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일
어제 쓴 것처럼 시간은 압축이 가능하지만, 장소는 통폐합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파리·시카고·런던·프랑스 남부 해안 도시를 오갔던 『면도날』은 줄거리 요약이 쉽지 않았다(그런데 오늘 생각은 또 좀 다르다. 그게 꼭 불가항력이었을까? 네다섯 줄의 문장으로 줄여보고 싶은 욕구가 치미지만, 재밋거리 삼아 독자들에게 남겨둔다).
오늘 『면도날』을 다시 얘기하는 건, 줄거리를 요약하느라 진이 빠진 탓에 덧붙이고 싶었던 사족을 마저 붙이지 못한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도 그렇게 간단치는 않아서, 오늘 쓰는 이 사족이 어제 쓰인 일기 끝에 붙었다면 독후감의 본말이 전도되고 말았을 거란 우려가 없지 않았다.
어제 쓴 독후감은 『면도날』의 주인공인 래리가 『갈매기의 꿈』과 『모터사이클과 선 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 An Inquiry into Value』을 가능케 한 선구적인 인물이라는 거였다. 거기에 이어져야 할 사족은 독자들이 잘 모르는 로버트 M. 퍼시그의 『모터사이클과 선』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은 1981년 조승국 번역으로 대운당에서 출간된 후 1986년 『잊을 수 없는 여행』으로 제목만 바꾸어 한그루에서 재간됐다. 대운당에서 나온 저 책은 창고 방출이 있었던지, 80년대 초반만 해도 전국 어느 헌책방에 가더라도 ‘새딱한’ 책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그 책을 서울에 왔다가 대구로 내려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강남고속터미널에 갔다가, 그곳 상가의 헌책방에서 구입했다(80년대 초에는 강남고속터미널 상가에 헌책방이 모듬으로 입주해 있을 정도로 썰렁했다). 하지만 이 책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보기 힘들 게 됐는데, 그럴 즈음 일지 스님이 번역한 『선을 찾아가는 늑대』가 1991년 고려원에서 나왔다(내게 잭 히긴스의 『독수리는 날아오르다』와 『독수리는 내리다』와 같은 소설을 권해주기도 했던, 일지 스님은 아깝게도 일찍 입적하고 말았다. 스님이 번역한 책만 모아도 웬만한 서가의 한 단을 충분히 채울 것이다).
독서일기를 쓰지 않았던 때라 『모터사이클과 선』을 읽고서는 독후감을 남겨놓지 못했지만 똑같은 책인 『선을 찾아가는 늑대』를 읽고서는 『독서일기』 어디에 독후감을 남겼는데, 잘못 이해한 대목들이 기억나서 지금은 들추어 보기 괴롭다. 기억에 따르면, 나는 그 독후감에서 ‘선이 자전거와는 상관있을지 몰라도, 모터사이클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썼을 것이다. 이건 내가 쓴 독후감 가운데 가장 ‘무대포’로 쓴 것일 텐데, 그때는 기술의 물활론적인 전유가능성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퍼시그의 이 책에 대한 가장 본격적인 서평은 휴머니스트에서 14권짜리로 펴낸 ‘청소년을 위한 고전 입문’ 가운데 『서양 고전을 읽는다 4 - 문학 下』(2006)에 실려 있는 「철학과 문학의 경계, 그 외경의 지대에서 - 퍼시그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다. 이 글을 쓴 장경렬은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20세기 세계 문학의 고전 가운데 하나로 꼽혀야”한다고 강조하면서 “이 책에 대한 열광적인 찬사는 허만 멜빌의 『모비 딕』이나, 도스토예프스키, 프루스트, 베르그송의 저작물에 견주어질 만큼 끊임없이 이어져 왔으며, 현재 미국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광범위하게 읽히는 필독의 교양서로의 자리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장경렬에 따르면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나왔던 1974년은, 데리다가 수사학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정립해 나갈 무렵과 겹친다. 그러나 책의 어디를 살펴봐도 퍼시그가 데리다의 영향을 받았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만큼, 퍼시그는 데리다와는 별개로 데리다의 ‘수사학/문학 복권 운동’과 똑같은 문제의식에 도달했다고 평가한다.
오늘날 소피스트는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 ‘궤변론자’로 번역되고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그 어원을 직역하면 ‘현자’, ‘학자’, ‘사상가’를 뜻한다. 그런데 이런 긍정적인 뜻을 가진 소피스트가 어느 날 아침에 부정적인 뜻을 지닌 궤변론자로 둔갑되고 만 것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을 ‘수사학’이라는 이름 아래 말을 교묘하게 조작하는 데에만 급급한 사이비 철학자로 폄하하면서다. 이때부터 소크라테스처럼 변증법을 구사하는 ‘변증가’만이 진정한 철학자가 되고, ‘수사가’들은 소피스트가 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소피스트를 궤변론자로 번역하고 그렇게 의미를 매기게 된 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니체가 출현하여 변증법의 세계 역시 온갖 종류의 은유로 가득한 수사의 세계임을 갈파하기 이전까지는, 누구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위계적으로 만들어 놓은 ‘변증법의 우월함과 수사학의 열등함’이란 논리에 대해 의심을 품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수사학에 대한 변증법의 우위라는 서구 형이상학의 성체는 니체가 처음 발설한 뒤, 데리다가 수사학에 대한 변증법의 공격 역시 기본적으로 수사를 바탕에 둔 것이고 철학도 수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논리의 일격을 가할 때까지 위세를 떨쳤다.
그때까지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내세운 변증법의 세계는 ‘철학’으로, 소피스트들이 내세운 수사학의 세계는 ‘문학’으로 규정됐다. 니체와 데리다는 철학의 문학적 성격을 규명하고, 나아가 철학이 문학의 한 영역일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을 뿐 아니라, 몇 천 년 동안 철학의 위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던 문학을 복권시켰다. 장경렬은 니체와 데리다의 ‘수사학/문학 복권 운동’이 철학의 영역 내에서 이루어진 문헌학적·개념적 추상화 작업을 통한 것이었다면, 퍼시그는 문학의 영역 안에서 현실적인 구체화를 통해 더욱 근본적으로 접근했다고 평가한다.
내 『독서일기』를 찾으면 대운당에서 나온 『모터사이클과 선』에 대한 서지정보를 금세 얻을 수 있었지만, 그걸 다시 보는 게 끔찍해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 과정 중에 톰 버틀러 버든의 『내 인생의 탐나는 영혼의 책 50 : 마음의 평화에서 진리의 깨침까지 동서양 영혼의 탐색』(흐름출판, 2009)이란 책을 알게 됐는데, 공교롭게도 그 50권의 책 가운데 『갈매기의 꿈』과 『선과 오토바이 정비술』로 번역된 『모터사이클과 선』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자기계발 및 성공철학(‘성공철학’이 대체 뭘까?) 분야의 주목받는 필자라는 톰 버틀러 버든의 약력은, ‘절대 이 책을 읽지 마시오!’라고 내게 경고했지만, 번역자가 오강남이어서 믿고 책을 빌렸다. 아니나 다를까… 빌려 왔으니 다행이지, 내 돈 주고 샀더라면 공중전화 박스 위에 올려놓아야 했을, 쓰레기군! (별 중요하진 않지만, 『모터사이클과 선』이 처음 출간됐던 30여 년 전에는 아무도 오토바이를 ‘모터사이클’로 쓰지 않았는데도 대운당에서는 그렇게 바로 사용했다. 그런데 30여 년이 지나 점점 오토바이 대신 모터사이클이란 제대로 된 용어를 쓰는 지금, 흐름출판이 제목에 국적불명의 ‘오토바이’를 버젓이 채택한 것은 퇴보다).
『내 인생의 탐나는 영혼의 책 50』은 참 영양가 없는 허접한 책이었지만, 책을 빌리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 하나가 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4부 위대한 영적 삶’이란 장 속에 몸의 『면도날』이 36번째 책으로 소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지은이는 이 책을 소개하는 글 서두에 『면도날』 514~515쪽에 나오는 구절을 모두冒頭 인용해 놓았다(오강남 번역을 민음사본으로 대체).
그는 야망도 없고 명예욕도 없다. 어떤 식으로든 유명해지는 것은 그가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선택한 삶의 행로를 따르며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는 데 만족할 것이다. 그는 겸손한 성격 때문에 자신을 타의 모범으로 내세우진 않을 것이다. 다만, 적절한 때가 되면 나방이 촛불에 모여들 듯 확신 없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그에게 이끌릴 거라고, 그리하여 궁극적인 만족은 오직 정신적인 삶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함께 나눌 거라고, 그리고 스스로 사심 없이 자제하며 자기완성을 추구하려 노력하다 보면 저술 활동이나 대중 연설 못지않게 사회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모두 인용이 말해주고, 톰 버틀러 버든이 거듭 보증한 대로 『면도날』은 “영적인 길로 인도하는 안내서로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무미건조한 소갯글엔 별 관심이 없다. 래리처럼 서양인이 동방에서 영적 구원의 빛을 얻는 이야기의 원조는 헤르만 헤세며, 몸의 이 소설은 그런 점에서 헤세의 아류작이다. 『면도날』을 『면도날』이게 하는 것은, 어제 썼던 독후감의 결론에 의해서다.
어제 쓴 독후감의 사족 격인 오늘의 독후감에도, 피치 못하게 사족이 따른다. 로버트 M. 퍼시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의 것인 줄도 모르는 채, 우리가 널리 사용하는 그의 말이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의 표지를 열면,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라는 아주 인상적인 제사가 나오는데, 그 밑에 쓰인 이름이 ‘로버트 퍼시그’다. 앞서 거론됐던 「철학과 문학의 경계, 그 외경의 지대에서 - 퍼시그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란 서평 말미엔, 이 책이 글쓴이의 번역으로 2006년 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올 예정이라는 부기가 달려 있다. 하지만 여태 그 책은 나오지 않았다. 2000년대 초, 책을 모두 갖다버리면서 세 종의 『모터사이클과 선』과 함께 퍼시그의 또 다른 저작인 『라일라』(김영사, 1994)까지 모두 없애버린 나로서는 하루빨리 이 책이 새로 나오길 고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