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5일
W. B. 예이츠의 『예이츠 희곡 선집』(누멘, 2009)을 읽다. - 여기 실린 세 편의 희곡은, 영지주의자이자 신비주의 예언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성좌에서 온 유니콘」은 헌 일가의 두 삼촌(토마스와 앤드류)과 그들의 조카인 마틴 사이에서 벌어지는, 세속적인 성공과 영적 갈구의 갈등을 다룬다. 세속의 성공을 상징하는 토마스는 동생 앤드류가 플루트를 부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조카 마틴의 몽상가적 기질을 억압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틴이 무아경에 빠지고, 마을의 거지들이 마틴을 아일랜드를 해방시켜 줄 구세주로 여긴다. 역자이면서 상세한 작품 해설을 맡았던 조미나는 이 모티프를 지나쳐버렸는데, 피지배에 놓인 민족의 예언자는 종종 민족 해방 투사가 되도록 강제된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 땅에서 태어난 예수가 그랬다.
몰아경에 빠져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마틴은 아일랜드를 해방시킬 구세주로 떠받들여지고, 거기서 잠시 깨어난 그는 삼촌 토마스의 자동차 공장에 불을 지르고, 마을의 거지들과 함께 부잣집 저택을 불태운다(이 장면은 2막 마지막에 암시되고, 3막 첫 장면에서 거지들의 대화로 밝혀질 뿐, 실제로 무대에서 재현되지는 않는다). 그 직후 다시 몰아경에 빠졌다가 깨어난 마틴은 또다시 명령을 내려 달라는 거지들의 요청을 거절한다.
마틴: 지난 밤에 내가 맡은 일이 무엇이었나요? 오, 그래, 큰 저택을 우리가 불태운 기억이 나는군요. 그러나 난 내가 그렇게 했던 때 그 비전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난 그 소명을 올바로 듣지 못했어요. 그 일은 내가 하라고 보내진 그 일이 아니라구요.
포우딘: 일어나요 당장,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명령을 내려 줘요. 당신의 위대한 이름은 당신 앞의 길을 깨끗하게 할 것입니다. 밀짚가리들이 낟가리들이 되기 전에 모든 아일랜드를 해방시킬 분이 바로 당신이지요!
마틴: 들어보세요, 전 여러분을 잘못 인도했다고 설명하려고 해요. 전 이제야 모든 비전을 분명히 받았을 뿐이에요. 저기 누워 있으면서 전 모든 것을 보았답니다. 전 모든 것을 알아요. 불사르고 파괴하러 가는 것은 단지 광란입니다. 외국의 군대와 제가 무슨 일을 할까요? 제가 꿰뚫어야 하는 것은 시간의 야성적인 심장입니다. 제 일은 개혁이 아니라 계시입니다.
마틴은 여기서, 새로운 세기와 세계의 구원은 정치적 ‘혁명(개혁)’이 아닌 정신적인 ‘구도(계시)’에 의해 가능하리라고 본 예이츠의 신비주의적 사상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마틴이 “영국 군대를 무찌르도록 우리를 이끌어”주기를 원하는 대중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우리가 싸워야 할 전쟁은 우리의 마음과의 싸움”이라고 말하자, 곧바로 “배반자”라는 비난이 돌아온다.
예이츠는 이 작품에서 예수와 열심당원들의 갈등을, 마틴과 거지떼들의 갈등으로 치환해 놓았다. 경찰관의 추적을 당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하는 마틴은 명백히 예수를 흉내 내고 있으며, 거지 가운데 한 명인 조니는 유다 역에 충실하다. 그리고 저 구도構圖 속에서, 점점 신비주의에 귀의하게 되는 예이츠는 어디에 서 있었던 것일까?
이어지는 「배우 여왕」은 혁명과 구도라는 화합되지 않는 구도 속에서, 예이츠 스스로가 자신이 선 자리를 석명하는 작품으로 보아 손색이 없다. 주정뱅이자 난봉꾼이면서 시인이자 극작가인 작중의 셉티머스는 예이츠의 분신으로, 현재의 세계를 “비기독교적”이라고 힐난하면서, “난 유니콘에게 인류를 짓밟아서 멸망시키고 새 인류의 탄생”을 낳게 하겠다고 장담한다.
앞서 읽었던 「성좌에서 온 유니콘」은 아일랜드를 무대로 했을 뿐 아니라, 마틴의 두 삼촌인 토마스와 앤드류 형제를 이복형제로 설정한 탓에, 저절로 아일랜드와 영국의 대결을 연상하게 된다. 예컨대 아래의 설전은, 예이츠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상황을 선명하게 드러냈던 경우다.
앤드류: (…) 넌 항상 나를 규칙적으로 일하고 동료도 없이 밤낮 지내게 하고 일 이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해. 내가 일을 원했어? 나는 산중에서 한때 황금요정을 보았어. 난 다시 그 요정을 만나고 싶어. 그 요정으로부터 풍요를 불러오고 싶어. 그러나 넌 내가 일에 꼭 붙들려 있게 만들어.
토마스: 오, 모두 배은망덕한 것들이로구만! 너도 내가 네게 얼마나 자비를 베풀어 주었는지 잘 알지. 너를 정상적이고 존경받는 인생을 살도록 널 이끌어 주었어.
앤드류: 넌 한 번도 고대의 양식을 존중해 본 적이 없어. 넌 어머니를 닮았어. 어머니 가계의 영국 혈통이 너무 섞여서 지나치게 섬세하고 우둔하지. 마틴은 나처럼 헌 계야. 그건 그 애가 너그러운 마음씨를 지녔다는 의미야! (…) (앤드류는 플루트를 불기 시작한다)
토마스: 난 너를 여기서 내쫓아버릴 테다! 너와 이 더러운 패거리들을! 난 그들을 감방에 처넣을 거야.
앤드류와 토마스의 설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영성의 문화를 간직한 아일랜드를 억압하는 영국의 물질문화다. 저런 구도 속에서라면 예이츠는 언제나 쉽게 아일랜드를 지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신비주의 성향은, 아일랜드라는 민족주의적 테두리에 안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이츠에게 지난 2000년 동안의 문명은 기독교 문명이자 남성 중심의 주기였다. 하지만 기독교?남성 중심의 2000년이 끝나면, 남녀양성구유의 신성 시대가 도래한다고 보았고, 자신은 새로운 시대를 목전에 할 2000년 주기의 마지막 세대에게, 도래할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전하는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맥락에서라야 우리는 「성좌에서 온 유니콘」에서 마틴이 했던 “외국의 군대와 제가 무슨 일을 할까요? 제가 꿰뚫어야 하는 것은 시간의 야성적인 심장입니다. 제 일은 개혁이 아니라 계시입니다”라는 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 마틴의 적은 아일랜드를 점령하고 있는 영국군이 아니라 오로지 기독교?남성 중심의 2000년, 즉 암흑의 ‘시간’인 것이다(하므로 마틴은 예수가 아니라, 새로운 세기와 문명을 알리는 ‘세례 요한’으로 죽는다).
「배우 여왕」의 술주정뱅이이자 난봉꾼이었던 셉티머스는 마틴과 같이 ‘기독교 시대’의 끝을 알리는 예언자이긴 하지만, 백성들을 가나안에 인도하고 정작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못했던, 모세 같은 존재다. 그는 여왕으로 등극하는 아내에게 추방 선고를 받게 된다.
데시마 : 그가 명령을 어기면 사형 조건으로 그를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해요. 그는 제게 아주 못된 짓을 저지른 걸요. 나는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요.
마지막에 실린, 「고양이와 달」은 장님 거지와 절름발이 거지의 우화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작품이다. 성자의 샘을 찾아가던 두 사람 앞에 성자가 나타난다. 성자가 두 사람에게 묻는다. “치유를 받고 싶은가 아니면 축복을 받고 싶은가?” 영성을 볼 줄 모르는, 문자 그대로의 장님 거지는 ‘치유’를 선택하고 눈을 뜨게 되고, 절름발이 거지는 ‘축복’을 선택한다.
역설적이게도, 눈을 뜬 장님 거지는 치유 대신 축복을 선택한 절름발이 거지가 볼 수 있는 ‘성자’를 보지 못한다. 눈뜬장님 거지는, 성자 대신 훔치기 좋은 이웃 마을의 닭과 거위를 보게 되고 주먹으로 쳐야 하는 상대방(절름발이 거지)의 급소를 보게 된다.
눈뜬장님 거지가 절름발이 거지를 흠씬 두들겨 패고 사라지자, 이번에는 성인이 옛날에 장님 거지가 그랬듯이 절름발이 거지의 등에 올라탄다. 지팡이를 짚은 절름발이 거지가 성자를 등에 태우고 쩔뚝이며 걷자, 성자가 ‘춤을 추라’고 명령한다. 절름발이 거지가 의아해서 묻는다. “그러나 어떻게 춤을 추나요? 전 절름발이가 아닌가요?” 처음에는 서툴게 시작했으나, 점점 빨리, 절름발이 거지는 지팡이를 버리고 자유롭게 춤을 추게 된다. 축복을 받은 거지는 달빛이 내리는 벌판에서 노래한다.
미나로쉬는 달빛 어리는
풀밭을 이리저리 기어 다니네.
하늘 높이 성스런 달은 초승달이라네.
미나로쉬는 그의 눈동자가
보름달에서 초승달로,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변화에서 변화로 이어지는 것을 알까?
미나로쉬는 풀밭을 헤치고 홀로 뽐내며,
지혜를 가지고서
그의 변하는 눈동자로
변모하는 달을 우러러보네.
미나로쉬는 고양이 이름이다. 달과 고양이는 서로 친척일 뿐 아니라(“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기어 다니는/ 고양이는”), 성性이 같다. 달과 고양이는, 하늘과 땅의 ‘여성’이다. 예이츠는 이 작품에서 다시 한 번, 남성과 기독교가 지배했던 2000년 동안의 암흑기를 달과 고양이라는 여성 원리를 통해,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