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9일
오스카 와일드의 『어니스트 놀이』(동인, 1998, 현대영미드라마학회 영한대역 9)를 읽다 -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가운데 가장 재미있고,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 앤드루 샌더즈의 『옥스퍼드 영문학사』(동인, 2003)는 이 작품이 “참으로 정전으로서 부동의 지위”를 부여받았다면서 “『햄릿』 이후로 무대에 오른 영어극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극”이라고 말한다. 원제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를 이 작품의 다른 번역본이나, 방금 언급했던 문학사 혹은 오스카 와일드의 평전 등에서는 ‘진지함의 중요성’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작품을 읽어보면 ‘어니스트 놀이’가 훨씬 마땅해 보인다.
오스카 와일드는 출세의 전략으로 상류사회를 조롱하는 것을 택하기는 했으나, 계급의식이 있지는 않았다. 『어니스트 놀이』 역시 작가의 그런 성향을 잘 드러내주는 희곡으로, 작중의 중요 모티프인 ‘번버링Bunburying'이 상류사회를 조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시골에 살고 있는 상당한 재산가 존 워딩(잭)은 런던에 ‘어니스트’라는 이름의 남동생이 있는 것처럼 꾸며 놓았다. 또 런던에 살고 있는 그의 친구 알저논 몽크리프는 시골에 자신이 돌봐주어야 하는 ‘번버리’라는 피후견인이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잭과 알저논이 실재하지도 않은 남동생과 불치병에 걸린 피후견인을 만들어 놓은 이유는, 그만큼 상류사회가 질식할 듯한 예의범절과 엄격한 가식에 차 있기 때문이다. 즉 두 사람은 도시와 시골에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별 의미 없고 절차로 가득한 상류사회의 공허함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보기에 번버링은 상류사회 인사들의 탈출구일 뿐 아니라, 그 일에 능한 상류사회 인사들 전체를 자기기만에 빠진 ‘번버리스트Bunburyist'로 간주한다.
가상의 인물은 항상 연극을 뒤죽박죽된 희극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종내는 갖은 오해가 풀리면서, 일상 밖을 떠돌던 것처럼 보이던 인물들은 사회로 복귀하고, 비일상적인 사건은 기존의 가치로 통합된다. 잭과 알저논이 형제라는 것이 밝혀지고, 두 사람 모두 혼사 장애를 극복하고 바랐던 약혼녀를 갖게 된 행복한 결말이 그러하다. 그런데 두 사람의 약혼자 얻기는 그들의 세례명이 ‘어니스트Earnest’였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함으로써, 그들의 약혼자 얻기 놀이에 숨은 부정직한 속성이 두드러지게 된다. 바로 그 역설이 빅토리아 시대의 윤리 강령인 ‘정직’을 조롱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앞서 오스카 와일드의 출세 전략을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작가의 상류사회나 빅토리아 도덕에 대한 조롱은 아무도 희생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다. 까닭은 오스카 와일드의 사회 풍자가 철저히 언어에 기반하며, 놀이 정신에 철저하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작품이 그렇듯이 『어니스트 놀이』에도 숱한 경구가 나오는데, 이 경구들은 상류사회를 때리는 진짜 주먹이 아니라, 무해하고 유쾌한 ‘말 펀치punch’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결혼 생활에서 세 사람은 좋은 짝이 되지만, 두 사람은 불편하다’는 따위의 경구들…
오스카 와일드가 상류사회의 무해한 재담가였다는 사실은, 볼프 슈나이더의 『위대한 패배자』(을유문화사, 2005)에 몇 차례 언급되어 있다. 오래전에 심심풀이 삼아 읽었던 이 책에는 “살롱에서는 그의 경구를 돌려가며 읽었다”거나, “상류사회를 은근히 조롱하면서 상류층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지적 광대’ 역할에 치중했다”는 평이 나온다. 이런 평은 좀 더 객관성을 취하고자 했던 『옥스퍼드 문학사』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되는데, 앤드루 샌더즈는 작가로서의 오스카 와일드보다 비평가로서의 오스카 와일드를 더 쳐주는 느낌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은 오스카 와일드의 만용이 자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패배자』와 『옥스퍼드 문학사』는 똑같이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어니스트 놀이』의 주인공 알저논의 논리로, 추락을 선택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의도를 설명하자면, 그것은 ‘가족의 도리와 사회가 주는 의무감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번버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