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2일
나치의 선전 정책과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분석한 이경분의 『프로파간다와 음악』(서강대학교 출판부, 2009)은 정치와 문화 그리고 기술이 나치의 이념과 실천 속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분석한다. 앞서 읽었던 『망명 음악, 나치 음악』과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의 숨겨진 삶을 찾아서』가 그랬듯이, 이번에도 저자는 매번 내는 책마다 해당 주제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자신의 업적에 도전한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제국의 총통이 되었을 때, 독일 라디오 방송은 거의 1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합법과 무력을 적절히 배합했던 나치가 바이마르 공화국을 접수했던 그 해부터, 괴벨스는 라디오 방송 체제의 개편과 수신기 보급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훗날 정치 선전의 귀재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될 괴벨스는 라디오 청취자를 늘리기 위해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제작가와 할인가로 라디오 보급률을 높였다.
괴벨스가 라디오 보급에 진력한 이유는 신문이나 팸플릿 같은 구시대의 활자 매체가 갖지 못한 무한한 잠재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선 언어나 장소의 제약을 받는 활자와 달리 전파의 광범위한 파급력은 ‘제국 만들기’에 훨씬 유리했다. 선전 매체로서의 활자 매체는 독일어·독일민족·독일 지역이라는 경계가 한정된 일국一國에는 효과적이지만, 선전의 범위가 일국의 언어·민족·지역의 경계를 뛰어넘어 제국으로 커질 때 활자 매체는 상당한 장애가 된다. 그래서 기술의 발전과 제국 혹은 제국주의는 항상 동반관계를 이룬다. 아쉽지만, 제국과 기술의 이와 같은 연관 논리는 이 책 213쪽에 암시적이긴 하나,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다음으로 활자 매체는 그것을 접하는 사람에게 신중한 사고와 비판 의식을 불러일으키지만, 전파 매체는 활자 매체보다 한층 감각적이어서 호소력이 뛰어난데다가 수용자를 일시에 강한 일체감으로 묶어준다. 대중문화나 복제기술에 유보적이었던 당대의 엘리트들은 “집단적인 소비”의 상징이었던 라디오를 “문화의 수도꼭지”라고 격하했지만 괴벨스는 오히려 “각 개인의 개성을 약화시키고, 합리성을 하향 평준화해주므로, 정신적인 단일화(획일화)”를 가져오는 라디오의 선전적 가치에 열광했다.
히틀러가 독일 제국의 총수가 되었을 때 국민의 48%는 나치당을 지지하지 않았다. 제3제국의 선전장관으로 독일 방송국의 모든 권한을 장악한 괴벨스는 라디오야말로 전체 독일 국민이 나치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도록 “활성화하는 데 유리한 도구”라고 확신했고, 방송 종사자들에게 “이 도구로 여론을 만들어” 줄 것을 주문했다. 바로 이런 이유들로 괴벨스는 ‘민족의 수신기’라고 명명된 저가 라디오를 보급하는 일에 열을 올렸다. 그래서 나치가 집권하기 이전에 불과 416만이던 청취자 수는 집권 3년 만에 750만이 되었고 연이어 910만(1938년), 1,100만(1939년)이 되었으며, 전쟁 발발 2년 후인 1941년에는 1,600만 명을 넘어섰다. 이 수는 당시 세계 최고의 라디오 보급률이었다.
그렇다면 나치가 집권했던 12년간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어땠을까? 괴벨스의 지휘에 따랐던 독일 제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거의가 음악 프로그램 일색이었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짐작하는 ‘선전’과 상당히 거리가 멀다. 보통 선전이라면 연설·논평·대담 등의 ‘말’을 떠올리기 쉽지만, 괴벨스는 이 점에 대해 단호했다: “지루해서는 안 됩니다. 삭막해서도 안 되고, 이것저것 전시하듯 나열해서도 안 되지요. 매일 저녁 행진곡을 방송으로 내보내고는 나치 정부에게 최고로 봉사한다고 믿으면 큰 오산입니다. 더욱이 방송은 말에 병들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청취자는 의도를 바로 알게 되고 기분이 나빠지니까요.”
프로파간다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던 괴벨스는 의도를 드러내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선전이 문화적이고 즐거운 오락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전체 프로그램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부분은 1935년 이래 매해 늘어나서 1938년에는 69.4%까지 증가했으며, 전쟁이 한창인 1943년에는 독일 방송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율은 90%에 육박했다. 이런 현상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여서 1933~1945년까지 독일에서 제작된 영화 가운데 공공연한 정치 선전 영화는 전체의 6분의 1에 그쳤다. 같은 시기 영국의
괴벨스에 의해 선택된 음악은 외부적으로 독일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과시하고 내부적으로는 민족의 공동체적 가치와 단결을 고취시키는 것이어야 했다. 독일 민족의 문화 영웅인 베토벤과 히틀러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스승이자 총통에게 독일 민족을 구원할 원대한 꿈을 앞서 제시했다는 바그너는 제3제국의 국가 의전 행사와 방송 음악프로그램을 쌍끌이로 이끌었다. 거기에 비해 바흐와 헨델은 그저 독일 내의 기독교인을 달래기 위해 이용됐다. 그 자체로 종교였던 나치는 원래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최후의 승리를 성취하게 되면 히틀러는 교회도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보다 흥미로운 경우는 베토벤이나 바그너만큼의 이용가치가 없었던 모차르트다. 모차르트는 나치가 방송 정책을 오락으로 바꾸고자 했던 1935년의 전환기에는 중요한 음악가였으나, 그 후엔 독일의 위대한 음악성을 드러내는 “얼굴마담” 역할에 그쳤다. 다시 말해 나치의 세계관을 북돋우는 데는 큰 효용이 없었다.
선택된 음악가와 장려된 음악 장르가 있었던 만큼, 배제되고 금지된 음악가와 음악 장르도 있다. 나치는 고전음악을 장려하고 다양하게 이용했지만, 12음기법과 같은 현대음악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적성국의 작곡가는 방송이나 연주회 프로그램에서 제외됐다. 또 ‘문화의 흑사병’이라며 재즈를 박해했는데, 현대음악과 달리 1920년대부터 워낙 대중화된 때문에 나치 당국은 재즈에 대한 금지 정책을 일관되게 수립할 수 없었다. 재즈를 금지하면 대중들은 영국 방송 등의 외국 방송을 불법으로 청취했고, 그렇다고 재즈를 대신할 마땅한 ‘댄스 음악’을 찾기도 어려웠다.
나치의 방송 정책은 언어적 수단보다는 주로 독일의 유구한 고전 음악을 통해 국민을 통합하려고 했고, 패전 직전까지 그 정책을 수정하지 않고 일관했다. 이렇듯 나치 방송이 두드러지게 오락성을 강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전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선전을 위해 나치 방송은 “끼워 듣기 효과”라는 원칙을 교묘히 활용했는데, 그것은 재미있는 프로그램 사이사이에 15분가량의 정치적 연설이나 선전 뉴스를 끼워 넣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은 괴벨스가 말한 것처럼 청취자가 선전에 감염되었음을 알지 못하도록 선전을 “스며들게 하는 것”이었고, 바로 그것이 괴벨스로 하여금 말을 포기하고 음악과 같은 오락성 프로그램으로 방송 시간을 채운 “프로파간다의 비밀”이었다. 사정이 이러므로, 매달 라디오 대국민 연설을 하고 계신다는 이명박 대통령도 연설보다는 노래를 하시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