코는 『성의 역사』 서론 말미에서 “생물학적 성” 자체는 욕망의 원천이자 원인으로 이해되어 왔던 허구적 범주라고 논증한다. 신체는 자연적으로 “성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권력관계를 확대하고 유지하기 위해 성의 산물을 이용하는 문화적 과정을 통해 그렇게 된다. 그러나 푸코는 자신의 작업이 예기치 않게 드러내고 있듯이, 신체는 자연적이며 문화적 과정과는 다른 질서에 속한다는 관념은 막강하다. (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