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7일
집 앞에 있는 서점에 뭘 찾아보러 갔다가, 제임스 M. 케인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가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169’번으로 출간된 것을 보았다. 언제 나왔는지 판권란을 보고자 책을 뽑았는데, 표지를 감싼 빨간 띠지에 씌어진 두 줄의 글이, 나를 빙긋이 웃게 한다.
“나는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이방인』을 썼다.” - 알베르 카뮈
판권란을 보니 이 작품이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 속에 들어간 것은 2007년으로, 이제까지 이 책은 여러 명의 번역자와 출판사를 전전했다. 그 가운데 어느 번역본을 읽고 쓴 독후감이 지난 『독서일기』 어디에 있을 테지만, 오늘은 이 소설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얘기다.
언젠가 재미난 글감이 될 듯하여, 지금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세계문학전집의 목록을 모두 모아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집에 돌아와 옛날 노트를 찾아보니, 1965년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전 60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의 목록 일부가 적혀 있다(일부만 적혀 있는 것은, 60권 모두를 베껴 쓰기가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이 생각을 한 때는 1997년이었는데, 지금도 크게 나아진 건 없지만, 그때는 인터넷을 전혀 할 줄 모를 때였다. 원하는 독자는 간단한 검색을 통해 이 목록 전체를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단연 우리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것은 월터 스콧트의 『아이반호』와 대만의 여성 작가 사빙영의 『여병자전女兵自傳』 같은 책이다. 『아이반호』야 초등학교 시절에 흔히 읽는 소설이라 누구라도 세계문학전집감인지 아닌지 알 테지만, 열혈 문학 독자 가운데도 사빙영의 『여병자전』을 읽은 사람은 아마 손꼽을 정도일 것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1970년대 말, 여성잡지인 <주부생활>에서 매달 외국 ‘명작 소설’을 단행본으로 만들어 부록으로 삼았다. 나는 표지가 온통 빨갛던 그 부록으로,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과 고미카와 준페이의 『인간의 조건』 같은 소설을 읽었다.
부연하자면, 내가 살던 집과 외가는 한 동네였고, <주부생활>은 세무서 과장의 아내였던 외숙모가 정기 구독한 책이었다. 외가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이모가 있었는데, 이모가 사 보는 <여학생>이란 잡지에서도 『트리스탄과 이졸데』 같은, <주부생활> 부록보단 좀 더 얇은 명작 소설을 부록으로 냈다. 독서대국讀書大國! 아마 그때는 여성지가 그 임무를 맡았나 보다. 농담이 아니라, 윌리엄 골딩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해, 어떤 여성지는 그의 중편인 「황제특명전권공사」를 본문 가운데 별도의 페이지를 만들어 넣기도 했다. 요즘의 여성지는 어떤지…
사빙영의 『여병자전』은 젊은 여성 문인이 장개석의 국민당 병사의 일원으로 중국 대륙을 종횡하며 공산당과 싸웠던 종군일기다. 다시 말해 반공문학인데, 이런 작품이 세계문학전집의 한 자리를 버티고 있었던 것은,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60년대의 시대 상황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여병자전』류의 책은 이제 개도 물어가지 않는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또는 특정 목록에서 ‘어떤 책이 권장되고, 거부되는 것’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기준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의 목록은 한국의 사회와 지적 전통을 검토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서론은 이쯤에서 마치고, 본론이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를 읽은 독자라면, 이 작품이 ‘세계문학전집에 들 만한가?’라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이 작품의 역자도 그런 기우가 있었던지, 작품 해설의 첫 문단을 이렇게 시작한다(①②③④는 인용자가 붙였음).
① 제임스 케인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가 세계문학전집의 일부가 될 수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문학의 고전이라는 점이 하나의 근거요, 대중문학을 차별하는 모더니즘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하는 포스트모던 시대라는 점이 또 다른 근거다. ② 알베르 카뮈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이하 『포스트맨』)에서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인 『이방인』의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을 만큼 케인은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미국 작가 중 하나였다. ③ 『오디세이』나 『천일야화』도 당대의 싸구려 통속소설pulp fiction이었다. 하지만 근대적 학교 제도의 확립과 문맹률 감소로 인한 독자 대중의 확대, 윤전인쇄기와 제본기의 발명으로 인한 서적과 신문의 대량 생산, 여기에 우편 서비스와 철로를 통한 보급 체제의 확대로 인쇄 분야에 산업 자본이 유입됐고 그로 인해 서적의 가격이 적당하게 저렴해진 것은 19세기였다. ④ 『포스트맨』은 실존주의의 대표작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칠 만큼 심미적 깊이가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하드보일드hardboiled 소설이다.
별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 책의 편집자였다면, 위에 인용된 역자 해설의 첫 문단을 이렇게 수정하자고 제의했을 것이다.
① 제임스 케인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가 세계문학전집의 일부가 될 수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문학의 고전이라는 점이 하나의 근거요, 대중문학을 차별하는 모더니즘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하는 포스트모던 시대라는 점이 또 다른 근거다. ③ [알고 보면] 『오디세이』나 『천일야화』도 당대의 싸구려 통속소설이었다. 하지만 근대적 학교 제도의 확립과 문맹률 감소로 인한 독자 대중의 확대, 윤전인쇄기와 제본기의 발명으로 인한 서적과 신문의 대량 생산, 여기에 우편 서비스와 철로를 통한 보급 체제의 확대로 인쇄 분야에 산업 자본이 유입됐고 그로 인해 서적의 가격이 적당하게 저렴해진 것은 19세기였다. ④ 『포스트맨』은 실존주의의 대표작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칠 만큼 심미적 깊이가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하드보일드소설이다. ② [실제로] 알베르 카뮈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에서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인 『이방인』의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을 만큼 케인은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미국 작가 중 하나였다.
역자 해설의 첫 문단은 중학생들의 ‘바른 글쓰기’ 훈련의 좋은 사례지만,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에 비하면, 별 중요한 게 아니다. 우선 제기되는 문제는, 첫 문단의 서두인 ①이 참 어렵다는 것이다. 문제 제기가 부정적이었으므로(『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가 어떻게 세계문학전집의 일부가 될 수 있는가?),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뒷받침되어야 했는데(예를 들어 이 작품이 심심풀이 범죄소설이며, 소위 문학사가 인증한 위대한 문학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점), 역자는 부정적인 질문을 꺼내 놓고 오히려 긍정적인 사례를 제시하니, 평범한 독자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다. ①을 무난하게 시작하고자 했다면, “제임스 케인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가 세계문학전집의 일부가 될 수 있는지 의아해하는 독자에게 두 가지 변호를 하고 싶다”가 되었어야 했다.
어쨌건, 역자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가 세계문학전집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로 ‘미국 고전’이란 점과 ‘대중문학의 귀환’을 들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유는 제임스 M. 케인 따위의 작가를 같은 전집 속의 호손?헨리 제임스?포크너?헤밍웨이?피츠제럴드와 같은 위대한 미국 작가와 같은 반열에 끼워 넣어도 좋을 만큼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이럴 때 미국 고전이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실한 통속소설이, 유수의 출판사가 지속적으로 내고 있는 세계문학전집 속에 들어갈 수 있는 학문의 구조나 문학장은 어떤 것일까?
8개 언어로 출간된 37종의 세계문학사를 검토했던 조동일의 『세계문학사의 허실』(지식산업사, 1996)은, 주로 서양인이 시도한 세계문학사가 서양을 역사발전의 중심으로 삼는 헤겔의 역사철학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프리카인은 역사를 창조하지 못했으며, 아시아에서 시작된 인류역사가 유럽에서 발전되었다고 하는 헤겔 역사철학에서 표명된 서양중심의 역사관이 제1세계 세계문학사에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그래서 아프리카문학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하고, 아시아문학은 고대문학 또는 중세까지의 문학으로나 그 의의가 인정되고, 고대에서 시작해서 근대까지 일관된 발전을 보인 문학은 유럽문명권문학뿐이라고 하는 서술 체계를 무리하게 고수했다.” (446쪽)
바로 그런 이유로 세계문학의 중심은 항상 세계사의 불한당들이 차지해 왔다: “영문학을 중심에다 놓고 영문학과 친소관계에 따라 세계명작을 논의하는 관점 선택이 당연하다고 한 것도 그 자체로 그릇되었다 하기 어렵다. 다른 나라에서 자기네 관점에서 세계문학을 정리하는, 거기에 대응하는 작업을 했으면 형평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이 책(리차드 물턴, 『세계문학사 및 그것이 일반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치 World Literature and its Place in General Culture』, 국내 미간) 같은 것들을 읽고 숭상하고 번역해 받아들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한다. 그래서 영문학은 세계문학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세계명작으로서 최고의 가치를 가진 작품을 가장 많이 산출한 최고의 문학이라는 데 기꺼이 동의한 것이 문제다. 그렇게 해서 제국주의 옹호의 숨은 의도가 간파되어 저지되지 않고 관철되었다.” (144쪽)
세계문학사가 제국주의의 힘을 가졌던 유럽 혹은 영미를 중심으로 기술되어 왔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제2세계나 제3세계는 서구인들이 “문학의 다섯 가지 성서”라고 떠받드는 기독교 성서,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셰익스피어, 단테와 밀턴, 여러 형태의 『파우스트』와 같은 것들을 세계명작이라고 추어올렸고, 우리나라의 세계문학전집은 자연 유럽과 영미문학 작품으로 채워졌다: “세계문학은 세계명작으로 이해해야 하고, 세계문학사는 세계명작의 역사여야 한다는 생각이 그런 데 근거를 두고 마련되어, 밖으로 널리 퍼졌다. 세계명작 운운하는 말은 일본에서 크게 성행해서 한국에도 수입되어 세계문학 이해를 그릇되게 하는 편견을 조성하는 구실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 유럽문명권의 문학이라야 세계명작일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통용되고 있어 세계문학에 대한 오해를 자아내고, 세계문학전집을 그런 기준으로 선정해서 엮어내는 작업이 계속되어 세계인식의 편향성을 고착화한다.” (142~143쪽)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의 목록은 유럽과 영미문학 중심으로 짜여져 있고, 여타의 출판사가 기획한 세계문학전집 역시 그런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계문학전집이라는 용어를 출판사마다 채택하는 것은, 그 이름이 출판사는 물론이고, 그것을 선택하는 독자들에게까지 ‘문화 자본’을 챙겨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계문학전집은 앞으로도 계속, 한국인이 서구를 해바라기하는 악습으로 존재해야 하는 걸까?
조동일은 “세계 각처의 모든 문학의 총계”를 보편문학Universal Literature이라고 하고, “그런 보편문학을 어느 관점, 특히 민족적인 관점에서 이해한 것”을 세계문학World Literature이라고 구분한다(엄밀하게 말하면 이 구분은, 조동일의 것이 아니다). 거론된 세계문학의 개념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은데, 세계사가 항상 그것을 기술한 민족의 입장에서 구축된 세계사이듯, 세계문학 역시 그것을 기술한 민족의 입장이 관철된 것이라는 뜻이다. 보편문학과 세계문학을 구별하는 이 이론에 따르면, 세계 각처의 모든 문학을 총괄하는 보편문학은 이론적 추상이 되기 쉽고(불가능하고), 그래서 보편문학에 비해 한정적인 세계문학으로 관심의 범위를 좁혀버리면 보편문학으로 가는 길이 막히고 문학을 통일체로 파악하는 데 차질이 생긴다. 때문에 저자는 각자의 관점에서 세계문학을 이해하는 게 당연하지만, 각자의 “관점이 세계문학에 관한 보편적인 이해를 위해서 얼마나 타당한가 끊임없이 반성해야, 시야가 열리고, 의식이 각성될 수 있는 전향적인 자세”(이상 141쪽)를 갖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문학전집이 명실상부한 세계문학전집이 되기 위해서는, 세계사와 세계문학을 바라보는 우리만의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뜻에서, 미국 고전이기 때문에 당연히 세계문학전집 속에 수용되어야 한다는 앞서의 역자 해설은 영미 중심의 학문 구조나 문학장을 대변할 뿐, 다른 의미를 찾기 힘들다.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은 유럽과 영미문학의 비중이 컸달 뿐, ‘대중문학의 귀환’에는 나름의 방어를 해 왔다. 적어도 범우사에서 나오고 있는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이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이나 A. J. 크로닌의 『성채』를 넣어서 비웃음을 당했던 전력은 여태까지 없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은 제거되지 못한 불안 요소가 있다. 적어도 한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이 자신만의 관점을 갖추고 또 세계문학을 소개하는 문화의 통로가 되고자 한다면, 먼저 역자의 전문성이 뒷받침 되어야 하고, 관점과 통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권위 있는 해설이 따라붙어야 한다. 그러데 민음사판의 역자는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고, 전문성을 갖춘 역자라도 해설이 부실한 경우가 많다.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의 역본은, 가격이 싸다는 장점만 두드러진다.
제3세계의 관점으로 기술될 세계문학사를 써보겠다는 지은이의 포부와 달리, 조동일이 쓴 『세계문학사의 허실』의 말미는 “세계문학사라는 표제를 가진 책이 더 나오지 않고, 기간본도 재출간되지 않고, 고서점에서마저 자취를 감춘 형편”(446쪽)임을 보고하고 있다. 혹시나 싶어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검색을 해보니, 정말로 세계문학사는 종수가 없었다. 세계문학사가 의미를 잃은 시대는 제국주의의 쇠퇴라는 점에서는 환영할 만하지만, 근대문학의 쇠락도 동반한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민족/근대국가’라는 입각점을 지닌 세계문학은 실종되어버리고, ‘세계 각국의 유명 작품 모음(세계문학전집)’이라는 상혼만 남게 된 것이다.
어쩌다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글이 되었지만, 실은 이 주제로 글을 쓸 생각은 아직 해보지 못했다(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는 말). 세계문학전집에 대해 쓰기로 했다면, 반드시 이 서물이 가진 ‘수집병적인 독서’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세계문학전집은 여기 속한 책들이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라는 맹신 탓에 읽게 되기도 하지만,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한다는 수집병적인 독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인간의 편집증을 건드리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이런 전집을 권하는 것은, 굉장히 효과적이다.
자료를 찾으러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를 보고 애초에 쓰고자 했던 얘기는 따로 있었다. 표지를 감싼 빨간 띠지에 씌어진 두 줄의 글이, 나를 빙긋이 웃게 했던 것이다. 독자들께, 다시 상기시켜 드린다.
“나는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이방인』을 썼다.” - 알베르 카뮈
사실 여부를 더 추적할 수는 없지만, 알베르 카뮈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를 읽고서 『이방인』을 썼다는 말을 나는 얼마든지 믿을 수 있다. 그런데 저 말에는 못다 한 얘기가 있다. 얼핏 보면, 저 띠지는 카뮈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지만, 내가 보는 진실은 다르다. 사람들은 최고의 영감은 응당 최고의 작품에서만 얻을 수 있다고 알고 있지만, 왕왕 최고의 영감은 최악의 작품을 접하고 얻어진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제임스 M. 케인의 이 작품이, 최악이라는 뜻은 아니다. 비유다).
그런데 그런 횡재는 눈썰미 좋고 혜안을 가진 최상급의 작가에게만 얻어걸린다. 최상급의 작가들은 삼류 작가가 충분히 개진시키지 못한 아이디어와 더 나아가지 못한 어설픈 작품으로부터, 자신만의 영감과 완벽성을 찾아낸다. 진실로 카뮈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로부터 『이방인』을 쓰게 만드는 무엇인가를 얻었다면, 그것은 최상급의 작가가 삼류 작가의 쓰레기 더미에서 자기 쓸 거리를 발견했던 좋은 증거가 된다(나는 이미 어느 책에서, 이런 의견을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소설의 제목이 그런 것처럼, 세계문학전집 속에 안착한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를 보면서 또 한 번 더 웃게 되는 것은, 글을 쓰고자 하는 작가 지망생을 생각하면서다. 대개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최고의 작품을 읽히고자 노력한다. 결코 자신도 그렇게 쓰지 못하면서, 예컨대 카프카나 베케트를 읽으라고 주구장창 채근하는 것이다(여기에도 이유는 있다. 처음부터 만만한 작가가 아니라, ‘넘지 못할 산’을 제시해 준다는 것. 만만한 작가를 읽히면 고작 만만한 작가보다 나은 작가가 되거나 그보다 못한 작가로 머물지만, 초일류급 작가를 소개해 주면 그를 뛰어넘지 못해도 최소한 일류는 된다). 그런데 이렇게 닦달하면 대개의 학생들은 절망한다. 그들처럼 쓰기는커녕, 이해조차 안 되는 문학! ‘저렇게 어렵게 써야만 하는 게 문학이라면, 나는 못해!’ 혹은 ‘나는 죽어도 안돼!’
그래서 1년에 두 번 정도는 아주 진지하게 상찬하면서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와 같은 시집이나 『그 놈은 멋있었다』와 같은 소설을 읽으라고 시키고, 리포트를 써오게 해야 한다. 그러면 곧바로 화색이 돈다.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정도가 아니라 ‘아니 나는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어!' 나는 3년 동안 훈장 노릇을 하면서 그걸 모르다가, 문예창작학과를 떠날 때쯤에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같은 소설은 그런 작품이다. ‘세계문학, 별거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