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7일
쓰지 유미의 『번역사 산책』(궁리, 2001)을 읽다. -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번역사로, 번역사는 “어떤 시대에 어떤 책이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를 추적”하는 동시에 “번역을 담당해온 사람들에게 조명”을 가하는 일이다. 여기에 “번역론의 추이를 중심에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지은이는 “가급적 번역가라는 인간의 모습을 추적”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거론된 방법론이 골고루 혼재되어 있다.
번역은 인류의 보편적 행위로,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 고왕국 시대에 이미 번역이 행해졌다는 연구가 있다.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문자를 발명했던 때가 기원전 3200년경이니, 번역은 문자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마다 문자가 달랐던 것이다.
번역은 문명을 전한다. 중세 시대에 그리스-헬레니즘 문명이 유럽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랍인들이 미리 그리스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다. 유럽은 아랍어 중역을 통해 그리스-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할 수 있었다. 훗날 유럽의 각국은 아랍어에서 중역한 라틴어 그리스 서적을 자기 말로 번역했으니, 그게 르네상스다.
동양의 서구 근대화도 그와 다르지 않다. 한·중·일은 모두 넓은 뜻의 서양 문화 번역을 통해 서구의 근대문명을 받아들였다. 한국의 경우 일본어 중역이 위 문단에서 말한 아랍어나 라틴어 역할을 했다. 그러고 보면 번역이란 대부분 그 시대의 ‘지배적 문화’로 여겨지는 언어로부터 이루어진다. 현재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영어번역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번역은 문명을 실어 나를 뿐 아니라, 나라와 말을 함께 만든다. 고대 프랑스인은 라틴어 번역을 통해 자국의 말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16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의 “번역의 황금시대”는 근대국가의 기초와 국어를 확립했다. “프랑스어가 국어로서 확립하기 위해서 번역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고, “국어의 확립은 근대 국민국가의 근간”이 됐다. 이런 사정 또한 한·중·일에 해당한다. 메이지 초기에 서양 문화의 번역어로 철학, 사회, 사상, 자유 같은 많은 일본어가 새롭게 탄생했고 그것이 고스란히 한국으로 넘어왔다. 오늘의 한국어는 어휘뿐 아니라 문법까지 일본어 번역의 영향을 받았다.
번역과 근대 국민국가 만들기의 동양적 사례는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대답집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 2003)에 흥미롭게 기술되어 있다. 대담자였던 가토 슈이치는 ‘메이지 초기의 번역’을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면서 “서양사회를 모범으로 한 근대화의 전제 중 하나가 광범위한 서양 문헌의 번역”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번역사 산책』에 따르면, 현재의 일본은 ‘번역 대국’일 거라는 우리들의 오해와 달리, 출판 전체에서 번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유럽보다 낮으며, 번역서의 비율이 점차 감소하는 추세라고 한다.
번역론이 화제에 오를 때, 직역에 충실할 것인가 아니면 의미 표현에 중점을 둘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 대립을 하게 된다. 유럽에서는 이 논쟁이 8~9세기 동안 내내 계속되었다고 하는데, 실제의 번역은 완전한 직역(원문 중시)도 의역(역문 중시)도 없다고 한다. 번역을 둘러싼 가장 과격한 논의는 직역/의역 논쟁이 아니라 ‘번역 불가능론’ 또는 ‘번역 무용론’일 것이다.
먼저 번역 불가능론.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얘길 할 때 단골로 나오는 게 한국어의 번역 불가능성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외국 소설을 읽을 때, 번역자가 원어의 문체나 미묘한 어투까지 다 옮겼으리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소설이 외국어로 번역되었을 때도, 그것까지 기대하고 읽는 독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문제는 한국 소설이 프랑스 표준어, 일본 표준어, 스웨덴 표준어로 옮겨지는 게 아니라, 작가의 문체와 한국어의 묘한 어조를 다 제거하고도 그곳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무엇이 있느냐이다. 나는 박상륭에게 그게 있다고 보는데, 사람들은 박상륭 얘기만 나오면 앵무새가 된 듯이 한국어와 박상륭의 번역 불가능성만 되뇐다.
다음은 번역 무용론. 흔히 번역이 무성하면 자국 문화가 죽는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번역과 일본의 근대』에도 나오듯이 번역 문화가 자국의 문화적 자립을 위협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번역은 자국의 문화적 자립을 강화하고, 문화적 응전을 활발하게 하는 측면도 있다. “번역 문화는 창조력을 자극하면 자극했지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책 가운데 많은 숫자가 번역서라는 것도 부인할 사람이 없다. 번역자와 번역문화가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개인적 차원에서는, 매일 똑같은 식당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는 일을 생각하면 된다. 국가적 차원에서, 그것은 쇄국이고 고립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그 자신이 번역가로서, 역사상 이름난 번역가의 작업을 추적하는 그런 번역사를 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지은이가 프랑스 통이어서인지, 거의 프랑스인을 대상으로 했다. 그 명단 속에 눈에 띄는 사람은 앙드레 지드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번역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두 대작가의 번역론을 읽어 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