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3일
황순원의 『일월』(문학과지성사, 1983초판, 1990재판)을 읽다. - 이 작품의 Ⅰ부가 <현대문학>에 연재된 때가 1962년이니, 내가 태어났을 때다. 이 소설은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처럼 백정의 자식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시마자키 도손의 소설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천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주제로 삼고 있다면, 황순원의 소설은 그보다는 실존적인 고독을 문제로 삼는다. 간략하지만 인상적인 해설을 쓴 성민엽의 말마따나, 황순원의 주인공은 백정의 자식이라는 운명을 사회적 차별이란 문제를 자각하는 계기로 삼기보다, 자신의 실존적 고독을 인식하게 만드는 전제로만 이용한다.
백정의 자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회적 차별보다 실존적 고독을 파헤치게 된 것은, 황순원 작품에 미만彌滿한 ‘존재론적 고통’의 탐구와 그 시대를 풍미한 실존주의의 영향이랄 수 있을 것이다. 작중의 주인공들이 의식적으로 행하는 ‘연기’가 분명 그렇다. 하지만 『파계』와 『일월』의 근본적인 차이를 결정지은 것은, 천민 혹은 신분제에 대한 일본과 한국의 차이 탓이다.
일본의 부락민은 인도의 불가촉천민처럼 법과 관습에 의한 차별을 겪었고, 이들은 법의 보호는커녕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 일본에서 천민에 대한 차별법이 사라진 것은 메이지 유신의 결과인 1889년의 대일본제국헌법에 따라서이며, 인도는 그보다 늦은 1947년이다. 하지만 국가(법)보다 사회(관습)가 더 강한 인도에서는 여전히 카스트제도가 작동하고 있고, 사정이 개선되었다지만 일본에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정치인과 종교인이 부락민에 대한 차별발언을 일삼았고, 부락민을 동화시키기 위한 특별조치법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일제시기와 6·25, 그리고 80년대의 민주화 시대라는 갖은 굴곡과 격랑을 거치면서 신분제의 악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나라에서는 타고난 혈통 때문에 사회적인 차별이나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 혈통에 따른 차별은 『일월』의 주인공이 그런 것처럼 결혼을 할 때나 개인적으로 불거지는 문제다. 바로 이런 차이 때문에 황순원은 시마자키 도손처럼 백정 문제를 사회적 차별 문제로 접근할 밀도를 잃어버린 것이다.
황순원의 『일월』은 군데군데에서 백정에 대한 역사적·민속학적 지식과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형평사衡平社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17~18쪽, 민속학적 정보를 전하는 21~24쪽, 백정의 기원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51~52쪽, 소 숭배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99~101쪽, 백정의 기원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105쪽, 조선시대의 역사적 정보와 형평사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211~214쪽, 역사적 정보를 전하는 296~298쪽 등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채록되었을 민속학적 정보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귀중한 게 되었지만, 역사적 정보는 부정확하거나 논파된 설이 더 많다.
내게 그것을 알게 해 준 것은 일본부락해방연구소가 펴낸 『일본부락의 역사』이지만, 특히 형평운동과 형평사에 관한 대목에서는 김중섭의 『형평운동』(지식산업사, 2001)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김중섭의 이 책 역시 천민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지만, 본격적이지는 못했고, 이민족 기원설과 직업기원설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런 한계는 이 책의 초점이, 하필 진주에서 형평운동이 일어난 이유를 밝히는 것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1923년 봄, 백정 차별의 관습을 없애고 평등 사회를 만든다는 목적을 갖고 진주 지역의 이름난 사회활동가들이 만든 단체가 형평사다. 이 단체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1922년 일본 교토에서 먼저 창립된 부락민 해방 단체인 수평사水平社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형평사보다 수평사가 1년 앞서고, 또 ‘저울[衡]처럼 평등한 사회를 추구’한다는 형평사의 이름이 ‘물[水]처럼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겠다는 수평사의 이름을 의식하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수평사가 형평사 창립에 직접 개입한 증거는 없다.
조선의 백정운동은 진주에서 도수조합[도수는 백정의 다른 이름]을 결성하려고 했던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록 도수조합은 만들어지지 못했지만, 이때의 경험은 훗날 형평운동의 거름이 되었다. 좌절된 도수조합과 13년 뒤에 생길 형평사의 연관은, 도수조합에 적극적이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인 장지필이 형평사 창립에 참여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형평운동이 진주에서 일어난 사정에 대한 기왕의 설은 “진주가 오랜 세월 유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신분 차별이 더 심하였을 것이라는 추측” 또는 “백정들이 더 많이 살았거나 잘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맴돈다. 즉 “차별이 심하니까 반발로 형평운동이 일어났다거나, 백정들이 많았고 또 잘사니까 형평운동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은 진주보다 백정이 더 많이 살았던 곳이 수두룩했다는 사실과, 진주의 백정들이 다른 지역의 백정보다 더 잘 살았다는 증거가 빈약하다는 것으로 반박된다.
진주에서 형평운동이 벌어진 이유는 “형평사는 1923년에 창립되었지만, 백정 해방의 분위기는 그 이전부터 이미 진주에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그것이 지은이가 말하는 “진주의 ‘역사적 특수성’”이다. 그 특수성의 모태는 임술년(1862)에 일어난 진주농민항쟁으로, 지은이는 진주농민항쟁이 훗날 갑오년(1894) 동학농민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말하며, 진주농민항쟁의 경험이 3·1운동 이후 진주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 사회 운동의 저수원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년운동 단체인 진주소년회(1920)와 진주지역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이끄는 진주노동공제회(1922)의 결성은 진주 지역에 그만큼 사회 운동에 필요한 인적 자원이 풍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런 활동가들에 의해, 1922년 9월 진주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전국 규모의 소작인 집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지은이에 따르면 “형평사 창립이나 형평운동은 나름대로 특수성을 갖고 있지만, 당시 진주의 상황으로 보자면, 그것은 진주에서 일어난 다양한 형태의 사회 개혁운동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3·1운동 이후 이른바 일제의 ‘문화통치’ 정책에 따라 1920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었다. 그러면서 진주에도 지국이 생겼는데, 형평운동의 핵심 지도자인 강상호와 형평사 창립 지도자였던 신현수가 각각 두 신문사의 초대 지국장이거나 지국장이었다. 이 사실이 가리키는 것은 지역의 언론기관과 지역 사회운동이 밀접한 협력 속에서 공론을 제시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역의 역사적 특수성’이란 설명틀은 어떻게 보면 주관적이고 자족적일 수 있다. 자칫 그 설명틀은 임진왜란 이후 급격하게 진행되었던 조선 사회의 신분제 해체라는 거대한 역사적 변동을 좁은 시야에 한정 짓는 설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하필 ‘그 지역에서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냐?’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은 역사와 사회학계를 떠돌아다니는 담痰과 같아서, 지역의 특수성을 설정하지 않고서는 좀처럼 속 시원히 풀리는 않을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