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일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유문화사, 2009)을 읽다. - 이 작품은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멕시코, 칠레, 아이티, 베네수엘라… 등에서 활약했던 가상의 ‘우익 문학가’들에 대한 가상의 약전略傳이다. 이 대열엔 최소한 두 명의 미국 작가도 포함된다. 어떤 작가는 원고지 3매 분량밖에 안되지만(우루과이 작가 카를로스 에비아), 어떤 작가들은 꽤 길다(아르헨티나 시인 에델리아 톰슨 데 멘달루세, 칠레 시인 카를로스 라미레스 호프만).
‘나치 문학’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는 있지만, 문학 용어로서는 아무래도 생소하다. 나치 사상에 영감을 주었거나 나치 당원들을 고무시킨 문학 작품, 혹은 나치가 권장하고 육성했던 문학이 나치 문학이라고 하면 되겠지만, 거기에 마땅한 작가를 찾기 힘들다. 그 중 가까운 것이 작중에 단 두 번 이름이 언급되는 에른스트 윙거(Ernst Jünger, 1895-1998)일 텐데, 이 책의 역자는 손수 달아 놓은 실존 인물 설명에 “나치 정체를 비난하고 폭력에 맞서 평화와 자유를 역설한 독일의 작가·철학자·역사가”라고 그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윙거와 상당히 다르다.
윙거의 작품이나 그에 대한 본격적 번역서는 아직 없지만, 전진성의 『보수 혁명 - 독일 지식인들의 허무주의적 이상』(책세상, 2001)과 박찬국의 『하이데거와 나치즘』(문예출판사, 2001)에 단편적인 정보가 나와 있다. 박찬국의 책은 하이데거로 하여금 기술문명을 비판하고 ‘흙과 피’를 기치로 했던 나치를 지지하도록 이끈 사람이 바로 이 삼류 문사라고 말한다. 또 전진성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 경험이 윙거로 하여금 ‘서구의 몰락’을 확신하게 했으며, 기술과 신화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근대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론에 몰두하게 했다. 마르크스와 달리 노동자를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혈거시대의 혈거인으로 찬양했던 윙거는, 현대의 기술 문명을 ‘유니폼’처럼 입고 있는 노동자들에게서 근대성이 가져온 모든 불안정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안정과 질서를 보았다. 이런 사유를 가리켜 자유를 역설力說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속에 편편히 흩어진 나치 문학은 여러 가지 특징으로 표현되지만, 가상의 아르헨티나 시인이자 소설가인 실비오 살바티코의 약전에는 좀 더 나치 문학이 추구하는 가치가 구체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그가 10대에 내놓은 제안 중에는 종교 재판소의 부활, 공개 체벌, 국민 체조의 일환으로 칠레인이나 파라과이인들 혹은 볼리비아인들과의 영구적인 전쟁, 일부다처제, 아르헨티나 인종이 더 이상 오염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인디오의 근절, 유대 혈통 시민들의 권리 박탈, 수년에 걸친 스페인계와 인디오들의 무차별적인 혼혈 뒤에 어두워진 국민들의 피부색을 점진적으로 밝게 하기 위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로부터의 대규모 이민, 작가에 대한 평생 보조금 지급, 예술가들에 대한 과세 면제, 남미에서 가장 큰 공군 창설, 남극의 식민화, 파타고니아에 새로운 도시 건설 등이 있다.” 이 목록에서 빠진 것은, 반공산주의, 영웅 숭배, 동성애 혐오, 기독교 이전의 이교적 전통, 열광적인 축구(스포츠) 예찬 등이다.
발상이 그대로 하나의 작품이 되어버린 가상 작가의 가상 약전은, 뒤로 갈수록 점점 흥미를 잃게 된다. 그게 그것처럼 보이는데다가, ‘이 가짜 약전을 뭐 하러 읽어야 한담?’이라는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허구 인물 속에서 실존 인물의 단서를 찾거나, 허구 인물과 실존 인물들이 서로 교호하는 관계를 보고 즐길 수도 있을 테지만, 우리 같은 문외한들에게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계는 제법 큰 세계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에 나오는 우익 작가들은 하나같이 쥐꼬리만 한 재주밖에 없었으니, 당연하게도 문학적으로 성공한 사람 또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보여주는 어두운 교훈은, 나치가 망하고도 ‘나치 문학’의 계보가 쉼 없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사족이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 출간되고 난 1년 뒤에 같은 작가의 작품이 열린책들에서 속속 출간되었다. 그 가운데 볼라뇨가 가장 좋아했다는 『칠레의 밤』에는 “유럽에서 알게 된 가장 순수한 사람은 에른스트 윙거”였다는 한 우익 작가의 회고가 나온다. 이 작품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나치에 영향을 주었던 윙거는 대위 계급장을 달고, 독일군에 점령된 파리를 활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