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9일
제레미 폭스의 『촘스키와 세계화』(이제이북스, ICON BOOKS 05, 2002)를 읽다. - 한 때는 세계화에 대한 책들이 쏟아지고 세계화를 경계하는 담론도 무성하더니, 요즘은 뜸하다. 부당하고 부조리한 사태가 익숙해지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세계화는 더 이상 화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우리들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원래는 언어학자이지만, 아무도 촘스키를 언어학자로 한정하지 않는다. 미국의 제3세계 외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략, 거대 언론의 여론 조작, 표현의 자유 등 거의 전방위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고, 지원이 필요한 곳에 자신의 이름과 글을 제공하는 촘스키 같은 지식인을 우리는 보편적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전문성을 벗어나, 보편 문제에 개입하는 지식인상을 제시했던 사르트르와 가장 근사한 사람이 바로 촘스키다.
내 컴퓨터에 깔아 놓은 ‘한글과컴퓨터2007’ 버전은 ‘촘’이라고 쓰면 번번이 ‘cha’로 자동 변환되어 버린다. 그걸 다시 한글로 바꾸는 게 귀찮아서 나는 될수록 ‘촘스키’란 이름을 인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 이름이 단번에 호명되지 않는 이런 현상이야말로, 깐깐한 지식인으로서의 촘스키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일이 아닌가?
그에게 학자적인 실증 정신과 모종의 신념으로 무장된 깐깐함이 없었다면, 그 자신이 유대인이면서 미국의 중동 정책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일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촘스키의 부모는 1880~1920년 사이에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에게 “사회주의는 하나의 사회적 강령” 이상이었다고 하며, 나중에 촘스키가 선택하게 되는 자유해방주의libertarianism는 그런 환경으로부터 생겨났다(자유해방주의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라고도 불리며, 아나키즘과 거의 동의어라고 한다).
사회주의 이상과 함께 촘스키의 사유에 영향을 준 것은, 계몽주의와 유대 전통이다. 계몽주의는 촘스키에게 “문화적 변혁의 목적이 권력의 획득이 아니라 정의의 추구”라는 믿음을 주었으며, 유대 전통은 그의 글쓰기에 예언자적 가열함과 원칙성을 불어넣었다. 책 제목이 가리키는 바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일보 직전에, 지은이는 촘스키에 대한 인물평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는 보기 드문 사람이다. •철저한 정확성을 추구하고, 과장되거나 근거 없는 주장을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공식 석상에서 적대와 인신공격을 달게 받는 그의 인간적인 용기 때문에, •젊은 언어학도들이건, 무정부주의자 단체들이건, 또는 책을 쓰는 괴상한 사람들이건 가리지 않고, 흔쾌히 이메일에 답하고, 그들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이처럼 보기 드문 미덕은, 범인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촘스키 “저작 가운데 상당수는 권력에 관한 윤리학”이며, 그가 겨냥한 많은 수의 목표물 가운데는, 전 세계적인 불평등과 빈곤을 가져온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자유해방주의적 사회주의자이자 어린 시절에 미국 도시 실업자들의 빈곤을 목격했던 그는 오래전인 1973년부터 ‘약탈 자본주의’에 대해 반대해 왔다. 약탈 자본주의는 집합적인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능력이 없으며 인간을 시장에 종속시킬 뿐 아니라, ‘경쟁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반인간적이며 결코 용납할 수”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지은이와 촘스키는 똑같이 신자유주의가 세계화를 추동하는 힘이며,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본다. “경제적 세계화의 근거가 되는 이론”인 신자유주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가장 잘 작동시키기 위해서 정부의 간섭, 예컨대 조세와 규제는 철폐되어야 하며, ‘고비를 풀어서’ 시장 스스로 자신의 합당한 자리를 찾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조세와 모든 형태의 정부규제는 자유무역에 대한 침해이다.”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이론의 지도에 따라 “국가단위의 정부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국가 공익사업(보건, 교육, 수송 등등)의 민영화”를 꾀하며 “조세수준을 낮추고, 사기업에 이윤창출의 기회를 제공”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세계화라는 말이 자칫 국제 사회를 이루는 개별 국가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암시하는 듯한 용법이다.
하지만 이 책의 지은이와 촘스키는 “세계화란 사실상 미국의 투자자들과 미국경제에 엄격하게 맞추어 세계경제를 재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명히 밝힌다. 여기에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에릭 홉스봄도 미국이 1970년대부터 세계은행과 IMF를 동원하여 제3세계에 “자유시장 전통, 사기업 그리고 세계 자유무역에 체계적으로 혜택을 부여하는”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식해 왔다고 거드는데, 세계은행과 IMF는 채무를 앞세워 제3세계 국가들의 금융과 산업을 미국과 초국적 기업의 입맛에 맞게 구조조정해왔다(구조조정의 구체적 피해는 74~75쪽에).
20세기의 마지막 10년서부터 세계화는 전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고, 그 결과 개별 국가의 경제적 의사 결정이나 산업 구조에 강대국과 초국적 기업이 ‘초국가적 의사 결정’을 하는 일이 증가했으며, “서구의 중개업자들과 투자자들에게 경제의 관할권”을 넘겨준 제3세계는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 졌다: “안타깝게도, 제3세계의 산업 붕괴와 실직은 세계화를 포함한 세계 자본주의의 결과이다.”
‘누구를 위한 이윤인가?’라고 묻는 이 책은 “세계화라는 조건하에서, 대부분의 이윤은 엘리트 집단, 미국의 투자자들 그리고 미국의 초국적 기업들에 간다”면서, “세계 자본주의는 일반적으로 다수를 위한 장기적인 사회이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수에게 이익”이 된다고 강조한다. 세계화의 희생자는 제3세계의 노동자만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에 있는 공장 소유자들은 리오 그란데를 가로질러서 미국 생산가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멕시코까지 자동차 공장들을 옮겼다.”
“본질적으로 부유층에 기여하도록 고안된 체계”인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전망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이 책의 지은이는 “어쩌면 미래의 전쟁은 각 국가의 부자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그리고 갈수록 장벽이 공고해지는 북반구 선진국가에 잠입해서 일자리를 찾기를 열망하는 남반구에서 온 실직한 불법 이민자들 사이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러면서 자국의 극단적인 빈부 차이를 무마하려는 정치권력과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본가들은 이민자들을 “국민 생활수준에 대한 위협”으로 묘사하고 “인종주의”를 부추기는 여론 조작을 한다.
‘기업에 의한 진리의 통제’라는 문제는 촘스키의 핵심적인 주제로 “이 통제의 문제는 세계화를 통해 해소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세계화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한다: “꽤 오랫동안 촘스키는 대기업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시키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 왔다. 이런 왜곡과 혼동은 한 세기 또는 그 이전부터 시작된, 우리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다. 촘스키는 이런 반복적인 왜곡과 혼돈의 실천을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기업적 대중선전의 성장’으로 묘사한다.”
한 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이지만, 이 책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물론이고, 촘스키가 추구했던 가치들과 논쟁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명료하게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