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4일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문학사상사, 2005)을 읽다. - 이 작품을 옮긴이는 ‘역자의 말’에서 조이스의 『율리시스』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이 작품과 연관 짓는다. 단 하루 동안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어둠의 저편』은 거론된 두 작품과 동일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설은 사소한 공통점을 가진 유명 작품들을 병풍屛風처럼 둘러치는 것으로 해설이 필요한 작품에 광휘를 부여한다. 같은 반열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해설이란(‘역자의 말’도 해설의 일종이다), 인류가 만든 무수한 문서 더미 속에서 그 작품과 유사한 사소한 공통점을 발견하려는 수고와는 거리가 멀다. 솔직히 말해서, 『율리시스』나『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어둠의 저편』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이 작품과 유의미한 상호텍스트성으로 상관된 작품을 굳이 찾으라면, 단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를 꼽을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은 ‘역자의 말’ 앞에 붙어 있는 권택영의 해설조차 놓치고 있는 사항이다. 약을 먹고 혼곤히 취해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는, 남성의 관음증적 폭력 아래 놓여 있으며, 약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죽기까지 한다.
『어둠의 저편』에 나오는 아사이 에리는 중학교 때부터 잡지모델과 CF모델로 활약했던 미모 여성이다. 그녀는 스물한 살이 된 어느 때, “지금부터 한동안 잠을 자겠어”라고 가족들에게 선언하고, 2개월 동안이나 내리 잠을 자고 있는 중이다. 모델은 분명코 창녀는 아니지만, 자본의 규정력과 관음증의 시선 아래 놓인 모델의 신체는 일종의 사물과 같다. 하므로 에리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저 이상한 잠은, 자신을 사물로 만드는 시선의 폭력으로부터 도주하려는 시도다.
에리는 모델이 되기를 그치고 자발적인 수면을 취하지만, 그녀는 꿈속에까지 파고든 카메라의 감시를 피하진 못한다. 가족의 눈에는 그저 2개월 동안 내쳐 잠든 모습만 보이지만, 그녀의 꿈에까지 파고든 카메라는 그녀를 비디오 아트에 찍힌 오브제인양 취급하며, 그녀의 잠은 ‘얼굴 없는 남자’의 감시를 받는다. 낮의 세계만 아니라, 밤의 세계 역시 자본주의와 관음증이 결합된 시선의 폭력에 점령되었다.
에리의 여동생 마리가 밤새 자지 않고 거리를 서성이는 것은, 어느 곳으로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잠자는 미녀’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시도다. 도시 생활자의 수면에 대한 거부는, 정반대되는 두 가지 정신의 동시적 현현이다. 먼저 그것은 인간의 본능에 기입된 수면의 흐름을 파괴하는 도시 생활에 동승하는 것인 동시에, 정상적인 수면의 흐름을 의식적으로 거스르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에리는 동화와 저항이 함께한 탈주의 노상에서, 언니에 대한 콤플렉스를 씻을 뿐 아니라, 언니와 소통할 수 있는 기억을 찾아낸다.
작중에 나오는 러브호텔 알파빌은 하루키가 고다르의 영화 <알파빌>의 제명을 빌린 것이다. 영화는 알파빌이라는 미래의 가상 도시를 묘사하고 있는데, 알파빌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우는 사람은 체포되어 공개처형"을 당하게 된다. 모든 일을 수식數式을 통해 효율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사회에서 감정이나 눈물은 반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고다르의 영화에서도 그랬지만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폭력과 매음이 일어나는 장소이자 패배자와 도피자의 거처인 알파빌은 현대 사회(도시)를 은유한다. 하지만 탈주의 시도와 같았던, 하룻밤의 방황 끝에 집으로 돌아온 마리는 언니가 자고 있는 방으로 가서 옷을 벗고 언니의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이불 속에 누워서 잠시 몸을 푼 다음, 똑바로 천장을 향해 누워 있는 언니의 몸을 자신의 가녀린 팔로 감싸 안는다. 언니의 가슴에 살며시 뺨을 갖다 대고, 한동안 가만히 있는다. 언니 심장의 고동 소리 하나하나를 듣고 이해하려는 듯이 귀를 기울인다. 귀를 기울이면서 마리의 눈이 평온하게 감긴다. 감고 있던 눈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주르르 눈물이 흘러나온다. 매우 자연스럽고, 굵은 눈물방울이다. 그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려, 아래로 떨어져서 언니의 잠옷을 적신다 (…) 눈물은 계속 넘쳐흐르고 있다. 마리는 손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받는다. 막 떨어진 눈물은 혈액처럼 따뜻하다.”
마리에게 스스로를 긍정하고, 언니와 화해하도록 용기를 준 타카하시 테츠야는 흉악범의 세계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저쪽 세계’와 정상인들의 세계라고 말 할 수 있는 ‘이쪽 세계’ 사이에 “벽이란 건,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벽이 있다 해도, “종이” 한 장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부에 ‘저쪽 세계’가 이미 몰래 숨어들어와 있는데도,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뿐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추상적인 언명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모범적인 직장인의 모습 뒤에 폭력성을 은닉하고 있는 시라가와라는 인물의 존재며, 주인을 잃어버린 휴대전화에서 수시로 흘러나오는 “도망칠 수 없다”라는 협박이다. 하지만 저 언명을 더욱 실감 있게 해주는 작중 모티프는, 우리들이 매일 먹지 않을 수 없는, 유전자 조작과 조직적인 동물 학대 같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식재료들이다. 그 예들은 17쪽, 137쪽, 207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