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7일
스와보미르 므로제크의 『바다 한가운데서/미망인들』(지식을만드는지식, 2008,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0004)을 읽다. - 스와보미르 므로제크는 따금 따금, 한국에 그 이름을 알린 작가다. 내가 그의 작품을 처음 읽게 된 것은 정진수 편역 『현대의 명작 단막 희곡선』(예니, 1984)에 실린 「스트립티스」였고, 한참 뒤에 현대미학사에서 4편의 동구권 희곡을 모아 펴냈던 『탱고 外』(1994)의 표제작이 므로제크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두 편의 희곡을 모은 『바다 한가운데서/미망인들』이 나오기 전에, 그의 손바닥 소설을 모은 『초보자의 삶』(하늘고래, 2006)이 출간됐다. 나는 헌책방에서 사놓았던 이 책을 이번 기회에 읽었다.
『바다 한가운데서/미망인들』 가운데 ‘/’ 앞의 작품은, 바다에 조난당한 뚱뚱이·보통이·홀쭉이가 누구를 식량으로 쓸 것인가를 놓고 논전을 벌인다. 세 사람은 식량으로 쓸 희생자를 지목하기 위한 선거를 하기 전에, ‘나는 왜 희생자로 지명되지 말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재수 없으면 당신도 조난자가 될 수 있으니, 희곡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도, 이 대목은 한 번쯤 읽어둘 필요가 있다.
제일 먼저 유세하게 된 홀쭉이는 “제겐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운운하는 감상적인 연설을 한다. 가족의 가장이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는 나머지 두 사람을 설득시키지 못했다. 두 번째로 연사로 나선 보통이는 “어릴 적부터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면서 “제 요리를 맛보시게 될 분들을 위해 맹세코 최선을 다해 최고의 요리를 만들겠어요. 한 마디만 덧붙이죠. 제 장기는 특히 고기 요리로, 제가 만드는 소스는 그 맛이 상상을 초월합니다”라고 말해서, 뚱뚱이의 환호를 산다. 마지막 연사로 나선 뚱뚱이는 “만약 여러분이 자비를 베풀어 희생자로 나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나를 제외한 나머지 한 사람은 가장 맛있고 기름진 허벅지 부위와 말랑말랑한 허릿살을 먹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저 남은 부위와 혓바닥으로 만족하겠습니다”라고 말해서 보통이의 지지를 받는다.
이 작품에서 뚱뚱이는 민중을 팔아서 권력을 쟁취하는 독재자를, 보통이는 권력에 기생하는 관료나 전문인을, 홀쭉이는 지식인을 상징한다. 홀쭉이는 정의·자유·도덕을 내세우지만, ‘공동체’를 내세우는 뚱뚱이에게 보통이의 지지를 빼앗긴다. 뚱뚱이가 정치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것은, 그가 보통이와 홀쭉이 몰래 송아지 고기를 숨겨 둔 데에서 엿볼 수 있다. 뚱뚱이는 대중의 결핍과 불안을 간파하고, 그것을 선전과 실천의 동력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때문에 보통이는 홀쭉이의 처형 직전에 뚱뚱이가 숨겨두었던 송아지 고기를 발견했지만, 홀쭉이의 처형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두 개의 일화로 구성된 ‘/’ 뒤의 작품은, 불륜을 다룬 희극이면서, 부조리극이다. 카페에서 만난 초면의 두 미망인은, 각각 상대방의 남편이 자신의 숨겨둔 애인이었으며, 두 사람이 결투 때문에 죽은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결투로 죽은 남편들이 진짜 자신들(미망인들)을 독차지하기 위해서나 질투 때문에 결투를 벌였을까? 혹 두 미망인의 남편은 두 미망인 애인 때문에 결투를 벌인 게 아니고, 제3의 애인을 놓고 결투를 벌인 것은 아니었을까? 이 작품에서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생명을 빼앗아 가는 ‘요녀’로 제시되고 있다.
물론 첫 번째 일화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고 있듯이, 이 작품 속의 요녀는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니라, 에로티시즘의 이면을 이루는 ‘죽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미망인 1과 공모한 미망인 2가, 수수께끼처럼 얼굴을 가리고 있는 미망인 3의 베일을 들춰 올렸을 때 작가는 지문에 “그러자 미망인 3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것은 창백한 해골, 즉 ‘죽음의 화신’이다”고 분명히 적어 놓고 있으니까. 하지만 여성이 관습적이고 가부장적인 전통 사회의 교란자로 등장하는 므로제크의 또 다른 작품을 보면, ‘죽음의 화신’으로 해석하기보다 요녀로 해석하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탱고」에서 아더와의 결혼을 목전에 두고 하인 에디와 불륜을 맺은 알라가 그런 존재다.
동구권 지식인들 가운데는 전체주의를 ‘대중의 협력과 동의’라는 관점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탱고 外』에 「도시 재개발 계획」을 싣고 있는 동구권의 대표적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이 그렇고(『탱고 外』가 나왔을 당시 그는 체코의 대통령이었다), 므로제크의 이름을 우리나라에 처음 알린 「스트립티스」가 그렇다. 그러나 「바다 한가운데서」의 뚱뚱이가 보여주었듯이, 전체주의를 얘기하면서 대중의 협력과 동의만 거론하는 것은 전체주의에 내재한 ‘선전과 조작’의 효과는 물론이고 물리적인 ‘강제와 협박’을 고려치 않는 단견이다.
폴란드어 구어체 표현 가운데 “므로제크 작품에 나오는 것처럼”이라는 말이 있다는데, 이 말은 ‘인위적이고, 무의미한 일상’을 지칭할 때 쓰인다. 작가의 이름이 형용사 구실을 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작가의 자랑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39편의 손바닥 소설을 모아 놓은 『초보자의 삶』은 페터 빅셀에 비해 밋밋하다.
사족이다. 내가 20대 때, 대구의 어떤 연극배우가 서울구경을 갔다가, 막 출간된 『현대의 명작 단막 희곡선』을 사왔다. 요즘은 인터넷 서점이라도 있지만, 그때는 지방에서 희곡책을 구하기가 힘들었다(힘든 정도가 아니라, 보여주지 않는 이상, 그런 책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모두들 읽기를 원했지만, 그 배우는 문자 그대로, 우리 눈앞에 책을 흔들기만 하고, 외투 속에 감췄다(그건 잘한 거다. 빌려 주었다면, 어느 누구도 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다들 도둑놈들이었으니까). 그 후로, 대구의 청년들은 서울만 가면 다 이 책을 한 권씩 사왔다(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여기 그 ‘쪼잔한’ 배우의 이름을 밝히고 싶지만, 지금은 지방의 유명인으로 행세하고 있으므로, 당분간 비밀에 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