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9일
하근찬의 『여제자』(고려원, 1987, 고려원 소설문고 028)를 읽다. -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재까닥 사서 읽었다.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을 기대하면서. 두근두근… (‘두둥’이 아니다. ‘두근두근’으로 느끼는 사람과 ‘두둥’ 사이엔 차이가 있다. 정신분석은 그 차이를 크게 여긴다.)
여제자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가령 이오네스코의 단막 「수업」에 나오는 희생자가 여학생이 아니라 남학생이었다면, 애초부터 작품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이오네스코의 작품은 물론이고 실제의 여제자가 연상시키는 것은,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다. 보통 카니발리즘이라고 하면 ‘식인食人’ 즉 인육을 먹는 행위를 말하지만, (남)선생과의 관계에서 여제자는 제 살이 먹히는 게 아니고 정신적으로 먹히는 것이다. ‘남선생’이라고 쓰지 않고 ‘(남)선생’이라고 쓰는 것은, 여제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제자들은 성별과 상관없이, 성별과 상관없는 선생들에게 자기 정신을 위탁한다. 소위 ‘참교육’은 그런 불길한 교육을 시정하고, 음습한 사제관계를 거부하고자 한다. 하여튼 선생이 남자일 때 여제자는 그저 별난 상상 한 가지를 더 제공할 뿐, 교육에는 카니발리즘과 유사한 요소가 있다(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제자만 선생에게 먹히는 게 아니라, 선생도 제자에게 ‘내 살이 뜯어 먹히는 것’과 같은 두려움이나 피해의식을 느낀다. 어영부영하는 한심한 선생들 말고 진짜 선생들은, 자신이 제자에게 먹힌다는 상상을 즐겨(혹은 즐겁게)한다. 좋은 제자들은 선생의 정신을 문자 그대로 ‘살을 씹듯’ 한다).
읽었지만 기억에 없는 소설이자 보다가 말았던 영화라서 글을 쓰는 도중에 잠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던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여수사관 클라리스 스털링은 수사관이라는 위치 때문에 살이 먹히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한니발 렉터 박사에게 정신이 먹힌 것이다. 이런 관계가 정상적인 상황에서 오래 지속되었다면 스털링은 렉터 박사 주위에 소문을 만드는 ‘애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의 끝 장면에서 사건을 해결한 스털링은 렉터의 축하 전화를 받게 되는데, 그 장면은 사제지간에 벌어진 카니발리즘을 완성하는 대목이다. (‘여제자’가 카니발리즘을 연상케 한다는 두 번째 문단을 써놓고, <양들의 침묵>에 관한 정보를 검색하다가, 불운하게도 카니발리즘이란 단어와 조우했다. 기껏 재치를 짜낸 나로서는 좀 억울하지만, 무릇 천하의 이치를 궁구한다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다 이처럼 비슷하다. ←농담).
한 마디로 하근찬의 『여제자』는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류와 완전히 다르다. 금년에 쉰 살이 된 소설가 강수하는 30여 년 만에 여제자들의 전화를 받고, 열여덟 살 시절 처음으로 선생으로 부임했던 산리국민학교 시절을 기억한다(그때는 열여덟 살 나이로 선생이 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부임한 이듬해에 5학년 혼합반을 맡았는데, 그때는 아직 의무교육이 제대로 시행되기 이전의 어수선한 해방 직후라 열대여섯 살씩이나 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강 선생은 아이들에게 글쓰기 교육을 제대로 시킬 양으로 반원들에게 일기를 쓰게 하고, 매주 학생들의 일기를 거두어 첨삭 지도를 했다. 그러기를 2~3개월째, 어느 여학생의 일기 가운데 강 선생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게 된다. 윤홍연이라는 학생의 일기였는데 이런 거였다 : “나는 달밤이면 아무 까닭도 없이 울고 싶어진다. 오늘밤도 나는 마루 끝에 앉아 밤이 이슥토록 달을 바라보다가 혼자 눈물을 흘렸다.”
강 선생과 세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윤홍연은 일기장을 강 선생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 쓰듯이 했고, 강 선생은 간혹 홍연을 “왈칵 껴안아 버리고 싶은 충동”도 느끼기도 했지만, 선생으로서의 체통을 지키는 것과 함께 홍연에게 잘못된 신호를 주지 않기 위해 러브 레터와 같은 일기를 외면한다. 그러던 중에 여섯 살 연상의 양순정 선생이 전근을 와서 잠시 그녀를 짝사랑하기도 했지만 양 선생은 부임한 지 반년 만에 결혼을 하고 퇴직을 한다. 그런 후 강 선생도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는데, 전근을 온 학교로 홍연이 쓴 혈서가 도착한다 : “선생님, 그립고 그리운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저는 지금 울고 있어요.” 강 선생은 며칠을 두고 고민을 하다가 답장 쓰기를 포기한다. “그것이 만일 혈서가 아니었다면, 연필로 그저 선생님이 보고 싶고 그립다는 그런 사연을 적었더라면” 답장을 썼을 것이지만 “상대편은 피 글씨로 그리움을 호소하는데, 이쪽은 점잖은 스승의 목소리로 답장을 보낼 수는 없”었다.
처음 전화가 온 사흘 뒤, 홍연을 비롯한 세 명의 여제자가 강 선생 집을 방문한다. 그때 강 선생은 홍연의 왼쪽 새끼손가락이 짓뭉개져 있는 것을 보고 사연을 묻고 싶었으나, 다른 두 제자가 있어서 묻지 못한다. 30여 년 만의 해후를 마치고 버스 정류장까지 제자들을 배웅해준 강 선생은 버스가 멀어져가자 “다음에 홍연이한테 전화가 오면 그 왼손 새끼손가락에 대해서 물어봐야지”라는 결심을 한다.
이 소설을 읽는 중에 알게 되었지만 『여제자』는 <내 마음의 풍금>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좋아하는 배우가 무려 세 명(이병헌·전도연·이미연)씩이나 나오는 이 영화는 차후에 보기로 하고, <내 마음의 풍금>으로 둔갑해 버리고만 『여제자』라는 소설 제목에 대해 한 마디. 『여제자』라는 제목은, ‘제목은 이렇게 지으면 안 된다’는 사례가 되어야 할 만큼 잘못 지은 제목이다. 자신의 패를 다 보여주는 제목, 아무런 중의重義를 갖지 못해 상징성이 다 빠져나간 제목, 작품을 다 읽고서도 물음표로 남지 못하는 이런 노골스러운 제목에 정직상正直賞을 줄 수는 있지만, 절대 써서 안 되는 제목이다. 소설 제목으로는 『여제자』보다 ‘새끼 손가락’이 훨씬 낫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감독과 영화사는 이 소설의 영화 제목으로 <내 마음의 풍금>을 선택했다.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영화용 제목을 따로 갖을지 말지는 양자 간의 합의 사항이라서 『여제자』가 <내 마음의 풍금>으로 둔갑한 것은 문제 될 게 없다. 더 원칙적으로 말하면 원작자는 영화사나 감독에게 ‘내 소설 제목을 영화 제목으로 써서는 안 되고, 내 원작을 쓰려거든 영화용 제목을 따로 지으라’고 요구해야 옳다. 왜냐하면 그게 자신의 원작(소설)과 자신의 작품이 아닌 영화를 구분 짓는 방법이다. 그런데 대개의 작가들은 자신의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제목이 바뀌는 것에 대해, 마치 자기 영혼이라도 빼앗긴 양으로 분노하거나, 그런 일을 영화사의 횡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은 그것과 반대로, 영화 제목을 달리할 수만 있다면 그게 작가의 영혼을 지키는 일이다(내 소설 제목이 영화화되면서 바뀌는 게 싫은 것은, 영화 제목이 내 소설 제목과 달라서 내 소설의 광고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국한되어야 한다).
자신의 소설이 영화화될 때 감독이나 영화사에 영화 제목은 소설과 달리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원작자인 소설가가 그 영화와 결별하는 지혜로운 결단이다. 나는 네 번이나 영화화된 내 소설의 제목을 다 바꾸도록 요구하진 못했지만(그때는 이런 문제를 생각하지 못했지만), 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네 편의 영화와는 그 어떤 연도 맺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게 자꾸 물었다. 내 원작을 거론하면서 ‘그 영화는 어땠느냐?’고! (이건 작가 노릇을 하면서, 내가 매번 받는 질문 가운데 가장 한심스러운 질문들이 아닌가?) 나는 두 번째로 영화화된 것은 극장에서 보고, 네 번째로 영화화되었던 것은 비디오로 빌려서 ‘재미있을 것 같은 장면’만 먼거리조종기remote control로 가속해서 보다가 그것도 재미없어서 도중에 반환했다. 그리고 한 번도 그 영화들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그것들은 내 원작이란 아무 자의식 없이, 이런저런 정보 취합을 통해 ‘볼만한 영화인가, 아닌가’에 따라 선택됐다. 그래서 어느 것은 영화관에서 보고, 어느 것은 비디오로 빌려 보고, 어느 것들은 보지 않았을 따름이다.
대개의 관객이나 독자들은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소설가가 썼던 바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 일례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주제 사라마구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가 아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눈먼 자들의 도시』의 있을 수 있는 다른 판본이자 여러 이본異本 가운데 하나지 『눈먼 자들의 도시』가 아니다. 하므로 그 영화를 보고 원작 소설을 읽은 양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일이다(<눈먼 자들의 도시>가 ‘있을 수 있는 다른 판본이자 여러 이본’인 까닭은, 원작 소설을 라디오 드라마·연극·무용으로 만들 수도 있고, 동화나 또 다른 장르로 각색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무리다.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영화용 제목을 따로 갖는 것은, 작가가 하등 부끄러워할 일도, 작가와 영화사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작가가 패한 것도, 작가의 자존심에 ‘기스’가 난 것도 아니며, 영화화되면서 바뀐 제목이 자신의 원작을 훼손한 것도 아니다. (물론 제목이 바뀌면서 원작이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문학은 원래 무수한 해석과 오독을 감수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사태와 반대로, 유·무명의 소설이 영화화되어 영화가 원작 소설보다 더 크게 이름을 떨치거나 원작보다 호평을 받아서, 본래의 소설 제목을 버리고 영화 제목으로 소설 제목을 바꾸어 다는 일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정작 작가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작태다. 하근찬은 1999년 <내 마음의 풍금>이 개봉하는 때에 맞추어 아예 『내 마음의 풍금』으로 제목을 바꾼 원작을 바다출판사에서 재간했다.
『여제자』를 읽고 나서 내친김에 같은 작가의 『화가 남궁 씨의 수염』(책세상, 1988)과 최근에 출간된 『하근찬 작품집』(지식을만드는지식, 2010, 지만지고전선집 0548)을 읽었다. 두 권 모두 하근찬의 단편집인데, 두 작품집에 실린 도합 21편의 작품 가운데 오직 「화가 남궁씨의 수염」만 겹친다.
하근찬의 작품으로는 「수난 이대」(1957)가 유명하지만 이념 과잉으로 빚어진 한국전쟁과 정면 대결하려고 했던 자세는 이어지는 「나룻배 이야기」(1959)·「흰 종이수염」(1959)에서 일찌감치 끝나고 한국전쟁 이야기가 재론된 「유령 이야기」(1978)·「소년 유령」(1978)에 와서는 역사에 미달한 ‘전설 따라 삼천리’가 되어버린다.
작가는 현실이나 오늘의 역사보다는 의고적擬古的인 세계를 더 선호한다. 말기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화가 남궁씨의 수염」(1985)이 분명히 그런데, 의고적 가치에 대한 경사는 초기 시절에 쓴 「왕릉과 주둔군」(1963)부터 말기의 「고도행」(1981)·「조상의 문집」(1984)·「공예가 심씨의 집」(1986)까지 줄곧 지속된다.
이 계열과 달리, 한국이 실제 경험했던 일제 식민 상황과 미국(서구)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는 작품군이 있다. 전자에 속하는 게 「족제비」(1970)·「일본도」(1971)·‘「두 축하연」(1979)의 후편’·「이국의 신」(1985)들 같은 작품인데, 하근찬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은 루쉰이 일본 침략 앞에 수동적이었던 자기 동포들을 희화화했던 개념인 ‘정신승리법’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족제비」의 고 생원은 하시모도 농장의 쌀을 훔쳤던 것이지, 독립운동이나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미화할 수는 없다. 또 「일본도」에 나오는 헌병 출신 친일파 처벌 역시 군중심리에 따른 감정의 폭발에 지나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후자에 속하는 「탈춤구경」(1976)·「산길을 달리는 오토바이」(1979)·‘「두 축하연」의 전편’과 같은 작품이다. 일제(일본)와의 대결에서는 정신승리법으로나마 대결해 보겠다는 과잉된 의지가 있었으나, 미국(서구)을 맞닥뜨려서는 그런 의지가 아예 없어 보인다. 서구화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수긍과 서구 문화에 대한 압도적인 동경 속에서, 잔광으로 남아 있는 의고적 세계가 쓴웃음을 만드는 아이러니의 세계가 「탈춤구경」과 「산길을 달리는 오토바이」인데, 의고적 가치와 근대, 우리 것과 서구라는 양세계에서 찢어지는 이런 아이러니의 세계가 과잉 의지를 보여주는 전자의 작품보다 진정성이 있다.
좀 특이하게도 ‘「두 축하연」의 전편’은 일제 식민 상황과 미국(서구)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는 위의 작품군 가운데, ‘의고적 가치/우리 것’이 ‘근대/서구’에 만방萬放으로 승리한 작품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신의 생일날 직원들로부터 영어로 된 생일 축하 노래를 선사 받고 나서, “우리말로 된 생일 축하의 노래를 누가 한번 만들어 보”라고 지시하는 회장이 60이 넘도록 독신이며 2세가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의 극치다. 어느 후대가 있어, 우리말로 된 생일축하 노래를 당신 대신 들을 수 있겠는가?
거론하지 않은 몇 작품은, 작의가 불분명한데다가 수준도 떨어진다. 『화가 남궁씨의 수염』의 작가 후기에서 작가는 “과연 뜻대로 되었는지는 자신이 없지만”, “작품들 거의 대부분이”, “사소설의 형식을 취하되, 신변잡기에 머물게 하지는 않으려고 애를” 썼다는데, 이것들은 뜻대로 되지 않은 작품들이다. 작가의 의고적 세계는 전통 사회의 몰락과 함께 남성성의 거세를 수반한다. 하근찬 작품에서 자주 나오는 ‘수염’은 남성성의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