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0일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破戒』(J&C, 2004)를 읽다. - 도손의 『파계』는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과 항상 함께 거론된다. 한국일본문학회가 엮은 『신 일본문학의 이해』(시사일본어사, 2001) 가운데 「일본의 근대소설」 부분을 집필한 최재철은 “자연주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1906)와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1907)이 발표됨으로써 일본 자연주의 소설은 확립된다”고 두 작품을 마치 서로 구별되지 않는 일란성 쌍둥이처럼 기술했지만, 안영희의 『일본의 사소설』(살림, 2006, 살림지식총서232)은 두 작품을 전혀 성격과 생김새가 다른 이란성 쌍둥이로 본다.
『파계』가 발표된 다음 해에 가타이가 『이불』을 발표했는데 안영희의 표현에 따르면 “『파계』와 『이불』의 결투에서 『이불』이 완전히 승리”했다. 사회성이 짙었던 『파계』가 오로지 작가 개인의 사생활만을 문제 삼은 『이불』에 패함으로써 서구 리얼리즘을 모델로 출발했던 일본 리얼리즘은 ‘사회와 나’와의 관계를 탐구하는 서구적 의미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작가의 사생활을 들추는 협소한 심리적 리얼리즘에 낙착되고 말았다.
도손은 가타이의 『이불』이 나온 다음 해에 『봄』을 썼는데, 안영희의 표현을 다시 빌자면 『봄』은 “다야마 가타이에 대한 시마자키 도손의 항복장”이었다. 도손의 『봄』은 『이불』처럼 철저하게 자신의 사생활을 적은 작품이었고, 이후로도 도손은 사소설로 일관했다. 그래서 안영희는 『파계』·『이불』·『봄』이 차례대로 출간되고 사소설이 득세했던 “이 2년간의 문학계의 움직임이 일본의 근대 문학사를 결정하였다”고 쓰면서 “다야마 가타이의 승리는 무자비했다. 사회적 성격이 강했던 『파계』 계열은 대가 끊기고 작가 자신에게조차 버림받아 문단에서 완전히 말살되었다”고 『파계』와 『이불』의 결투를 아퀴 짓는다(필자는 오래 전에 쓴 「이광수를 위한 변명」에서 도손과 그의 『봄』에 대해 쓴 바 있다. 『공부』에 실려 있는 그 글은 일본에서 신문학을 수입한 한국이 왜 사소설은 받아들이지 않았는지에 대한 상식적인 설명과 함께, 일본식의 악덕인 사소설로부터 당대의 한국 문학을 지켜낸 이광수의 공로와, 차라리 그가 사소설을 썼다면 ‘내선일체론’과 같은 거대담론에 빠져 민족반역자로 직행하는 개인의 비극을 방지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가설을 제기하고 있다).
스물네 살이 된 『파계』의 주인공 우시마쓰는 백정의 아들이다. 신분제 사회였던 봉건시대는 물론이고 신분제가 철회된 근대사회에 들어서도 백정은 평범한 시민과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부락민이라고 통칭되었던 이들 피차별민들은 아예 일반 시민들과 섞여 살 수 없었으며, 숨겼던 신분이 드러나면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이혼당하는 게 당연시되었다. 그들은 대대로 백정을 해야 했고, 여자들은 창녀로 팔려갔다.
우시마쓰는 아들의 성공을 기원하는 아버지의 염원에 따라, 출생지와 신분을 속이고 국비 사범학교 학생이 되고, 교사가 된다. 고향을 떠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숨겨라”, “비록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결코 백정이라고는 고백하지 말아라. 일단 분노와 슬픔으로 이 훈계를 잊으면 그때야말로 사회에서 버려진 것이라고 생각해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의 신분이 탄로 나고, 곧 직장과 지역 사회의 의심과 추궁을 받는다. 주위의 차별도 차별이지만, 자신의 신분을 속이는 일을 떳떳지 않게 여긴 우시마쓰는 결국 아버지의 훈계를 어기고 신분을 밝힌다. 그것이 이 소설의 제명인 ‘파계’다.
작중에서 우시마쓰가 가장 되풀이 보여주는 행동은 ‘잠드는 것’으로, 아래 인용은 작품 전체에서 골고루 발췌한 것이다.
ⅰ) 갑자기 뜻밖의 장소에서 피어오르는 솜 같은 구름을 발견하고 우시마쓰는 잠시 동안 그것을 바라보면서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피로가 몰려와서 낟가리에 기댄 채 잠들어 버렸다.
ⅱ) 범하기 어려운 강렬한 사회의 힘은 차차 우시마쓰의 몸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렌게사蓮華寺 이층으로 올라갔을 때도 책보를 그곳에 내던지고 하오리와 하카마를 벗어 던지고 우시마쓰는 방바닥 위에 누워서 멋대로 절망에 파묻힐 수밖에 없었다. 자는 것도 아니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며 마치 무감각한 사람처럼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얼마 뒤에 일어나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ⅲ) 우시마쓰는 점점 학교에 출근하기가 괴로워졌다. 어느 날 너무나 견디기 어려워서 결근계를 냈다. 그날 아침은 늦게까지 누워 있었다. 8시를 치고 9시를 치고 이윽고 10시를 쳐도 아직 우시마쓰는 누워 있었다 (…) 아, 아침 잠자리는 절망한 사람을 파묻는 무덤과 같은 것이리라. 우시마쓰는 다시 그곳에 누워서 깊은 잠으로 빠져 들어갔다.
ⅳ) 마음은 지쳤다. 이윽고 벽장 안에서 이부자리를 꺼냈을 때는 자신이 하는 일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 갑자기 심하게 잠이 엄습해 와서 우시마쓰는 반은 잠든 상태에서 잠옷을 갈아입고 곧장 또 기억이 없는 곳으로 떨어져 갔다.
ⅴ)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면서 쓸쓸하게 반쯤 심지에 타는 불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 사이엔지 피곤해졌다. 우시마쓰는 책상에 기댄 채로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위의 인용 사이사이에 자신의 처지에 대한 번민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잠들지 못한 밤이 있으며, 그만큼의 횟수로 묘사된 눈물과 애상이 있다. 이런 증상은 다 메이지 유신의 결과인 1889년의 대일본제국헌법에 따라 피차별민 해방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차별과 불이익의 구조가 허물어지지 않았던 상황과 연관된다. 해방령에 따라 평민의 신분을 획득한 피차별민을 ‘신평민’이라고 부르기로 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던 것이다: “운명이었다. 왜 신평민만이 이 사회에서 살아갈 권리가 없는 것일까?”
우시마쓰에겐 두 사람의 아버지가 있었다. 백정이란 신분을 결코 누설하지 말라던 생부와, 우시마쓰가 다녔던 사범학교의 강사였으나 백정이라는 신분이 밝혀지자 학교를 뛰쳐나가 신평민 해방운동을 하면서 “나는 백정이다”는 문구로 시작되는 『참회록』을 쓴 이노코 렌타로. 우시마쓰는 자신의 신분이 탄로 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번은 존경하고 따르던 렌타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인했고, 또 한 번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그의 책을 모두 모아 헌책방에 내다 팔았다. 하지만 그는 다행히도 베드로가 아니었다.
그의 파계는 “하나에서 열까지 아버지의 말씀에 복종하고 그것을 기계적으로 준수”하는 아동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또 자유자재의 생각을 가지고 “무정한 세상에 분노하던 선배[렌타로]의 마음과 세상을 따르라고 가르쳤던 아버지의 마음” 가운데, 선배-새아버지를 선택하는 거였다. 그리고 그 파계는 불안과 번민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찾아 들어갔던 잠으로부터 깨어나는 일이었다.
이 소설을 읽는 중에 일본부락해방연구소가 펴낸 『일본부락의 역사 - 차별과 싸워온 천민들의 이야기』(어문학사, 2010)를 구해 함께 읽었다. 고대 사회에는 어느 곳에서나 천민이 있었는데, 천민의 기원은 각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게 설명된다. 그 가운데 공통적으로 지지되는 설은, 외국인의 자손이나 포로라는 설이다. 하지만 일본의 부락차별을 설명하는 이 책은 귀화인歸化人 혹은 도래인渡來人 설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민족 기원설의 허구는 이 책만의 특별한 주장이 아니라, 이미 전전戰前에 논파되었고 역사학계에서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이 일반적으로 멸시당하거나 차별당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의 대부분은 진보된 문화와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당시 사회에서 중용된 경향조차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설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은 “현재 재일조선인을 멸시하는 의식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고 이것을 부락차별과 연결시키려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민의 기원에 대한 한국·일본·인도 등의 또 다른 공통점은 직업기원설이다. 즉 차별부락의 선조들이 죽은 소나 말의 처리와 피혁업과 같은 부정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소외·차별받게 되어 부락이 형성되었다는 설이 천민을 설명하는 직업기원설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논리를 반박하면서 차별부락은 “주위 사람들의 차별적인 언행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영주 측의 일정한 정치적 작위作爲가 작용”하였다고 증명한다.
일본에는 천민을 가리키는 무수한 천칭이 있고, 천민에 포함되는 무수한 직업이 있다. 이렇게 된 사정에는 1300년 전에 정해진 천황이라는 신분의 탄생과, 국가를 사농공상이라는 강력한 신분질서로 구획하고자 했던 중앙집권적인 국가기구의 의도가 작용했다. 천황이 이른바 모든 사람의 위에서 초월한 신분이라면, 당연히 그 아래로 초월한 신분도 있어야 했다. 그게 천민이다.
천황이나 율령체제가 확립되기 이전인 고대 사회에도 노비가 있긴 했지만, 노예는 고대적인 신분제도가 붕괴되면서 대부분 해방되었고(이 책은 그 시기를 789년으로 잡는다), 지배 권력이 노비를 대신해서 만든 게 피차별 신분이다. 이 피차별 신분은 일본식의 정화 관념인 ‘케가레[不淨]’의 부산물로, 케가레란 인간에게 미치는 모든 종류의 죄악을 뜻하며, 특히 죽음과 죽음에 연관된 것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항상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죽음을 정화하는 행위를 담당해야 했다. 예컨대 누군가가 능묘를 지킨다거나, 화장火葬을 한다거나, 시체를 만져야 했다. 그런데 이 케가레 사상의 정점에 숭고하고 항상 청정해야 하는 천황이 있었다.
모든 종류의 케가레 업무가 중세에는 피차별 신분의 임무로 일반화되지만, 고대에는 그것을 담당하는 피차별 계급이 따로 없었다. 고대에는 사회의 가장 저변에 위치한 노비가 케가레를 떠맡았는데 고대적 신분제도가 붕괴되자 중세의 지배층은 케가레를 처리할 새로운 신분제도를 만들어 내야 했다. “고대의 ‘천민’ 신분은 해체되었으며 중세의 피차별민의 계보와는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현재의 통설”이란 주장은 그런 뜻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일본에는 무수한 천칭賤稱이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게 ‘히닝[非人]’과 ‘에타’다 히닝은 처음에 빈궁민을 뜻했으나 나병환자, 예능인이 그 이름에 포함됐고, 형집행, 경찰 업무(끄나풀), 장송葬送이나 청소 등 부정한 것을 정화하는 업무를 도맡았다. 한편 에타는 죽은 소나 말의 처리와 피혁업, 신발 만들기에 종사했는데 이들은 자기 업무뿐 아니라 히닝이 하는 일부 업무를 함께 부담하기도 했다.
그런데 에타와 히닝은 위에 말한 기술이나 업무뿐 아니라, 사농공상에 들어가지 않는 모든 기술과 직업을 다 포괄했다. 예컨대 수렵, 어업, 짚신 만드는 사람, 문신사, 주술사… 등 28개 업종이나 된다고 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사농공상을 위주로 한 질서 확립이며, 사농공상 이외의 것으로 쓸모 있는 인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재미난 것은 “천황이 고급스러운 기술을 독점하기 위해 이들을 신분적으로 구속하고 여기에서 도망갈 수 없도록 한 것”이 직업 세습이 의무화되고 비천한 신분으로 취급된 천민 기술자들이었다는 것이다.
흔히 평민들은 히닝이나 에타 계층을 향해 ‘피차별민들은 기피하는 것이 없다’고 손가락질 하지만, 그 말을 뒤집으면 ‘피차별민들은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는 뜻이 된다. 즉 히닝과 에타의 업무는 그들의 “본원적 직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중세라는 시대 속에서 사회적으로 부여된 기능에 지나지 않”으며, 그 기능을 하도록 강요된 것이다. 전국 동란을 거쳐 막번시대가 성립하면서 천민에 대한 각종 차별 법령이 강도 높게 정비된 것은, 피차별민이 중앙집권적인 국가기구의 의도적 산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 준다.
피차별민과 평민의 사이는 크게 좋지 않았다. 예컨대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백정을 부정하게 여기는 차별하는 의식이 평민에게까지 깊이 파고들었다지만, 거기에 덧붙여 두 계층을 반목하게 만드는 지배층의 농간도 없지 않다. 15세기 초부터 숱한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자 영주들에 의해 선봉에 세워진 게 피차별민 부대였다. 또 피차별민은 소작지를 놓고 일반 농민과 경합하기도 했는데, 높은 소작료 탓으로 일반 농민이 포기한 토지를 피차별민이 꿰차는 것도 평민들을 화나게 했다.
츠카모토 신야 감독의 <쌍생아雙生兒>를 극장에서 본 게 1999년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서야 ‘흠, 부락민에 대한 영화였군!’이라는 생각과 함께, 저릿한 감동을 느꼈었다. 그런데도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엉뚱한 얘기들을 했다. 그만큼 허를 찌르는 영화였다. 영화 줄거리를 다 잊어버렸지만 밥상보처럼 알록달록했던 ‘누더기 패션’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거지에게 그런 옷을 입혔을까? 나는 그게 늘 궁금했었는데, 이 책 82~83쪽에 그 답이 있다. 히닝의 일종이었던 ‘호멘[放免: 원래는 범죄자로 하급 경찰의 끄나풀]’은 화려한 옷을 입었는데, “당시 신분을 초월하여 화려한 복장을 하는 것은 범죄였음에도 불구하고 호멘이 축제에서 화려한 복장을 한 것은 그들이 ‘히닝’으로서 기피하는 것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묻지 않”았던 것이다.
<쌍생아雙生兒>의 마지막 장면은 『일본부락의 역사』의 결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기왕의 부락해방운동이 “부락 문제의 해결을 ‘국민적’ 과제의 틀” 속에서 해결하고자 했다면, 이제는 그 성과를 바탕으로 “발상을 전환하여 그 ‘국민’의 이름에서 민족차별과 국적차별이 버젓이 통용되며, 인종차별이나 그 외의 다양한 차별과 인권침해가 존재하는 일본의 인권상황을 재고”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게 이 책의 결론이라면, 아버지를 이어 의사가 된 아들이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부락으로 왕진을 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태평양전쟁에서 미심쩍은 역할을 했던 아버지의 잘못을 속죄하는 것이다. <쌍생아雙生兒>와 『일본부락의 역사』는 부락민을 통해,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가치와 국제적인 연대에 눈뜬다.
『일본부락의 역사』에는 『파계』가 짤막하게 세 번, 띄엄띄엄 언급된다. ⅰ) “또한 1906년에는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가 출판되었다.” ⅱ) “[전후] 『파계』가 신극인의 협력으로 종종 극화, 영화화된 것도 이러한 사정에 기인하다.” ⅲ) “1954년에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 초판이 신쪼샤에서 복간된 것은 부락 문제에 대한 관심을 넓히는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
『파계』가 초간 되었던 1906년은 사회문제로서의 부락 문제가 행정과 사회운동가, 언론의 높은 관심을 사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전후, 전쟁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부락 문제가 재점화될 때 이 작품은 연극과 영화로 “부락 문제의 해결이 민주적인 일본 사회의 건설에 필요한 과제”라는 것을 대중에게 인식시켰다. 그러다가 1954년에 초판이 복간되면서 부락 문제에 대한 관심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니, 결코 『이불』에 패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