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8일
조정환·정남영 외 7인의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갈무리, 2007)을 읽다. - 헌 책방이 아니었다면 이 재미난 책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은 가라타니 고진이 한국 문단에 던진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다중네트워크센터의 고민과 대답이 담겨 있다. 다중네트워크센터의 대표 조정환은 1989년 초, <노동해방문학>의 주요 창간 인사이자 대표적인 사회주의 문학 이론가였다. 조정환이 이 책에 실은 두 꼭지의 글과, 이 책에 한 꼭지씩의 글을 보탠 8명의 필진과 함께한 좌담을 보건대, 조정환은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안또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의 ‘제국-다중’ 이론에 낙착한 것 같다.
문학의 종언에 대한 소문은 가라타니 고진이 한국에 알려지기 훨씬 이전인, 1990년대 초부터 한국 평단에 출몰했다. 시인이면서 평론가인 정한용의 잘 알려지지 않은 평론집 『지옥에 대한 보고서』(시와 시학사, 1995)에는 1990년도 초엽의 문학위기 담론을 정리하고자 시도했던 「문학위기의 담론들을 넘어서」가 수록되어 있다: “문학이 현실의 여러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해결 방법을 모색할 수 있었던 황홀했던 시절은 근대문학의 형성과 함께 끝났다. 그렇다면 지금 문학은 어떻게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가. 교훈성이 제거되었다면, 이제 문학은 오락성으로만 버티어 가야 하는가.” (103쪽)
인용문은 문학의 위기를, 문학이 사회 계도적이고 실천적인 임무를 완료하면서 오락물로 떨어지게 된 사정에서 찾는다. 문학의 위기에 대한 이와 같은 진단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 종언론에 거의 근접한다. 단지 우리가 아직 촌스러웠기 때문에(시야가 좁았다는 뜻), 근대문학의 종언을 ‘문학과 (민족) 국가 만들기’로 함께 엮어 설명하지 못했다. 푸코의 지식권력과 유사한 발상 선상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 문학의 융성을 ‘문학이 민족 국가 만들기에 관여하고 기여’했던 영광으로 파악하며, 민족 국가의 완수와 함께 근대문학 또한 종언한 것으로 본다.
이상과 같은 근대문학 종언론에 대한 한국 평단의 반응은,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된다. ①한반도에는 통일된 민족국가가 아직 만들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종언론은 우리나라에 해당하지 않는다. ②문학이 국가 만들기와 결별함으로써, 한국 문학도 비로소 근대적·미적 자율성에 매진할 수 있게 됐다. ‘근대문학의 종언’ 사태는 문학의 진정한 시작이다.
분명코 ①은 민족문학 진영의 논리고 ②는 자유주의 문학 진영의 논리다. 그런데 다중네트워크센터의 논리는 또 다른 ③의 논리를 편다. 이들의 논리 가운데 우선 짚어볼 사항은, 다중네트워크센터가 자신들의 논리 일부를 ①과 공유한다는 점이다. 조정환은 이 책에 글을 실은 필자들과 함께했던 좌담 「근대문학의 종언과 종언 이후의 문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네이션-스테이트가 이미 완성되었다는 판단은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분단되어 있는 한반도에 대해 국민국가의 완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고 또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동구에서는 기존의 네이션-스테이트들이 균열되어 작은 에쓰닉ethnic 집단으로 찢어진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과는 다른 지점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의 조건을 찾아야 한다고 봐요.” (50쪽)
조정환은 한반도에서는 아직 민족 국가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①의 논리를 공유하면서, 거기에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이후 동구에서 숱한 가상의 민족 국가가 분열하고 분쟁하는 예를 더한다. 그러면서 연이어, 근대문학이 종언을 맞게 된 다른 원인을 제시한다: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국가 수준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그것들을 사회적으로 규정하는 주체성의 층위에서의 변화입니다.”
다중네트워크센터의 이론가인 조정환은, 근대문학의 종언이 민족-국가가 세계 각지에 확립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네이션의 동일성’을 상상적으로 만들어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기보다, “네이션-스테이트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주체집단이 사라”(93쪽)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민족-국가가 ‘제국’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민족/국민을 통해 권력을 추구하던 민중적 동일성 자체가 해체되었고, 그 때문에 근대문학의 위기가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혹자는 ‘민족/국민’과 ‘민중적 동일성’이 같은 말이 아니냐는 의문도 가질 법하다. 하지만 민중적 동일성은 민족/국민을 목표로 하긴 하지만, 거기에 포섭되지 않고서도 구성될 수 있는 저항적 주체를 뜻한다.
문제는 민족-국가에서는 비교적 쉽게 정체성과 연대성을 가지고 저항적 주체 역할을 했던 민중적 동일성이, 민족-국가가 제국으로 흡수되어가는 ‘제국의 시대(세계화 시대)’에는 ‘다중’으로 흩어져 정체성과 연대성을 갖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예컨대 근대 민족-국가의 대표적인 헤게모니 계급이었던 산업 노동자들이 지식 정보화 시대의 파편화되고 유동적인 개체로 형해화되면서, 민중적 동일성을 유지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계급과 욕망을 파악하기 쉬운 균질한 집단이 민중이었다면 다중은 일사불란한 주체가 아닌데다가, 오히려 민족-국가 아래서 민족/국민에게 오랫동안 억압당하거나 소외되어 왔다. 실업자, 여성노동자, 외국인, 이중 국적자, 양심적 병역기피자, 동성애자 등의 비국민과 하위 주체들이 바로 그들이다. 민중이 없는 시대에, 어떻게 새로운 민중으로서의 다중을 저항의 주체로 발굴하고 연대시키며 제국에 대항할 것인가가,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에 문학이 가야 할 길이다. 근대문학의 위기 해결은, 전통적인 민중이 다중으로 변신한 시대에, 다중을 얼마만큼 잘 포착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게 다중네트워크센터의 결론이다.
이상이 거칠게 요약해 본 다중네트워크센터의 종언가終焉家에 대한 대응으로, 여기엔 안또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의 ‘제국-다중’ 이론이 상당히 함유되어 있다. 조정환과 정남영의 이론적 시론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2000년대 이후에 발표된 한국 문학 작품을 대상으로 한 작가론과 작품론이다. 이 글들을 쓴 필자들은 하나같이, 2000년대에 등장한 젊은 작가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감각성·다중성·상상·익살·수다·유머·해학·아이러니·자아분열 등의 새로운 감수성과 기법으로부터, 다중 시대의 징후를 포착하고자 한다. 젊은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새롭고 낯선 감수성은 민중 시대에 억압되었던 감수성이자, 다중을 포착하려는 기법이라는 것이다.
문학을 거시적으로 설명하려는 거시 이론은 1990년대 중반에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은 조정환이 창간 인사로 참여하기도 했던 <노동해방문학>의 폐간이나 IMF 이후의 급격한 세태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 뜻에서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은 거시 이론의 복귀라고 할만하다. 본격적인 작품 비평이 더욱 풍성해지면, 이 책의 이론적 시론도 더욱 정교해 질 것으로 생각된다.
사족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종언론을, ‘근대’ 문학의 종언으로 볼 것인지, ‘문학’의 종언으로 볼 것인지는 아직 불씨로 남아 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이 쩨쩨하게 ‘근대’ 역사의 종언이 아니었듯이, 가라타니 고진에게 역시 ‘근대’란 그저 문학 앞에 붙여진, 사소한 접두어였지 않을까? 문제의 논문을 발표하고 여태까지 ‘근대문학’ 이후에 대한 어떠한 구상도 없는 것이야말로, 그의 의도가 ‘근대’ 문학의 종언을 훨씬 뛰어넘는, ‘문학’의 종언을 의도했다는 확실한 증거다.
‘문학과 국가(민족)’의 야합은 확실히 근대의 현상이지만, 따지고 보면 더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과 권력’은 그보다 오래전인 고대적부터 상피相避 관계였다. 그러므로 둘 사이의 야합이나 상피 관계로 고대와 근대를 구분할 확연한 차별점도 없는 것이다(있다하더라도, 그것은 같은 현상의 심화와 연속으로 파악해야 한다. 혈연으로 유지되는 종족국가에서,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국가로의 변화처럼). 말하자면 항상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목적을 가졌던 문학이라는 긴 역사 속에서, ‘근대문학’이란 짧은 한 때일 뿐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고작 그것을 말하기 위해 종언가를 자처할 사람은 없다. 누구나, 통 크게 놀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