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일
니콜라이 고골의 『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웅진씽크빅, 2010, 펭귄클래식64)을 읽다. - 표제로 나란히 늘어선 세 편의 중편과 한 편의 희곡은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출판사에서 중복 번역되어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내가 펭귄클래식으로 나온 이 작품들을 다시 읽게 된 것은, 펭귄북스에 원래 실려 있었던 서문을 읽기 위해서다. 『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만 아니라, 나는 벌써 네댓 권의 펭귄클래식을 샀는데, 그건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다시 읽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원서에 딸려 있었던 편집자의 서문을 읽고 싶은 욕심에서다.
최근 여러 출판사에서 다투어 ‘세계문학전집’이라는 전집물을 내고 있다. 그런데 그 전집물 속엔 자격이 되지 않는 역자도 꽤 있다. 전공자가 없다면 모르되, 전공자를 뻔히 놓아두고 문외한들에게 번역을 의뢰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처사다. 나아가 사정이 있어 전공 번역자를 구하지 못했다면, 해설만큼은 전공자의 글을 싣는 성의를 보여주어야 할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선택의 여지가 있을 때, 즉 같은 번역본이 있을 때는 언제나 펭귄클래식을 독자들에게 권하는 중이다. 말하자면 작품을 다 읽고 나서, 그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연구자의 안내를 받아 보라는 것이다(그런데 이 전집에도 어쩌다 원서의 서문 대신 번역자의 해설을 대신 한 게 있다. 영문은 잘 모르겠지만, 펭귄클래식 코리아는 자신의 장점을 유지해야 한다).
이 책에 서문을 쓴 로버트 맥과이어는 고골의 작품은 장르와 상관없이 “외면상 단순한 플롯”을 활용한다면서, 그 이유를 고골 문학의 본질인 목가牧歌에서 찾는다. 산문이나 시로 쓰인 목가 문학은, 온화한 아름다움과 순수한 평온이 깃든 시골 풍경을 묘사하고 단순한 행복 이야기를 전한다. 마치 긴 겨울밤 마을에서 들은 이야기를 재연하는 듯한 화자의 존재나 역할이 분명한 정형적인 인물의 반복적인 등장은, 고골의 목가적 경향을 두드러지게 해준다. 하지만 표제에 나온 세 편의 중편을 읽어 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저 작품들은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무대로 하고 있으며, 편집 관례상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로 묶인다. 대도시가 무대인 것이다.
시골 목가에서는 사람들이 우주에 대해 열려 있으며 인간 사회와 자연이 소통할 수 있다는 느낌이 있으나, 이 도시에서 자연은 적으로 간주되고 도시는 자연에 대적해 지켜야 할 것으로 그려진다. 이곳에서 인간들은 아무런 영적인 갈구 없이 파티로 지탱하고 있으며, 인정 욕망이라는 한정된 열망의 조건 안에 갇혀 있다. 서문의 일 절을 인용한다: “도시와 목가는 정반대 지점에 서 있다. 페테르부르크는 고골이 자신의 작품들에서 그려온 몰락해 가는 목가의 마지막 결과물이며, 그럼으로써 작가에게는 현대 사회의 으뜸가는 상징으로 작용한다.”
흥미롭게도 로버트 맥과이어는 서문에, 1824년 11월 대홍수가 묘사된 푸시킨의 「청동 기마상」(『청동 기마상』, 열린책들, 2001)을 거론하면서 “자연이 마음껏 파괴력을 발휘하는 홍수의 형태로 복수를 가하자 도시 자체가 어둡고 난폭하며 흉포해지다 못 해 악마적인 기운까지 띠게 된다.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바로 이러한 해석이 러시아 문학에 각인되어 오늘날까지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고골의 소설들도 이를 확장하고 심화시킨다”고 썼다. 이 대목에 따르면, 푸시킨이나 고골뿐 아니라 많은 러시아 문학가들은 도시를 목가의 정반대 지점으로 상정하고, 항상 기만이 벌어지고 인간성이 몰락하는 감옥으로 묘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이 왜 도시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시베리아에서 재생을 다짐하게 되는지 확연히 알려주는 구절이다.
고골의 작품을 더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시골을 무대로 하는 그의 작품들은 자연의 경이로움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소망과 공동체 생활의 화합을 역설한다고 한다. 그런데 서문을 쓴 이는 목가처럼 시작한 이 부류의 작품들마저도, 머지않아 공동체의 결함을 드러내게 되고 좌절한 주인공이 고독 속에서만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면서, 고골에게서는 ‘왜 목가가 무너져 내렸는가?’라는 문제의 답을 찾고자 한다. 로버트 맥과이어는 문제의 답을 아주 쉬운 곳에서 찾았다. 시골의 소읍이 무대였던 고골의 희곡 「감찰관」을 예로 들면서 외부의 침입자가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고골의 세련된 소설 속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행위자는 대개 내부자”라는 것이다. 즉 “공동체든 개인이든 그들은 스스로 파멸을 부르는 씨앗을 틔워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에서 일관되게 찾을 수 있는 희생자들의 자기 고발적인 성격은, 서문을 쓴 이의 해답이 크게 엉뚱하지는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고골 시대에 더 이상 목가가 가능하지 않은 이유를 내부자나 파멸을 부르는 씨앗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폐쇄적이고 환원적이다. 그래서 파멸의 씨앗이 자라나게 된 시대적 배경을 고골에게서 직접 들어보고 싶어진다. 게오르기 프리들렌제르가 쓴 『리얼리즘의 시학』(열린책들, 1986)에는 고골이 자신의 시대에 대해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어 있다: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오래전에 변했다. 지금은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고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두드러지고 다른 사람을 능가하고자 하는 노력, 무시와 경멸에 대해서 복수하고자 하는 노력이 보다 강하게 극을 옭아매고 있다. 지금은 사랑보다도 전기업에 종사하는 관리, 화폐자본, 유리한 결혼이 보다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68쪽) 그것이 고골이 살았던 시대의, 새로운 법칙이었다.
고골이 살았고, 그의 소설이 그려내는 세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은 높은 관등을 얻으면 그만큼 행복해질 거라는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고골은 자신의 인물을 소개할 때 반드시 관등을 명기한다. 이것은 러시아의 관료적인 성격과 인위적인 도시생활을 생생하게 드러내 주는 장치이자, 고골의 주인공들이 ‘작은 인간’들임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하위 직급의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결혼 시기를 넘긴 독신남이라는 것이다. 서른여덟 살의 8등관 코발료프(「코」), 쉰 살이 넘은 영원한 9등 문관 아카키 아카키예비(「외투」), 마흔두 살 된 또 한 사람의 9등 문관 아크센티 이바노비치(「광인일기」). 그들이 노총각(?)인 것은 이들의 욕망이 관등이라는 인정 욕망만을 향해 똑바로 조준되어 있으며, 성 본능 따위를 잊게 할 만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 뜻에서 이들은 관료 사회의 희생자라고도 할 수 있지만, 결코 완전한 인간은 못된다고도 볼 수 있다. 즉 직위가 바뀌면 이들 역시도, 자신을 못살게 했던 상관과 똑같은 인물로 표변하는 것이다. 이들 하급 관료들의 이중성은 「코」와 「광인일기」의 주인공들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모습에 잘 묘사되었다.
「외투」가 관등이 물신화된 사회의 비애로 끓는 얘기였다면, 「감찰관」은 물신화된 관등이 벌이는 희극이다. 한 시골 소읍에 암행 감찰관이 온다는 소문이 퍼지고, 페테르부르크에서 빈둥대다가 고향으로 내려가던 홀레스타코프라는 젊은 허풍쟁이가 감찰관으로 지목된다. 그러자 군수에서부터 재판소장, 자선병원장 등 온갖 관료들이 젊은 허풍쟁이에게 뇌물 공세를 퍼부으며 아첨 경쟁을 벌인다. 시골 관료들과 유지들은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허풍쟁이 젊은이에게 실컷 농락당하고 금전을 갈취당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창피스러운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란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고골의 「감찰관」에 대한 두 개의 공통된 언급을 인용해 둔다: “고골은 우선 전통적인 희극에 고유한, 복잡하게 얽힌 사랑이나 결혼으로 맺어지는 사건 전개에서 탈피했다. 고골은 한결같이 사랑에 골몰해 있는 주인공들과 그들의 행복한 결혼으로 끝나는 희극들은 현실과 동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폰비진 외 4인, 『러시아희곡 1』, 열린책들, 1998, 13쪽), “고골 극예술의 특징적인 구조적 모멘트들 중의 하나는 극적 플롯의 중심적이고 전통적인 매듭으로서의 사랑의 슈제뜨[소주제]에 대한 그의 거부였다. 고골은 러시아에서 신분과 자본의 전류電流가 사랑 못지않게 강력한 극적 행동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이해했던 최초의 인물이었고 여기에 고골의 위대한 역사적 공적이 있는 것이다.”(게오르기 프리들렌제르, 『리얼리즘의 시학』, 295쪽).
사족이다. 납득하고자 한다면, 비전공자가 능력에 부치는 해설을 쓰고 맥을 놓은 일쯤, 충분히 이해된다. 진짜 문제는 전공자가 아무런 관점이나 이해도 나타내주지 못하는, 한심한 해설을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