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3일
윌리엄 마치의 『배드 시드 The Bad Seed』(책세상, 2009, mephisto18)를 읽다. - 솔직히 말해 이 책을 읽기 이전에는, 윌리엄 마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럴 때, ‘표4’에 적힌 출판사의 광고 문구가 독자에게 용기를 준다:
스티븐 킹이 최고의 악당으로 꼽은, 여덟 살 사이코패스 로다
백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엑소시스트>, <오멘>, <오펀>의 원형이 된 고전 스릴러의 걸작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나 같은 속물은, 기원이나 원형이란 말만 나오면 사족을 못 쓴다. 기원에 대한 지식이나 설명은 속물 지식인의 장기이자, 기원을 설명하는 능력이야말로 이들이 가진 알량한 권력의 원천이다. 그러니 “사이코패스”의 원형이란 문구에 어찌 무심할 수 있단 말인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요즘엔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되려면 소시오패스sociopath(반사회적 이상성격자)나 사이코패스psychopath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이 발표된 1954년이라면 얘기는 상당히 달라진다. 내가 장르문학에 밝지 않을뿐더러 18세기 후반부터 출현했던 영어권의 고딕소설Gothic novel에 대해 아는 게 없기 때문에, 옮긴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자면 『배드 시드』의 여덟 살내기 소녀 연쇄살인범 로다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로다는 일곱 살 때 첫 번째 살인을 했다. 같은 아파트에 살던 노부인의 수정 구슬을 갖고 싶어서, 노부인을 아파트 계단에서 밀쳤던 것이다. 그리고 경쟁자가 차지한 펜맨십 메달(펜글씨 쓰기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학생에게 주는 메달)을 빼앗기 위해 동급생을 물에 빠트려 죽였다. 마지막 살인은 자신의 범죄 행위를 눈치챈 아파트의 관리인을 불에 태워 죽인 거였다.
로다의 어머니인 크리스틴은 로다의 두 번째 범행을 통해 첫 번째 범행을 유추하게 되지만, 딸을 고발할 수 없다는 모성애로 갈등하는 중에, 로다의 세 번째 범죄를 눈 뻔히 뜨고 방기하게 된다. 『배드 시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린 딸의 천부적 범죄성을 할머니로부터 유전된 것으로 설명한다. 크리스틴은 딸의 불가해한 범죄를 이해하려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어머니 베시 덴커가 스물세 명이나 죽인 희대의 연쇄 살인마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므로 이 소설은 소녀 연쇄살인범의 탄생기이면서, 정신적 외상을 당해 유아기의 기억을 망각하고자 했던 또 다른 주인공의 자기 정체성과의 대면이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진다.
약력에 따르면 윌리엄 마치는 그 자신이 상당한 정서적 장애를 안고 있었던 인물로, 자기 치료를 위해 프로이트·융·아들러를 탐독했다고 한다. 작중엔 프로이트에게 직접 정신분석을 받고자 빈에 가기도 했다던 모니카 부인을 묘사하면서 “정신분석 이야기는 그녀에게 결코 질리지 않는 화제였고, 앞으로도 지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어쩌면 그것은 작가의 실생활이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이유들로,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꽤 자주 정신분석을 화제로 삼는다.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곳은, 빈으로 자신을 찾아온 모니카 부인을 상담하고 나서 프로이트 박사가 “그녀의 독특한 성격은 자신의 능력 밖이니 런던으로 가서 자신의 제자인 애런 케틀바움을 만나보도록 권했다”는 대목이다. 애런 케틀바움은 작가가 만든 가공인물로 보이는데, 프로이트가 모니카 부인에게 손을 든 이유가 솔깃했다: “프로이트 박사는 19세기 물질주의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시야가 좁아진 것 같아. 게다가 그분은 미국 여자, 특히 독립할 만한 능력이 있고 남자와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여자를 질색했거든.”
위의 인용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프로이트의 분석틀이 ‘독립적이고, 남자와 대등한 미국 여성’에 대해서는 먹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가부장 사회를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 사회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하므로 구대륙의 가부장적 모델을 경험하지 못했던 미국 여성, 그것도 정신분석을 받겠다고 남편을 미국에 떼어 놓고 혼자 빈을 찾아온 모니카 같은 맹렬 여성 앞에 프로이트는 속수무책이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저 대목은 정신분석에 심취했던 작가가 무심코 내뱉은 것일까? 아니면 내가, 이제부터 침소봉대하려는 것일까? 로다가 어리긴 하지만, 분명 두 ‘미국 여성’의 범죄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에서 윌리엄 마치는, 미국 여성에겐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적 리비도’로 설명되지 않는 다른 리비도가 있다고 주장하려는 듯하다. 특히 작가는 여성 범죄자의 공통점을 설명하는 172~173쪽에서 이렇게 말한다 : “[여성 연쇄살인범들은] 우리가 살면서 빈번하게 느끼는 감정적이고도 충동적인 이유 때문에 살인을 하는 법은 없다. 또 분노나 질투, 사랑의 좌절감뿐 아니라 복수심마저 느끼지 못하기에, 격정에 휘말려 살인하는 법도 없다. 이들에게는 성적인 잔인함 같은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살인을 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억제할 수 없는 소유욕을 해결하고자 돈이 필요해서, 그리고 안전이 위협받을 때 그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여성 연쇄살인범에게 성적인 요소는 없다. 그들의 범죄 동기는 전적으로 ①소유욕 ②돈 ③안전을 위해서다. 앞으로 하는 말은 좀 더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지만, 윌리엄 마치가 든 세 가지 동기가 남성의 범죄 동기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성들의 범죄는 항상 사회 속에 자리를 찾는다(찾을 수 있다). 까닭은 남성의 범죄를 추동하는 것이 바로 그의 권력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성 연쇄살인범들의 대표적인 범죄인 여성 살해는 흔히 성적으로만 해석되지만, 남성의 성범죄 역시 남성 범죄자의 사회적 위치나 권력 실추가 더 본질적이다.
반면 윌리엄 마치가 나열했던 ①소유욕 ②돈 ③안전은 딱히 사회적 위치나 권력이 문제되지 않고서도, 벌어질 수 있고, 설명될 수 있는 범죄다. 오로지 물욕 때문에 무려 스물세 명의 친인척을 살해했던 베시 덴커의 범죄는, 그녀의 외손녀인 로다가 수정 구슬과 우수학생 메달에 대한 소유욕으로 인해 벌였던 두 차례의 범죄처럼, 사회(혹은 기표) 속에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사회 속에서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범죄. 그래서, 여성의 범죄는 더 분석하기 힘들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권력이나 도덕 따위의 기표를 충실히 의식하는 것은 남성이지, 여성이 아니다. 까닭은 남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가부장 사회에서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의 악동질은 그저 어른이 되기 전에 행하는 사회입사 형식일 뿐이다. 하지만 여성의 악은 사회입사 형식도 치르지 못한 채, 더 길게 온존한다. 내친김에, 소년의 악동질보다 더 길게 남아 있는 여성의 악이, 아이를 낳으면서 다른 악, 즉 ‘모성’으로 변한다고 말하면 지탄을 받을까?
엔도 슈사쿠의 『모래꽃』과 루스 렌들의 『유니스의 비밀』을 다시 읽고 싶다. 원래 범죄란 일상에서 벗어난 ‘극한 행동’이다. 그러나 두 작품의 여주인공들은 범죄라는 극한 행동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으므로, 기표를 초월한, 혹은 기표로부터 추방된 여성 범죄자들의 비참함을 더욱 명료하게 드러낸다. 또 극한 행동이기 때문에, 범죄에는 희미하나마 ‘영웅적’인 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도 기표라면 기표일 것인데, 『모래꽃』에 나오는 오고치나 『유니스의 비밀』에 나오는 유니스와 조안은 범죄의 고유한 성질인 그 희미한 빛마저 앗아간다. 남성 범죄자에게 마련되는 영웅의 자리가, 여성에게는 예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성은 자신들의 범죄조차 타락시킨다(『모래꽃』의 독후감은 『독서일기』 4권, 39~44쪽에, 『유니스의 비밀』의 독후감은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06~110쪽에).
사족 1. 『배드 시드』를 읽은 독자는 반드시 도리스 레싱의 1988년작 『다섯째 아이』를 읽어야 한다(이 소설에 대한 독후감은 『독서일기』 5권, 267~269쪽에).
사족 2. ‘mephisto’는 책세상에서 새로 기획한 장르문학 선집이다. 이 선집의 11번은 마이클 터너의 『포르노 작가의 시』. 이 책에 대한 정보를 보려니까 모두 ‘19금禁’으로 처리되어 있다.
사족 3. 이 독후감의 맨 앞에, 이 책의 표4 광고문안의 일부를 인용했다. 내가 했던 인용에 이어 광고문안은 ‘작품 요약, 작중 인용, 언론 발췌’로 이어진다. 하지만 내가 편집자라면, 앞선 인용에 이어, 작중에서 찾아낸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당히 편집해서 쓰겠다: “아이들이 종종 살인을 저지르는데 간혹 그 방법이 아주 교묘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나중에 악명을 떨치게 되는 살인자의 일부는 대개 어린 시절부터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치 걸출한 시인이나 수학자 혹은 음악가들이 일찍이 천재성을 보여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