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0일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민음사, 2007, 세계문학전집 137)을 읽다. - 서머싯 몸은 본서가 속해 있는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에도 있는 『인간의 굴레에서』와 『달과 6펜스』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두 장편을 읽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생각이 좀 달라진다. 위의 작품들은 ‘3종 세트’기 때문이다. 『인간의 굴레에서』가 한 남자의 성장담이고 『달과 6펜스』가 예술가의 성장을 다룬 ‘예술가 소설’이라면 『인생의 베일』은 예술가도 남자도 아닌, 평범한 여자의 성장담이다.
여주인공 키티는 사교계에 스물다섯 살이 되었는데도 청혼자가 나타나지 않는 미모의 아가씨다. 그녀의 아버지 버나드 가스틴은 근면하지만 출세에 대한 아무런 의지가 없는 하급 변호사고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평생 무시했다. 청혼자가 없어서 초조해진 가운데 열여덟 살밖에 안 된 여동생 도리스가 준 남작의 외아들이자 전도유망한 옥스퍼드 학생과 약혼을 하자, 동생보다 늦게 결혼하게 될 처지에 빠진 키티는 홍콩에서 신부를 구하러 온 월터 페인의 청혼에 응한다. 그는 홍콩 총독부에서 일하는 세균학자다.
남편을 따라 홍콩으로 온 키티는 결혼 생활 석 달도 채 못 되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남편은 과묵하고 융통성이 없는데다가 관운官運 또한 밝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서로가 사랑하는지에 확신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마흔 살 난 총독부 차관보 찰스 타운센드를 만나, 불륜 관계가 된다. 키티는 찰스와 만나면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게 되고 내심 남편을 웃음거리로 여긴다. 작중의 설명을 모으면, 키티와 월터의 무미건조한 결혼 생활은 2년째며, 키티와 찰스는 1년째 연인 관계를 맺고 있다.
주로 중국 골동품점의 별실에서 만나지만, 남편이 직장에 가고 없는 틈을 타 찰스를 집안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던 키티는 시간이 흐르면서 남편과 이혼하고 찰스와 결혼할 것을 꿈꾼다. 그러면서 월터를 1분 1초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때, 갑작스레 귀가한 남편이 키티에게 대화를 청한다. 최근 메이탄푸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사람이 파리처럼 죽어가고 있는데 자신이 방역 책임자로 그곳을 지원했으며 키티도 함께 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키티가 남편의 일방적인 권유를 울면서 거절하자 월터는 “그러면 나도 안 가겠소. 즉시 고소장을 제출해야겠군”하고 말한다. 남편은 키티의 불륜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일격을 받고 키티는 신사답게 이혼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월터는 거절한다. 그러면서 “타운센드는 간통으로 고소를 당해야 당신과 결혼”할 것이고 그래야 “그의 아내는 너무나 수치스러워 그와 이혼”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는 1920년대였다. 키티는 남편을 가엾게 여기면서 타운센드는 월터가 자신과 그와의 불륜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내와 이혼하고 나와 결혼할 것이니, 그런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한다. 그러면서 “내가 당신과 결혼한 건 실수였”고 “난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으며 둘 사이엔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단지 동생 도리스의 결혼식 들러리가 되고 싶지 않아 월터와 서둘러 결혼했던 것이다.
세균학자의 냉정함으로 월터가 다시 제의한다. “타운센드 부인이 그녀의 남편과 이혼하겠다는 확답을 내게 주고, 법원으로부터 두 사람의 이혼 확정 명령이 내려지고 나서 일주일 안에 그가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내게 서면 동의를 한다면” 간통으로 고소하는 것을 포기하고 키티와 이혼을 해주겠다고. 자신이 넘친 키티는 흔쾌히 그 제의를 수락한다. 타운센드의 사무실로 찾아간 키티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결혼을 요구했으나, 타운센드는 아이들이며 자신의 미래를 핑계로 그녀의 요구를 피해 간다. 또 그는 키티가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남자는 평생을 같이 보내고 싶은 바람 없이도 한 여자를 아주 많이 사랑할 수 있”다고 응대하며, 애초에 자신은 그녀를 유혹하지 않았고 “당신이 나와 잠자리를 하고 싶다는 의사 표시가 명백하지 않았다면 나도 당신과 잘 생각은 분명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콜레라 발생 지역에 간다고 다 죽지는 않으니, 월터와 함께 메이탄푸로 갈 것을 권한다.
집으로 돌아온 키티는 남편이 하녀를 시켜 자신의 짐까지 싸는 것을 보게 된다. 월터는 타운센드가 키티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것을 미리 알았다. 메이탄푸로 간 월터는 몸을 혹사하며 중국인 환자들을 치료하고, 키티는 그곳에 있는 프랑스계 가톨릭 수녀원에 출입하게 된 이후로 그곳에 수용된 중국인 고아들을 돌본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자살 행위라며 누구도 먹으려고 하지 않는 야채샐러드를 일부러 먹는다 : “그들에게서 싫다는 말이 없자 [집안의 중국인] 요리사는 샐러드를 매일 내놓았고 그들은 매일 죽음을 유혹하면서 그것을 먹었다 (…) 질병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그것을 먹는 키티의 마음속에는 월터에게 복수하겠다는 악의뿐만 아니라 자신의 절망적인 두려움을 비웃는 조롱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이런 소설을 무척 좋아한다. 나는 온갖 종류의 속죄 이야기에 깊이 끌린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점점 보기가 힘들다. 속죄를 주제로 했던 소설 가운데 여태껏 가장 인상적인 것은 버나드 맬러무드 『점원』(을유문화사, 1979)이다. 가게에 들어가 강도질을 했던 주인공이 죄책감에 못 이겨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망해가는 가게의 점원이 되어 주인을 위해 가게를 살리고자 고군분투했던 그 우스꽝스러운 소설은, 제일 마지막에 비유대인 주인공이 주인의 외동딸을 사랑하게 되면서 유대인으로 개종해 버리고 만다.
『인생의 베일』의 키티는 수녀원에서 아이들을 위한 봉사를 하면서 타운센드를 잊게 되고, “자신의 영혼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월터를 마음속으로 동정하게 된 키티는 그를 사랑할 순 없지만 그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 “이봐요. 우리 바보짓은 이제 할 만큼 하지 않았나요? 우린 서로에게 애들처럼 부루퉁해 있어요. 입 맞추고 친구가 되는 게 어때요? 우리가 연인이 아니라고 해서 친구가 되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두 사람은 끝내 친구가 되지 못했다. 메이탄푸에 온 지 몇 주 만에 월터는 콜레라로 죽는다. 키티는 정신착란에 빠진 그에게 “당신이 날 사랑했다는 걸” 안다면서 “부디 나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하고 처음으로 “내 사랑”이라고 말한다. 월터는 아내의 말에 “죽은 건 개였어”라는 알 듯 말 듯한 유언을 남긴다. 메이탄푸에서 만나 짧은 순간에 키티와 친구가 되었던 워딩턴이라는 영국인 세관 관리는 그 말이 18세기 영국 작가 올리버 골드 스미스의 시 「미친개의 죽음에 관한 애가」의 마지막 구절이라고 가르쳐 준다. 주註에 따르면 그 시는, 어떤 마을에 사는 남자가 잡종개를 만나 친구가 되었는데 어느 날 그 개가 남자를 물자 사람들이 미친개에 물린 남자가 죽을 거라고 법석을 떨지만, 남자는 상처가 낫고 정작 개가 죽었다는 내용이다.
키티는 남편을 장례 지내고, 타운센드의 아이라고 추측되는 임신을 한 채 홍콩을 거쳐 영국으로 귀국한다. 귀국 직전에 그녀의 어머니는 병사했고, 어머니의 장례를 마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아버지는 식민지인 바하마의 재판장으로 임명된다. 소설의 마지막은 키티가 바하마로 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인데, 이 마지막 대목은 이 소설을 다시금, 전체적으로 조명하도록 만든다.
복기하듯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강조된 것처럼 키티의 아버지는 한번도 “집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적이 없었고 그저 당연한 존재였으며 가족에게 더 화려한 것을 제공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다소 멸시를 받아야 했”다. 키티의 어머니는 남편의 평범함과 경제적 무능을 평생 타박하면서 살았고, 그걸 곁에서 지켜보았던 키티 또한 “아버지의 애정을 얻기 위해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미모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스물다섯 살 때까지 결혼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버지가 그녀에게 준 실망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즉 아버지와 달리 유능하고 장래성 있는 신랑을 찾다가 여동생에게 추월될 지경에 놓였던 것이다. 그런 키티가 부랴부랴 만난 남자가 월터였는데, 결혼식을 마치고 홍콩에 따라가서 실지 관찰을 한 결과 남편은 아버지와 같은 평범하고 전도가 없는 남자였다.
고난을 겪으며 터득한 그녀의 슬픈 통찰력은 “30년 동안 아버지의 심장을 좀먹었던 모든 고통이 희미하게나마” 보인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몰랐던 “독립된 인격체”에 대한 자각이 마음에서부터 움터 올랐다 “[뱃속의 아이가]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범한 실수를 그 애가 저지르지 않도록 잘 키우고 싶기 때문이에요. 어릴 적 모습을 돌이켜 보면 저 자신이 싫어요 (…) 내 딸은 자유롭고 자기 발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키울 거예요. 난 그 아이를 세상에 던져 놓고는 사랑한답시고 결국 어떤 남자와 잠자리를 갖기 위한 여자로 키우기 위해 평생토록 입히고 먹일 생각은 없어요.”
중국을 무대로 한 이 소설에서, 서양 작가에게 포착된 중국은 마을마다 서 있는 열녀문이다. 키티는 임지로 가는 길과 메이탄푸에 당도해서 그것을 보게 되며, 지속해서 그녀의 사색거리가 된다 : “언덕 꼭대기에 아치 모양의 문이 하나 보였다. 이제까지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이 저명한 학자나 열녀를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강에서 내린 후부터 그런 것들을 많이 지나쳐 왔다. 하지만 이것은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배경으로 유달리 환상적으로 보였고 그녀가 이제까지 본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것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의미심장함을 느꼈다. 그것은 그녀가 어렴풋이 감지한 위압감이었을까, 아니면 모멸감이었을까?”, “그러다가 그녀는 아치 모양의 기념문에 도착했는데 환상적으로 아름답던 형체가 갑자기 흉측한 괴물체로 변했다. 마치 힌두교 신의 움직이는 팔들처럼 윤곽선이 자유자재로 변했다. 그녀가 그 밑을 통과할 때는 비웃는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키티가 그곳에서 받은 인상 중에서 덕망 있는 과부를 추모하는 그 아치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컸다. 그것은 뭔가를 상징했지만 그것의 정체를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고 왜 그렇게 조롱하는 듯한 모순적인 분위기를 풍기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워딩턴은 키티와 함께 언덕을 올라갔다. 그들은 옆으로 방향을 틀어 잠시 월터의 무덤을 보고는 다시 위로 올라갔고 열녀문 앞에 도달했을 때 그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열녀문을 보면서 그 외관에서 풍기는 불가사의한 모순과 그에 버금가는 그녀 자신의 모순에 이제는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키티는 월터의 죽음에 겁박되어, 그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게 분명한 월터나, 월터와 그녀 사이의 추억을 뿌리치지 못하는 속절없는 과거(시간)의 열녀가 되고자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죽음은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다. 메이탄푸를 떠나는 키티는 부정한 여인이라는 강박과 열녀가 되지 못한 죄책감을 극복하고 자유를 느낀다 : “자유! 답답한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일 뿐 아니라 그녀를 짓눌렀던 애증 관계로부터 자유였다. 자유, 위협적인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모든 정신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유체 이탈된 한 영혼의 자유. 그리고 자유, 용기, 무슨 일이 생기든 개의치 않는 씩씩함이 그녀와 함께했다.”
선상船上에서 어렴풋이 느낀 그 자유의 내용이 “독립된 인격체”에 대한 자각이라는 것이 명료해진 것은 고향인 런던에 도착해서였다. 그런데다가 이 소설의 결말이 새로운 출발로 열려 있다는 것은, 공간의 이동에 따라 사고의 숙성과 확산이 되풀이되어 온 서머싯 몸의 소설적 특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