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필 멀런의 『프로이트와 거짓기억 증후군』(이제이북스, 2004)을 읽다. - 이 책은 1990년대 초에 새로운 논란거리로 부상하기 시작한 ‘거짓기억 증후군False memory syndrome'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잘 읽지 않으면, 아예 읽지 않은 것보다 못하게 될 수 있다. 이 책을 잘 읽기 위해서는 먼저, 저 용어가 탄생한 배경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얼핏 들으면 마치 공인된 임상臨床 용어처럼 보이는 거짓기억 증후군은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있는 피의자들과 프로이트의 적들이 합작해서 퍼뜨린 것일 뿐, 거기에 관한 “임상 사례 연구가 의학이나 과학 학술지에 발표된 적이 전혀 없다”고 한다.
이 증상은 정신 치료나 상담을 받던 사람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성추행을 ‘기억’해내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어린 시절에 경험했으나 억압되고 잊힌 성추행의 기억이 성인이 되었을 때 여러 가지 형태의 정신적 고통을 유발한다고 믿는 일부 심리 치료사들은, 최면을 비롯한 여러 기법을 사용해서 환자들의 억압된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 있다고 공언한다. 환자들은 그런 심리 치료사로부터 설득과 자극을 받아 단지 상상의 산물일 뿐인 것의 실재성을 믿게 되고, 가해자라고 추정되는 가족(주로 아버지)을 고소하게 된다.
이 책에는 자세하지 않지만, 저런 고발 사례가 엄청나게 증가하면서, 자신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는 피의자들이 “기억의 불확실성에 대한 인식을 널리 확산”시키고자 저 용어를 보급했다. 즉 저 증후는 소위 거짓기억 증후군 환자의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띤 단체들이 퍼뜨린 것일 뿐, “정신의학 교과서를 비롯하여, 정신의학이나 의료상의 질환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 책의 지은이는 저 증후군이 ‘의원성 질환醫原性 疾患’이라는 설에 동의하고 있다. 의원성 질환이란 “해로운 의료 행위나 치료 행위로 인해 발생한 증상”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들에게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라는 이반 일리치의 반문화적 구호로 익히 알려져 있다.
공식적인 진단 지침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짓기억 증후군이 있다고 주장하는 단체들은, “그런 기억[거짓기억]이 매우 깊이 뿌리를 내려 한 개인의 전체적인 인간성과 생활양식을 결정하고 다른 종류의 적응적 행동을 붕괴시킬 때” 거짓기억 증후 환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 단체의 학자들은 그런 증후군을 부추기고 만든 배후로 “페미니즘이나 반남성적이고 반가족적인 태도, 그리고 자신의 문제에 대해 항상 비난할 대상을 찾으려는 피해의식의 증가”를 들며, 이런 경향의 “궁극적인 책임이 프로이트에게 있다”고 지목한다. 프로이트야말로 “기억 회복 치료 유행의 아버지”이며, “정신분석은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사이비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프로이트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 전반에 근거 없는 환상의 씨앗을 뿌려 백여 년이 지난 후에 거짓기억 증후군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나쁜 아버지였는가?” 좀 더 친절하게 공소장을 다듬자면 “정신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는 환자의 마음과 기억을 암시를 통해 조종하고,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외상을 기억해 내도록 유도하며, 모든 형태의 심리적 문제가 어린 시절의 성추행에 기인한다고 믿는 한편, 기억에 대해 극도로 부정확한 관점을 고수하는 경향의 기원을 프로이트에게서 찿을 수 있는가?” 이 책은 거기에 대한 간명한 변호다.
프로이트의 초기 논문의 몇몇 사례와 이론은 아동기에 겪은 성희롱·성추행·성폭행이 병인적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또 프로이트는 성추행에 의해 히스테리가 발생한다는 핵심적인 이론을 버리기는 했으나, 어린 시절의 성적인 외상이 흔하다는 것과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많은 임상적 경험과 고찰을 축적하면서 초기의 견해를 지속적으로 수정해 나갔다. 우선 그는 히스테리의 원인이 성희롱과 성추행을 포함한 어린 시절에 겪은 성적 자극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겪은 외상적인 경험의 기억이 이후에 일어난 다른 경험에 의해 활성화된 결과”라고 본다. 다시 말해 히스테리는 어린 시절의 외상과 현재의 외상이 겹칠 때 생겨난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이론적 수정은 환자가 어린 시절에 받았다는 “성적 유혹의 장면들을 실제로 있었던 사실로 받아들인 실수”를 깨닫고 “어린 시절에 대한 환상이 실제로 있었던 것에 대한 기억으로 잘못 인식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에 겪은 유혹이나 성추행이 어떤 심리적 문제로 발전하는 데 하나의 요인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핵심적이고 보편적인 병인적 중요성을 갖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이론을 수정한 끝에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의 이론 주위에 느슨하게 포진해 있던 아동기에 겪은 성추행이라는 “실재성의 확고한 기반”이 사라지자, 대신 “아동기의 성욕,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환상의 폭넓은 역할, 심리적 현실, 그리고 정신생활에서의 자기기만에 대한 이론”이 열렸다. 지은이가 이런 논리를 들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주 명료하다. 즉 거짓기억 증후군이란 역풍을 불러왔던 일부 심리 치료사들의 공언처럼,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에 받은 성추행을 정신분석의 초석으로 삼지 않았으며, 나아가 기억이 완전히 복원될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거짓기억 증후군을 퍼뜨리며 프로이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는, 프로이트가 퍼즐 맞추기처럼 기억을 완전하게 복원할 수 있으며, 기억은 정직하다고 주장했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이야말로 거짓기억 증후군을 주장하는 사람들만 아니라 프로이트를 오해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이다. 프로이트에게 기억은 사실의 재현이 아니다. 뇌 속에 저장된 기억의 일부인 꿈은 뒤섞는 것이고, 원망 충족의 위장된 모습이며, 심적 갈등에서 파생된 왜곡이며, 일종의 내적인 부정직이다. 하므로 정신분석 치료의 일반적인 풍경이랄 수 있는, 긴 소파에 편히 누워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말하는 자유연상이나, 심리 치료사들이 최면 요법을 통해 얻어낸 억압에서 풀려난 기억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기억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않고 다양한 자원을 통해 재구성되는 훗날(사후事後)의 허구이므로, 어린 시절에 대한 참된 기억은 얻을 수 없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인간은 아동 시절의 기억을 통해 현재의 자신을 파악할 수 없다. 나의 유년 시절은 나의 원인이 아니라, 현재의 내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프로이트는 환자가 재구성한 여러 감정·환상·공상·욕망을 대상으로 삼지, 외적인 사건 자체를 재구성의 초점으로 삼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런 뜻에서 ‘거짓기억’을 문제 삼는 거짓기억 증후군 주창자들은 프로이트와 같은 편에 설 수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적인 원망과 생각이 말이나 행동의 실수, 우연한 사고, 망각 등의 변형된 형태를 통해 표현되는 셀 수 없이 많은 일상생활의 정신병리를 탐구했다. 그의 공적은 ‘스스로를 속이는 마음의 능력’을 밝혀낸 것으로, 프로이트가 ‘기억 회복 열풍’의 아버지라는 것은 당치도 않는 주장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우리가 확실하고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현실이나 기억이 우리의 믿음만큼 확고하지 않다고 여겼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는 거짓기억 증후군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나쁜 아버지가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로 간주되는 것이 보다 적확”하다.
앞서 말했듯이 『프로이트와 거짓기억 증후군』은 세심히 읽지 않으면, 안 그래도 넘쳐나는 유아 성폭행이나 가족 내 근친 범죄에 대한 방어 논리로 이용될 수 있다. 예컨대, ‘기억은 믿을 수 없다’는 프로이트의 논리가 그렇다. 그 논리가 현행범에게 해당할 리는 만무하겠지만, 범행 시점이 한참이나 흐른 유아 성폭행범이나 근친 성폭행범들에게는 맞춤한 부인 논리가 될 수 있다. 프로이트나 오늘날의 ‘거짓기억 협회’가 환자의 진실을 검증하는 “정말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로 “제3의 인물”에 의한 입증을 거론하고는 있지만, 목격자를 찾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사족이다. 정신분석은 항상 억압을 이야기하지만, 억압이 완전치 못하며, 억압보다 본능(충동)이 더 강하다고 편든다. 억압된 것의 파생물은 증상·꿈·자유연상·일상생활의 정신병리를 통해 조금씩 새어 나온다. 정신분석이 분석하는 것은 억압을 비집고 나온 그런 잉여물이다. 이처럼 불가능한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문명이 억압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만큼 본능(충동)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영국에서 출간된 것은 2000년이다. 그래서 행여 라캉이 나올까 봐 잔뜩 ‘쫄아’서 읽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라캉의 ‘라’자도 나오지 않으니 ‘라라라~’다! 프로이트에 대한 부당한 비난에 맞서야 했던 집필의 목적상, 지은이는 오로지 프로이트에 충실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