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
내가 가장 행복할 때는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서 모차르트에 관한 책을 뒤적이는 것이다. 그래서 레기날트 링엔바흐의 『하나님은 음악이시다 - 모차르트가 들려주는 신의 소리』(예솔, 2006)를 읽으면서는 저자가 특별하게 권했던 <클라리넷 협주곡>을 들었고, 이 글을 쓰면서는 <마술피리>를 듣고 있다.
‘하나님은 음악’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 명제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기초와 논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책은 명제만 제시해 놓고 논증에는 별 힘을 들이지 않는다. 제목만 거창하달 뿐, 이 책은 하나님 대한 새로운 신학을 염두에 두지 않으며, 음악이 간직하고 있는 영성의 힘이나 종교성을 세심히 탐구하지도 않는 것이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사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는 하나님은 음악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논증적이나 철학적으로 입증하려는 목적보다, 주로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서 틈이 날 때마다 묵상하듯 이 글을 썼다. 그래서 옮긴이는 생략과 비약이 눈에 띄는 이 책을 “명상 형식”이라는 글쓰기로 분류한다.
이 책이 명상 형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음악이시다』가 이론적이지 못하며 주관성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옮긴이도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이 책의 기본전제는 모차르트를 신의 영감을 받은 천재 또는 천사로 오도하게 하며, 모차르트 애호가로 하여금 음악을 음악으로 대하게 하지 못하고 특정한 종교 교의로 인도한다. 낭만주의적인 천재관에 해당하는 전자는 무수한 논파 끝에 거의 폐기처분된 전제며, 후자는 종교적 전례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던 자유예술가로서의 모차르트를 상당히 곡해하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에 매료되어 신학적으로 그의 음악에 접근하고자 했던 신학자는 꽤 있다. 칼 바르트의 『칼 바르트가 쓴 모차르트 이야기』(예솔, 2006)와 한스 큉이 쓴 『모차르트, 음악과 신앙의 만남』(이레서원, 2000)이 그것이다. 하지만 신학자로서 모차르트를 숭앙했던 최초의 신학자는 키르케고르다. 그는 성당지기로부터 추기경에 이르는 모든 성직종사자를 움직여 모차르트를 모든 위인들 중 가장 높은 자리에 모시도록 하겠다고 공언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신앙에서 이탈하여 모차르트를 최고로 숭배할 뿐만 아니라 오로지 그만을 숭배하는 새로운 종파를 창설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이 일화는 『칼 바르트가 쓴 모차르트 이야기』와 그 책을 인용한 『하나님은 음악이시다』에 똑같이 나오는데, 직접 확인하고
싶은 독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종로서적, 1981) 제1부 상권 66쪽을 보면 된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무수한 서양 작곡가들 가운데 어째서 바흐도 아닌 모차르트가 ‘하나님의 텍스트’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그런 가운데서 찾아낸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차르트는 강요하지 않는다.” 이 미덕은 신이 인간에게 허용한 자유의지를 연상시킨다. 반면 우리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서 결코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나면 “어쩐지 내가 완력에 휘말린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모차르트의 두 번째 특성 또한 첫 번째 특성과 연관 깊은데, 모차르트의 음악은 모차르트로 향하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어떤 곳’에 이르는 길로 계속 나아가도록” 한다. 이처럼 모차르트는 인간의 근본적인 해방을 통해 신과의 만남을 주선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탁월한 ‘모차르트 지휘자’로 알려진 칼 뵘은 모차르트가 부재하는 고통스러운 경험만 우리들에게 준다면서, 그의 41번 <주피터 교향곡>을 브루노 발터의 연주와 비교해 보라고 말한다.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기를 쓰고 우리를 유혹하려 하지 않”는 해석만이 모차르트의 본 모습이라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또 다른 특성은 완전성이다. 모차르트는 우리를 어디로 끌로 가든, “완전성”에 이르게 해주는데, 그의 완전성은 우리들을 창조주의 완전성과 조우하게 해준다. 밀로스 포먼의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를 빈궁하고 비극적으로 채색했지만, 지은이의 모차르트상은 다정하고 밝고 따뜻한 인간애를 내뿜는 그런 모차르트다. 밀로스 포먼의 <아마데우스> 탓에 우리는 <레퀴엠>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적 유언을 찾으려고 하는데 “모차르트가 죽기 직전에 오로지 <레퀴엠>에만 전념하고자 했다는 전설은 그릇되고 날조된 것”이다. 임종 자리에서조차 모차르트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것은 <마술피리>로, 이 오페라의 주제였던 자유, 평등, 박애는 모차르트가 간직했던 완전성 가운데 일부다.
지은이에게 모차르트는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남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살았노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사람이다. “생애 전체가 그것을 입증”하고도 남는다는 모차르트의 삶은, ‘사랑의 하나님’을 떠올려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차르트의 사랑의 절정인 용서를 자기 오페라의 복음처럼 여겼다. <후궁으로부터의 유괴>는 기대하지 않았던 용서를 얻고 그에 대해 감사함으로 끝나며, <돈 조반니>는 용서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도 거절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피가로의 결혼>은 용서해 주기를 거절했으나 이내 도리어 용서를 빌게 되는 용서의 불가피함을, <마술 피리>는 용서와 사랑의 왕국을 묘사하고 있으며, 모데트 <아베 베룸>은 용서와 사랑의 근원을 노래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명상적이고 선적禪的으로 씌어진 이 책은, 음악을 하나님의 비밀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간주한다. 약간의 억지를 무릅쓰고 말해본다면, 신과 음악은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의 말씀과 음악은 우리들의 귀와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해석의 유동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창조라는 점에서 유비가 가능하다. 문제는 이것 말고도 얼마든지 많은 유비를 찾아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악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의 표제는 억지처럼 여겨지는데, 지은이는 그걸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이며, 음악은 사랑으로 통하는 통로이자, 사랑이다. 고로 하나님은 음악이다. 이런 삼단논법인 것이다.
모차르트는 내게 행복을 줄 뿐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책을 쓰게 만든다. 거론된 신학자들이 그랬듯이, 일본의 저술 집단 드림프로젝트가 기획한 『클래식의 미스터리: 명곡에 얽힌 치명적인 비밀』(웅진윙스, 2007)도 모차르트가 집필 동기였던 책이다. 이 책이 일본에서 출간된 2007년은, 한 해 전인 2006년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으로 일본에 클래식 붐이 일어난 탓에 기획되었다. 78개 꼭지로 구성된 이 책은, 명곡에 얽힌 재미난 의문과 부정확한 소문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형식으로 씌어졌다.
이 책은 네 개의 꼭지를 모차르트에 할애한다. 제목만 열거하면 「<마술피리>에 숨겨진 모차르트의 사망 원인은 무엇일까?」, 「일부러 유치하게 악보를 쓴 모차르트의 저의는 무엇일까?」,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하여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의 정체는?」, 「모차르트와 동명이인인 음악가가 실제로 있었다고?」. 이 가운데 두 꼭지가 모차르트의 사인死因을 해명코자 하는데, 앞의 책에서 레기날트 링엔바흐는 <마술피리>를 작곡하는 데 너무 많은 기력을 쏟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