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일
서머싯 몸의 『면도날』(민음사, 2009)을 읽다. - 1874년 출생인 몸이 이 소설을 쓴 때는 1944년이다. 일흔 살에 이 소설을 썼던 몸은 이후로도 장편·단편·희곡·평론을 가리지 않고 발표했다.
도합 7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몸 자신이 화자로 나서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화 소설은 아니다. 1장 초입에 “나는 아무것도 허구로 꾸며 내지 않았다. 아직 생존한 사람들이 난처해지는 일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하여 등장인물에는 가명을 사용했다”는 취급주의 사항이 나오지만, 그건 이 작품에 핍진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아래는 줄거리 요약이다.
1) 1919년. 몸은 극동지역으로 가는 도중에 시카고에 들렀다. 거기서 15년 전부터 파리에서 알고 지낸 엘리엇 템플턴의 점심 초대 전화를 받는다(초대 장소는 엘리엇의 누이동생 집).
2) 몸은 그곳에서 엘리엇의 누이동생 루이자와 루이자의 열아홉 살 난 딸 이사벨을 만나게 되고, 아울러 이사벨의 약혼자인 스무 살의 래리도 소개 받는다.
3) 다음날. 연이은 저녁 초대를 받은 몸은 래리의 양부인 넬슨 박사를 비롯해 래리의 단짝 친구이자 이사벨을 사모하는 백만장자의 아들 그레이 메튜린, 이사벨의 동창생 소피 등을 만난다(하지만 소피에 대한 그 당시의 인상은 그리 깊지 않다. 만찬자리 옆에 앉았기 때문에 몸이 의례적으로 말을 건넸던 예민하고 내성적인 성품의 그녀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4) 시카고에 잠시 머무는 동안 몸은 래리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비행기를 좋아했던 래리는 열일곱 살 때 열여덟이라고 나이를 속이고 육군 항공대에 입대했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제1차대전 때 프랑스 상공에서 독일군과 싸웠다. 거기서 친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그는 부상으로 제대한 후, 시카고의 영웅이 되었다. 귀국한 그에게 좋은 직장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는 제의를 거절하고 매일 도서관을 찾는다. 그의 문제는 오로지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이사벨은 그것을 걱정한다.
5) 몸이 시카고를 떠나기 전날, 이사벨이 그에게 대화를 청한다. 래리는 무작정 파리로 떠나기로 했으며 2년 뒤에야 귀국하기로 했다. 이사벨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으며 귀국과 함께 그와 결혼하기로 약조했다지만, 왠지 래리의 결정이 마뜩치 않은 눈치다.
6) 이듬해(1920). 몸은 런던에서 엘리엇을 만난다. 몸은 엘리엇으로부터 파리에 있는 래리를 수소문하여 그를 파리의 상류사회와 연결시켜 주려고 했으나 래리가 거부했다며 괘씸해한다.
7) 그해 초가을 마르세이유에 가는 길에 파리에 들렀던 몸은 우연히 래리를 만난다. 그는 한껏 자유로워 보이지만, “여전히 그가 무엇을 하려는 생각”인지는 알 수 없다.
8) 다음해(1921), 이사벨이 어머니와 함께 파리를 방문했을 때 몸은 파리에 없었다. 이제 2년이 되었으니 귀국해서 결혼을 하자는 이사벨의 종용에 래리는 아직 “내 의문에 대한 대답들”을 찾지 못했다면서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정신세계가 나를 부르고 있어. 난 그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해”,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확실히 알고 싶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도. 또 내게 불멸의 영혼이 있는지, 아니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지 알고 싶어”라고 답한다. 이사벨은 자신이 래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그와 파혼한다.
9) 엘리엇은 조카가 래리와 파혼했다는 말을 듣고 하루라도 빨리 두 사람을 떼어 놓기 위해 여동생과 조카를 데리고 런던으로 온다. 그 일행과 몸은 런던에서 함께 만나게 되고, 이사벨로부터 래리와 헤어진 얘기를 자세히 듣게 된다. 몸은 이사벨의 하소연에 대해 “너와 래리는 서로 완전히 다른 것”같다고 위로해 준다.
10) 그로부터 10년 동안 몸은 이사벨과 래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대신 엘리엇을 자주 만나 이사벨의 근황을 듣게 된다. 이사벨은 유럽 여행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 그레이와 결혼하고 두 명의 딸을 낳는다.
11) 뒤에 알게 된 것이지만, 래리는 이사벨과 파혼하고 프랑스 북부의 벨기에 국경 근처에 있는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기도 하고, 거기서 만난 폴란드 출신 전직 기병장교와 함께 벨기에와 독일 농촌 지역을 여행한다.
12) 1929년의 대공황으로 그레이와 이사벨은 파산했지만, 요행히도 공황 직전에 주식을 모두 매각했던 엘리엇에겐 가장 화려한 시기가 펼쳐진다. 그는 조카를 돕기 위해 조카 가족 전체를 파리로 초대하여 그의 아파트를 내어 주고, 자신은 막 휴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칸 근처의 리비에라에 집을 짓고 사교 생활을 즐긴다.
13) 몸은 파리에서 10여 년 만에 이사벨 일행을 만난다. 이사벨은 더욱 아름다워 졌으며, 그레이와 그녀는 누구보다 금슬이 좋아 보인다. 일주일에 사나흘씩 이사벨 가족과 만나던 몸은, 어느 날 노천카페에서 부랑자 꼴을 한 래리를 만난다(이제 그는 서른두 살이다). 몸은 막 인도에서 돌아 온 그를 이사벨 일행과 재회시킨다. 래리는 그 자리에서 모든 의욕을 잃은 채 두통을 앓고 있는 그레이의 두통을 단번에 낫게 해 준다.
14) 래리와 함께 카페에 앉아 있던 몸은 십 수년째 알고 지내던 수잔 루비에와 래리가 서로 구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래리가 자리에서 떠난 후 수잔으로부터 두 사람의 얘기를 듣는다. 6~7년 전, 그녀가 병과 경제적 곤경에 빠졌을 때 래리는 동거를 제의했고, 수잔은 어린 딸과 함께 래리를 따라 시골로 가서 한 계절을 살았다. “저도 하마터면 저 사람을 사랑할 뻔”했다던 수잔은 래리를 “수면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래리는 수잔이 완쾌되자 갑자기 그녀 곁을 떠났다. 원래는 가난한 화가들의 모델이었던 수잔은 현재 화가다.
15) 새로운 봄. 몸과 이사벨 일행, 그리고 래리는 야외로 소풍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몸은 래리를 바라보는 이사벨의 육욕적인 정열을 간파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은 파리의 뒷골목을 안내해 달라는 이사벨의 요구를 받고, 그들을 파리 뒷골목의 주점으로 안내한다. 범죄자들이 나올듯한 싸구려 술집에서 그들은 마약쟁이가 다 된 소피를 만난다(소피가 기억나지 않으면 3번으로). 그녀는 몸 일행의 좌석에서 요란을 떨다가 남자 친구에게로 돌아간다. 이사벨에 따르면 소피는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변호사와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아 살던 중에,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이를 잃었다. 혼자 살아난 소피는 술과 남자에 빠져들었고 추문을 피하기 위해 시댁이 그녀를 파리로 보냈다. ‘그레이가 갑작스레 죽더라도 자신이 소피처럼 살기를 그레이는 바라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이사벨은, 결코 소피의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에 대해 몸은 “더 이상 신들이 마시는 넥타를 마실 수 없다면 차라리 밀주를 마셔도 상관없다”는 말로 소피를 두둔한다. 그러자 이사벨은 남편과 아이를 잃은 여자가 어디 한두 명이냐면서 “그 애가 타락한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선에서 갑자기 악이 ‘툭’ 튀어나올 수는 없죠, 악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걸 잘 막아 두고 있다가 차 사고로 그 방어막이 깨지면서 본래의 모습이 나온 것뿐”이라고 응수한다. 이때 아무 말이 없던 래리가 희생적이고 수줍음이 많고 겸손하면서 새침하고 이상주의자였던 열네 살 적의 소피를 회상한다. 이사벨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격분한다.
16) 다음날. 몸은 리비에라로 가서 엘리엇의 화려한 사교생활과 속물적인 기행을 직접 본다.
17) 그해 가을. 며칠간 파리에 머물게 된 몸은 이사벨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전갈을 받는다. 그녀는 래리가 소피와 결혼하게 되었다면서 그 결혼을 막고자 한다. 그녀는 “저만큼 사심 없이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불행한 길을 가려”한다면서 울음을 터트린다. 몸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댄 끝에, 이사벨이 래리를 잃지 않으려거든 소피와 친하게 지내는 수밖에 없다고 충고한다. 몸의 말을 수긍한 이사벨은 이틀 뒤, 래리와 소피를 위한 축하 파티를 리츠 호텔에서 열어 준다. 래리의 청에 따라서였던지 스스로의 결심에 따라서였던지, 갑작스레 마약과 술을 끊은 소피의 모습은 애처롭다. 축하연을 벌인 식당에서 폴란드식 보드카를 발견한 이사벨은 그 술을 칭찬하며 한 병을 따로 산다.
18) 다음날 몸은 영국으로 떠난다. 그로부터 2주 후, 늘 런던에서 옷을 맞추는 엘리엇과 만난다. 그로부터 소피가 결혼 3일 전에 사라졌다는 것과, 결혼이 무산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사벨이 소피에게 사주기로 한 결혼 드레스의 가봉을 하기로 한 날, 두 사람은 이사벨의 집에서 함께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를 데리고 치과에 갔던 이사벨이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도착했을 때, 제 시간에 와서 한 시간 남짓 기다리고 있던 소피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다.
19) 그해 6월. 몸은 소설 초고를 하나 쓰고 휴식을 하기 위해 프랑스 남부 해안을 찾는다. 그러다 툴롱의 해안 카페에서 매춘부로 전락한 소피를 만난다. 그녀는 이사벨을 기다리기 위해 안내된 거실에서 친구를 기다리다가, 테이블 위에 있는 폴란드 보드카(주브로브카)를 발견하고 3개월 동안의 금주를 깼다. 그리고 술 취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이사벨의 집을 나가 곧바로 짐을 쌌다. “막상 결혼 날짜가 다가오니까 예수 그리스도 같은 그 사람한테 막달라 마리아가 되어 줄 수 없더라고요. 자신이 없었어요.”
20) 런던으로 돌아온 몸은 엘리엇이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다시 리비에라로 간다. 거기서 몸은 엘리엇의 임종을 보고, 이사벨 일행과 엘리엇의 장례식을 치른다.
21) 두 달 후. 몸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이사벨 일행과 파리에서 만난다. 엘리엇은 이사벨에게 많은 유산을 남겼고, 그레이는 그것으로 재기할 작정이다.
22) 라신의 연극을 관람하던 극장에서 몸은 그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래리를 다시 만난다. 연극 관람이 끝나고 카페에 앉은 몸은 래리로부터 이사벨과 파혼하고 난 후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듣는다(11번에 나온 6개월간의 탄광 체험과 벨기에·독일 여행은 이때 듣게 된 것이다. 작가는 뒤늦게 알게 된 이 일화를 시간 순서에 따라 앞에 배치했다). 탄광과 시골 여행을 마친 래리는 1년 동안 본에서 하숙하면서 그곳의 대학 도서관엘 다녔고, 그 후엔 알자스에 있는 베네닉트 수도원에서 3개월 동안 머물렀다. 수도사는 되지 못하겠다는 래리에게 수도원의 신부는 “당신은 하느님은 안 믿지만 매우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 당신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이곳이 될지 다른 곳이 될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겠지요”라고 말해준다. 래리는 파리로 돌아와 수잔을 만나 여름 동안 동거하고 나서(14번에 설명), 스페인의 세비야로 갔다. 거기서 군대 간 애인의 제대일을 기다리는 여자와 또 한 번 짧은 동거를 마치고 가을에 인도로 향했다. 그의 나이 스물셋일 때였다. 인도에서 스승을 만난 래리는 9년 가까이 수행 생활을 하다가 문득 다시 “서양 옷”을 찾아 입고 스승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가 몸에게 설명한 바는 이랬다. “이 생의 업業을 모두 이루고 나면 더 이상 윤회해선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런 생각이 들자 당혹스럽더군요. 저는 몇 번이고 다시 살고 싶었죠.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 아무리 많은 고통과 슬픔이 따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끝없이 환생해야만 제가 갈망하는 모든 것들, 저의 정력과 호기심 등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래리는 인도인들이 ‘환생’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게 된 까닭은 침략자들에게 거듭 약탈을 당하면서 인생의 나쁜 면만 보게 되었기 때문이라면서, “하지만 우리 서양인들, 특히 우리 미국인들은 쇠퇴와 죽음, 배고픔, 목마름, 질병, 노화, 슬픔, 망상 따위에 압도당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한다. 아침 해가 밝도록 지난 얘기를 한 래리는 자신의 “도제 기간은 끝났”다면서 세 가지 결정을 피력한다. 지금까지 유용하게 써왔던 양부의 유산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과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신의 방황을 기록한 책 한 권을 쓰는 것.
23) 그 다음해 4월. 프랑스 남부의 카프페라의 별장에 있던 몸은 툴롱 경찰서로부터 살해된 소피의 신원 확인 요청을 받는다.
24) 툴롱의 일을 마치고 영국으로 가던 몸은 파리에 들러 이사벨을 만난다. 그리고 가봉을 하러가기 위해 소피가 이사벨의 아파트에 들렀던 날 ‘내가 여태껏 거실 탁자에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술병이 왜 거기 있었느냐?’며 이사벨을 추문한다. 이사벨은 소피가 진짜 술을 끊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또 한 잔이라도 마시면 자존심 때문에 그녀 스스로 사라질 것을 예견하고 그 술병을 거실 탁자에 놓아두고 일부러 늦게 귀가했다. 이사벨은 소피가 래리와 결혼하는 걸 막기 위해 리츠 호텔에서 술을 끊은 소피를 향해 맛대가리 없는 폴란드 보드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술인 척 연기”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곁에 두고자 했던 래리는 영영 이사벨을 떠났다. 래리가 미국으로 떠났다며 “그 친구의 미국은 이사벨의 미국과는 고비사막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고 몸이 말하자, 이사벨은 “이제 진짜 그 사람을 잃은 거군요”라고 후회한다.
25) 그 후 몸이 다시 파리에 들렀을 때 이사벨 일행은 미국으로 떠났고, 래리든 누구든 다시 만나지 못했다.
워낙 500쪽이 넘는 분량이긴 하지만, 요약이 이처럼 긴 것은 이야기가 시간을 따라 흐르는 게 아니고, 화자가 장소를 바꾸는 대로 이야기가 흐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간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장소가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 장소들을 다 ‘장면화’해야 한다는 데에 이 소설을 요약하는 난점이 있다.
작중에서 줄곧 래리로 불리우는 로렌스 대럴은 열여섯 살 때부터 비행기 조종법을 배우기 시작해서, 열일곱 살 때는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아래는 그가 비행에 매혹된 이유다.
(…) 저는 하늘을 나는 게 너무 좋았어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죠. 굳이 말로 표현하면, 뿌듯하고 행복한 기분이랄까? 허공에 떠 있으면 나 자신이 아주 위대하고 아름다운 무언가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어요. 대체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도 몰랐죠. 제가 아는 거라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2000피트 상공에 혼자 더 있으면서도 어딘가에 소속된 느낌이 들었다는 것뿐이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정말 그랬어요. 거대한 양떼 같은 구름 위를 날 때면 한 없이 편안한 기분이 들었죠.
비행에서 느끼는 저 형용할 수 없는 황홀감과 위대하고 아름다운 무엇의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압도적인 일체감은 래리가 타고나면서 간직한 신에 대한 동경일 것이다. 하지만 공중전 중에 래리를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친구의 죽음은 신에 대한 래리의 무조건적인 동경과 일체감을 깨트렸다. 그 이후에 이어진 10여년 넘는 방황은, 전쟁이 앗아간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한 과정이다.
래리는 잃어버린 마음의 평화를 인도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22번에서 보았듯이, 9년에 가까운 인도 생활은 그에게 합리주의와 과학 문명의 첨단 기지인 고향(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만든다. 22번 요약에는 그런 결심을 하게 만든 이유가 나름 고백되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미국에서 하려는 일, 즉 인도에서 얻은 마음의 평화를 ‘어떤 방식을 통해 계속 유지시켜 나갈 것인가’에 관한 게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렇게 하겠단다.
[평생 렌즈에 광내는 일을 했다던 스피노자처럼] 저도 차를 닦거나 카뷰레터를 만질 때면 머릿속이 해방되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기분 좋은 성취감이 느껴지죠. 물론, 정비소에서 영원히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오랫동안 미국을 떠나 있었으니 미국에 대해 새로이 배워야겠죠. 그래서 어느 정도 정비소 일을 하다가 그다음에는 트럭 운전을 해 볼 생각입니다. 그럼 미국 전역을 돌아다닐 수 있을 테니까요.
과학 문명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과학 문명이나 과학 문명의 산물인 기계·기술을, 신이 깃든 물활론의 대상으로 여기겠다는 것, 이것이 합리주의와 과학 문명의 첨단 기지인 미국에서 래리가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다.
이 기괴한 방법은 좀 더 많은 연구와 조명이 필요한 주제다. 기계·기술을 거부나 파괴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신의 뜻이 거주하는 생명체’로 여기거나 ‘도道에 다가가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이런 생각은 과문하지만, 몸이 이 소설을 썼던 1944년에는 무척 낯선 게 아니었을까? 그런 뜻에서 『갈매기의 꿈』을 비롯한 많은 작품에서 ‘비행기를 잘 조종하는 것은 마음을 잘 조종하는 것’이라고 말해 온 리처드 바크와, 『모터사이클과 선』(대운당, 1981)을 통해 ‘모터사이클을 선의 동반자’로 받아들인 로버트 M. 퍼시그는 모두 『면도날』에 나오는 래리의 적자들이라고 말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