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5일
최인호의 『지구인』(문학동네, 2005)을 읽다. - 나는 이 소설을 동화출판공사에서 나왔을 때 처음 읽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범우사, 1994) 1권에 1994년 7월 20일자로 작성된 무척 피상적인 독후감이 실려 있는데, 그 글에서는 ‘최인호의 모든 장식’이 총집합된 작품으로 이 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을 이끄는 강력한 힘은 ‘서울길上京’이고, 모든 인물은 서울로 향한다. 작품의 주인공인 이종대와 이종세도 그렇다. 경상남도 양산군 서생면 신앙리에서 태어나 전라북도 정읍에 자라난 두 이복형제는 서울이 끌어당기는 구심력에 빨려 들어간다. 형 이종대는 ‘정읍→부산→(폐광)→서울→(감옥)→월남→서울’로, 동생 이종세는 ‘정읍→서커스단을 따라 지방을 주유→서울’이란 근대화의 일방통로를 따른다. 그 노선상에서 형은 ‘카투사→노다지꾼→극장 간판쟁이→노상강도→무장강도’가 되고, 동생은 ‘서커스 단원→신문배달원→소매치기→소년원생→군인→회사원’이 된다.
두 사람은 밀납으로 날개를 만들어 단 이카루스처럼, 서울이라는 ‘태양’을 향해 부나비처럼 덤벼든다. 이들은 고향을 떠난 순간 범죄자가 되었기에,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종대의 범죄 행각이 발각된 직후, 그와 한솥밥을 먹었던 극장의 간판쟁이 선배는 말한다: “이봐, 그렇다고 정읍엔 가지 말어. 내 보기엔 정읍에도 헌병이 좌악 깔릴 테니까.”(2권, 186쪽) 충고와 달리 종대는 4개월 동안 정읍에 은거했는데 현명하게도 그는 “정읍에 숨어 들어가서도 집을 찾아가지 않았다.”(2권, 207쪽) 이 사정은 이복동생 종세에게도 마찬가지다. 대륙서커스를 뛰쳐나와 소매치기가 된 그는 자신의 가출 2년을 뒤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그는 이 년 동안 한 번도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보낸 적도 없었다. 밤이면 자주 꿈에 어머니가 보였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죽은 사람이었다. 죽은 혼령이 되어 나타나곤 했다. 종세는 어머니가 그 동안 죽어 버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정읍을 떠나올 때부터 어머니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으며 정읍은 그의 마음에서 깨끗하게 지워진 백지와도 같았다. 정읍으로 가는 길은 끊기고 어머니는 죽었으며, 아버지 역시 어디론가 떠나버려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이 종세를 지배하고 있었다.”(2권, 277쪽) 이때 종대는 스물두 살, 종세는 열여섯 살이었다.
‘서울길’에 오른 두 형제를 지배하는 삶의 원리는 ‘행동’이다. 점점 더 깊은 범죄의 수렁 속으로 기어들며 이종대는 “행동하라, 행동하라, 그것만이 진실이야.”(1권, 341쪽), “행동하라. 행동하는 순간 너는 자유롭다. 행동하지 않으면 너는 이미 죽어 있는 시체에 불과한 것 (…) 행동하라. 행동할 때만 너는 존재한다”(2권, 139쪽)고 거듭 되뇐다. 서로의 분신(3권, 46쪽) 또는 “쌍둥이”(3권, 58쪽)임에 분명한 동생 이종세 역시 일찌감치 “나는 선택하고 행동했으며 마침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행동했으므로 나는 이곳에 있는 것이다”(2권, 112쪽)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이종대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1권, 227쪽)고 이를 악무는데, ‘나부터 살고 봐야 한다’는 이들의 행동하는 ‘삶 원리’는 한국전쟁이라는 대량 살상의 참혹함과 전후의 절대적 가난과 피폐 속에 본능적으로 터득된 것이다. 그래서 전후인간戰後人間의 윤리는 환경에 대한 ‘적응’(1권, 334쪽)과 자신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공격’(1권, 253쪽)으로 응축되며, 거기에 맞게 자기합리화가 이루어진다: “살인은 별것이 아니다. 손가락 하나에 달려 있다. 살인과의 엄격한 계약 앞에 종대는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렸다. 그는 비로소 죽음과 악수했으며 악의 제자가 되었다. 피도 끓어오르지 않았다. 그저 싸늘했다. 엉겁결에 쥔 총신, 그 금속성의 비정한 침묵과 비릿한 냄새를 종대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동시에 사물의 본질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머리 좋은 아이처럼 한꺼번에 터득했다 (…) 그것은 절대였다. 그 이상의 법은 존재하지 않았다.”(1권, 325쪽), “종세는 어느 정도 사람이 빠져나가 틈을 보이는 버스 속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여인이 아직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손잡이에 매달려 어두운 차창 밖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종세는 이상한 감동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다. 무엇이 자기 곁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가를, 그러므로 그들은 그녀의 물건을 훔친 것이 아니라 주운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물건을 서로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닐까. 애초부터 물건이 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것들은 소유하는 자의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소유는 소유하는 것으로만 끝이 나고 만다. 처음부터 돈은, 물건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며 그것은 누구든 손에 쥔 사람에게 복종하기 마련이다. 이미 그녀의 지갑 속에 들어 있던 돈은 그녀의 것이 아니다.”(2권, 112쪽)
『지구인』의 모태가 된 이종대·문도석 사건은 자본주의 원리에 따른 근대화 과정의 어두운 부산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동전의 이면이나 같았던 탈농脫農과 도시에 대한 동경이 곧바로 도시에 대한 시큼한 부정으로 낙착된다는 것이다. 헐리우드의 ‘갱스터 무비’나 한국의 ‘깡패영화’가 한번도 도시를 긍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듯이, 이종대·문도석의 무장 강도 사건을 소설화한 이 작품에서 역시 서울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종대보다 좀 더 사색적이었던 종세에 의해 서울은 ‘이상한 도시’(“깃대를 휘두르며 생각했다. 그래. 이 행진을 따라간다면 어쩌면 이상한 도시, 그림자가 물구나무서서 무채처럼 흔들거리는 이상한 꿈의 도시로 따라들어갈지도 모른다” ―1권, 158쪽)나 ‘정육점’(“종세는 병원 복도처럼 밝은 전차 의자에 앉아 차창으로 스쳐가는 서울의 밤풍경을 넋을 잃고 보았다. 전차는 섰다가는 떠나고 떠났다가는 또다시 섰다. 사람들은 전차가 멎을 때마다 꾸역꾸역 몰려들어 정육점에 매어달린 고깃덩어리들처럼 손잡이에 매달려 어두운 거리를 우두커니 내다보고 있었다.” ―2권, 38쪽), 혹은 ‘공동묘지’(“서울은 거대한 죽은 사람들의 거리였다. 그것은 거대한 공동묘지였다. 묘비석 같은 건물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서 있었다. 오직 살아 있는 것은 그 묘비와 같은 건물 사이를 뚫고 달려가는 전차뿐이었다.”―2권, 39쪽)로 규정된다.
근대의 규율과 도시의 (임금)노동은 신체의 자율 감각과 실존의 감각을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그런 죽음의 도시에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앞서 말했던 대로 ‘행동’이다. 그것만이 근대/도시에 탈취당한 끝에 무감각해져버린 실존과 자율의 감각을 되살려 준다. 이종대가 무장 강도가 된 것은,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이 ‘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총이 자신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고, 그것에 대한 집착을 키워 나간 끝에 무장 강도가 된 것이다. “순간적으로 생전 처음 권총을 쥔 그의 손바닥에 가득 찬 충일감을 종대는 쾌감처럼 느껴 받았다. 권총과의 최초의 악수였다”(1권, 326쪽), “권총은 절대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2권, 196쪽), “종대는 총의 위력과 그 절대의 권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총은 단순한 도구뿐 아니라 잡은 자의 법이며, 겨눈 자의 길이었다. 총은 인간의 의지와 용기를 극대화시키며, 이미 겨누어진 순간 총과 구멍은 겨누어진 목적 이상의 신비스런 힘과 환상적인 꿈을 그것을 소유한 자에게 불어넣는 것이다”(3권, 135쪽)는 구절들은, 총이 그것을 쥔 자에게 선사하는 게 ‘힘을 통한 자유’의 감각이란 것을 속삭여 준다. 그래서 종대는 무장 강도가 되었으나, 만약 그에게 그럴 환경과 의지가 허여 되었다면, 그는 총 대신 ‘붓’을 잡는 화가가 되었을 것이다.
근대화와 자본주의는 사회적 낙오자들을 만든다. 그런 지구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태양’이 되는 것이다. 아주 상징적이게도 실제의 이종세는 자신의 아들에게 ‘태양’이란 이름을 붙였고, 작가 또한 그 사실을 빌려 쓴다. 태양은 욕망과 경쟁의 다른 이름이며, 그것을 관철할 힘 또는 남성성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남성적 서사가 지배하는 『지구인』에는 그러므로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적 욕망과 경쟁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훼손당하고 희생당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종대에게 강간당하고, 양갈보가 되어 마이클 중위에게 맞으며 살다가, 종대를 구하기 위해 마이클의 총에 죽은 영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남성의 욕망과 경쟁을 부인하는 흥미로운 인물 하나를 작중에 새겨 놓았다. 본명이 박길훈이지만, 박정자 또는 그냥 ‘박씨’로 불리웠던 대륙서커스의 불춤꾼이, 바로 그다.
ⅰ)
“(…) 내 이름은 박길훈이다. 네 이름은 뭐냐?”
“종세요, 이종세.”
“사람들은 나를 정자라고 부른다. 박정자.”
“왜 아저씨는 남자면서 여자 옷을 입고 있나요? 나는 아저씨가 첨에 여자인 줄만 알았어요.”
“난 여자가 더 좋으니까.”
“남자가 싫으세요?”
“싫고말고.”
“왜요?”
“남자는 수염이 나지 않니. 그리고 서서 오줌을 누지 않니. 난폭하고, 싸우고, 죽이고.”
(…)
“내가 여자처럼 생각하고 여자처럼 한다면 언젠가는 정말 여자가 될 것이다.”
“왜 그처럼 여자가 되고 싶으세요?”
“남자들은 싸우니까. 서로 죽이니까.”
“여자들도 싸우는걸요.”
“죽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자들은 애를 낳을 수 있지 않니.”
“아저씨도 애를 낳고 싶으세요?”
“낳고 싶다. 언젠가는 낳게 되겠지.”
“누구의 애를 낳고 싶으세요?”
“누구의 애냐고?”
박씨는 목쉰 소리로 웃었다.
“불의 아이를 낳고 싶다.”
종세는 그 말이 무슨 뜻인가 머리를 모았지만 짐작이 가지 않았다.
“불의 아이라뇨?” (1권, 180~181쪽)
ⅱ)
“놀랐다, 얘.”
“연숙이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난 박씨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지 몰랐다, 얘.”
“난 알구 있었어.”
종세는 자기 혼자만이 그 비밀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과장되게 자랑했다.
“박씨 아줌마는 그런 사람이야. 남들이 보면 이상한 사람 같지만 박씨 아줌마는 힘도 세고 싸움도 잘하고 빠른 사람이야.”
“너는 왜 박씨를 아줌마라고 부르니?”“박씨 아줌마가 자기를 아줌마라 불러 달랬어.”
“왜?”
“박씨 아줌마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좋다고 했어.”
“왜 그럴까? 난 남자로 태어나고 싶었는데.”
“남자들은 수염이 나고, 서서 오줌을 누기 때문에 싫다는 거야. 또 남자들은 싸우고 서로 죽인다는 거야.”
(…)
“왜 그렇게 여자가 되고 싶어 할까? 자지가 달렸으면서.”
“박씨 아줌마는 애를 낳고 싶대.”
“애라니?”
놀란 듯이 연숙이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박씨 아줌마는 언젠가는 애를 낳고 싶댔어.”
“누구의 애를 말이냐?”
“불의 아이를 낳고 싶댔어.”
남성 질서와 가치로 구조화된 세상에서 패배한 남성 박길훈이 여성 박정자가 되어 낳고 싶어 했던 ‘불의 아이’는 기존의 남성 세계를 불태워버릴 전혀 새로운 인간일 것이지만, 박씨는 그런 아이를 낳기도 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므로 진정 이 소설에 비극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면, 『지구인』의 주인공이자 실화 속의 이종대가 자신의 아들인 ‘태양’을 죽이고 따라 죽었듯이, 작가가 창조한 박씨 역시 ‘불의 아이’를 낳고 싶다던 희망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한다는 점이다. 두 죽음이 상징하는 것은, 절망적인 현실과 암울하게 닫힌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