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8일
채만식의 『소년은 자란다』(랜덤하우스중앙, 2005)를 읽다. - 열아홉 살 때인가 스무 살 때인가에 읽었던 『탁류』는 지금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시절은 1년간 100여 권이 넘는 책을 읽을 때였다. 주로 외국 소설이었지만 김동리·박화성·박영준·황순원… 등도 읽었다. 그러나 기억나는 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젊은 그들』과 황순원의 『일월』뿐이다. 그런데 이것도 내용을 기억해서라기보다는, 재미있게 읽었다는 기억에 불과하다.
『탁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창작과비평사판 『태평천하』(1987)를 두 번이나 읽은 것은, 『소년은 자란다』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도록 해준다. 까닭은 『태평천하』에 나오는 두 대목이 그만큼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은 이라면 다 기억하는 “오냐,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49쪽), 그리고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守令들이 있더냐? …재산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요,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末世넌 다 지나가고오… 자 부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명 동병動兵을 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 것 지니고 앉아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254쪽)
『태평천하』는 중일전쟁이 확전되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이 대거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하던 1938년에 발표됐다.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태평천하 타령’이었다니, 채만식 특유의 반어와 풍자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반어와 풍자는 반어와 풍자로 끝나지 않는 그 시대의 진실이기도 해서, 1938년을 기점으로 민족개조론을 주창하기 시작한 허다한 친일 인사들은 『태평천하』에 나오는 윤직원 영감과 똑같은 현실 인식을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해방 직후의 풍속을 그리고 있는 『소년은 자란다』는 작가가 타계하기 1년 전인 1949년에 집필되었으나, 생전에 발표되지 못하고 1972년에서야 <월간문학>에 유작으로 발표됐다. 열세 살 난 영호와 여덟 살 난 여동생 영자가 주인공인 이 소설은 작가 채만식이 ‘소년은 자란다’는 제목 속에 해방에 대한 자신의 기원을 담은 작품이다. 조선에서 살다가 18년 전에 만주 대리수구大梨樹溝로 이주했던 영호의 부모는 나라가 해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을 결심한다. 영호네 다섯 가족은 고국으로 가는 차편이 있다는 낙타산으로 향하던 중에 어머니가 만주인에게 겁간을 당해 숨지고 채 돌도 나지 못한 젖먹이 여동생도 따라 죽는다.
만주에서 돌아온 귀향민들을 당시엔 전재민戰災民이라고 불렀는데, 전재민은 ‘전쟁으로 재난을 입은 사람’을 뜻하니 일제 강점기의 곤궁을 피해 만주로 떠났던 조선인들을 온전히 가리키는 명명은 아니다. 서울에 도착한 영호네 가족은 농사를 짓기 위해 무작정 목포가 종점인 기차표를 끊고 내려가다가,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내렸던 대전에서 아버지가 모르고 서울행 기차를 타는 바람에 전라선 객차에 탄 아이들과 헤어지게 된다. 전라선 기차를 타고 내려가던 영호와 영자는 이리에서 내려, 아버지가 기차 정거장을 되짚어 오기를 기다리며 넉 달을 보낸다.
전재민은 애써 가꾼 농토며 재산을 헐값에 처분하거나 버리고 고국을 찾았다. 그들을 고향으로 이끈 것은 “고국에는 왜사람들이 살다가 내놓고 간 좋은 집들이 많을 터였다. 독립이 된 고국에서는 순사가 예전같이 딱딱거리거나 함부로 때리지 않고 친절할 것이다. 또 동포들도 친절하여 일본 사람들이 살다가 내놓고 간 집을 타국에서 고생하던 동포에게 내놓는 데에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70~71)와 같은 기대에서였다.
그런 기대는 말짱 헛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전재민을 이국에서 “고생하다가 해방된 고국을 찾아 돌아온 반가운 동포”(135쪽)로 대접하지 않았다. 또 “순사는 여전히 백성들에게는 무서운 물건인 채로 그대로”(139쪽)거나 순사들이 휘두르는 힘은 오히려 “일제 시대를 우습게 볼 정도로 높아졌다.”(149쪽)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한테 공출이라는 명분으로 강제로 빼앗아 간 물자들은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맞았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나라에서 맡아 가지고 알맞은 값에 팔든지 해서 “이를테면 학교를 세운다든지, 길을 고친다든지” 해야 옳았으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거간꾼들이 모여들어 “군정청의 관리네 미군의 통역이네 하는 이를 끼고 (…) 미국 사람들에게 술과 선물과 색시와 돈을 처안기고는 몰래 넘겨받”았으니 “그것은 멀쩡한 도적질”(이상 239쪽)이었다.
‘해방의 의미’는 이 작품에서 근저에 깔려 있는 중요한 물음으로, 채만식은 물론이고 당대인들은 조선인의 힘으로 성취하지 못했던 ‘독립’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옛날 왜사람이 앉아서 왕 노릇하며 조선 사람 못살게 굴었다는 총독부 거기에는 왜사람 대신 미국 사람들이 들어앉아”(139쪽) 있었다. 그래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젠장맞을! 이거 해방 잘못됐어, 잘못돼… 어서 해방을 고쳐 해야지, 큰일났어! 호랑이 한 마리를 내쫓았더니 사자하고 곰하고 두 놈이 앞마당 뒷마당에 들어앉은 꼴이 되었으니!”(143쪽)라고 내뱉었고, “이러다가는 본전도 못 찾는 해방이 되고 말지 모른다고들 생각했다.” (121쪽)
이미 일제가 망해버린 터라 ‘해방을 고쳐’할 방법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방을 고쳐’하는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친일 청산이 그랬다. 채만식은 미군 군정청이나 민주주의라는 요술방망이가 “매 맞은 친일파를 위하여 분풀이”를 해주는 것뿐 아니라, “친일파가 얼마든지 군정청의 높은 벼슬과 경찰의 중요 자리에 앉아 힘을 휘두르고 재물을 모으고 하는 것”(이상 151~152쪽)을 성토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작가는 “소련에 친한 사람들은 미국 군정을 반대하며 방해한다는 죄를 뒤집어썼다. 그런 뒤 잇따라 조선 사람 순사에게 붙잡혀 일제 시대에 많이 다녀본 감옥소 출입을 새로 하게 되었다”(150쪽)면서 일제 청산이 되지 않는 이유를 미소 냉전에 야합하는 남한의 반공주의로부터 그 원인을 찾았다.
해방이 된 직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은 것은 “민주주의”였고, 가장 많이 본 것은 “선전물과 오줌똥”(이상 150쪽)이라고 한다.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위의 문단에도 잠시 나와 있지만, 오늘도 잘 모르는 민주주의를 그때 사람들이 바로 알았을 리 없다. 그저 “당장 저 좋을 대로만 하면 그만”(151쪽)인 게 민주주의였을 것이다. 그러면 오줌똥은? 오줌똥은 이 작품의 중요한 주제다.
(…) 그런 좋은 길인데, 길 옆은 온통 똥과 오줌을 갈겨 놓은 자국이었다. 마침 앞서 가던 아버지가 한눈을 팔았는지 하마터면 똥을 밟을 뻔하다가 이크 하고 놀랐다. 그러고는 침을 퉤퉤 뱉으면서 다시 걸으며 두런거렸다.
“에이! 길에다 똥오줌을 싸라는 해방인가 보다!”
그 말에 영호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어요, 아버지?”
“어디가 이랬니? 퍽 깨끗했지.”
“그랬는데 어째 지금은 이렇게…”
“난들 알겠니.”
영호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모를 일이었다. 설마 아버지가 아까 혼잣말로 두런거린 대로, 똥오줌을 싸라는 해방이야 아닐 것인데… 남에게 나라를 뺏기고서 남에게 매어 살다가 해방이 되어 도로 찾아 나라가 내 것이 되었으면 전보다 길 같은 것만 하더라도 더 깨끗이 하면서 아껴야 할 텐데… (130~131쪽)
이리 역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넉 달 사이에 두 남매는 거의 거지꼴이 되었다. 그러나 영호는 거지가 되지 않았다.
이 정거장도 전재민이고 여느 찻손님이고 할 것 없이 정거장 안팎을 온통 변소로 만들어 놓았다. 영호는 자기는 절대로 그러지 말기로 하고 그대로 지켰다. 영자도 오빠가 이른 대로 지키고 어기지 않았다.
자던 자리를 치우고 변소를 다녀온 뒤 영자를 데리고 정거장 안의 물통으로 가서 세수를 하였다. 맹물로나마 이를 닦고 얼굴을 훨훨 씻고 다리와 발도 씻었다. 영자도 제가 곧잘 그렇게 씻었다. 세수를 하고 나서는 아까 벗은 옷을 빨았다. (189쪽)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한 달 만에 돈이 떨어진 영호는 역전의 여관에서 잔심부름과 호객일을 하게 된다. 열네 살짜리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힘든 일이지만 괴로워하거나 꾀를 내지 않는 영호, 손님들의 색시 심부름을 해주면 용돈이 두둑해질 줄 알면서도 굳이 그런 심부름에 응하지 않는 영호, 그러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금만 틈이 있으면 놀지 않고 여관에서 받는 몇 가지 신문”과 “손님이 사서 보다가 버리는 잡지”(235쪽)를 읽는 영호의 모습에는 ‘소년처럼 자라날’ 신생 국가에 대한 채만식의 염원이 담겨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이 넘어갈 때까지, 동네 사람들에게 묵처럼 무르다고 ‘묵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버지… 아버지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제는 세상을 떠난 것으로 여길 수밖에는 없었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라는 영호의 혼잣말과 “영호, 저 홀로 이 세상에 있다. 영호 저 자신은 물론 영자에게도, 이 세상에는 오로지 영호 저 하나만 있을 따름이었다. 부모도 없고, 영자를 데리고서 저 혼자였다. 그러기에 영호는 영자를 데리고 저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영호는 정거장에 나가면, 그 길에 방을 하나 얻고 조그마한 장사라도 하자면 얼마나 들겠는지, 부디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254~255쪽)는 마지막 문단은, 그야말로 아무런 조력자 없이 홀로 한다는 뜻에서 진정한 독립이며, 채만식이 생각한 ‘해방을 고쳐’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이 작품은 작가가 작고하기 1년 전이자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에 집필됐으나, 활자화는 1972년 9월에서야 이루어졌다. 왜 이렇게 발표가 더디었을까? 아래 대목은 영호네 가족이 귀국을 하기 직전에, 집으로 놀러 온 영호의 조선족 학교 담임선생이 술을 마시며 아버지에게 했던 말이다.
우리 조선 독립에 누구 공이 많은가를 따질 때 1등 상을 받을 사람이 누구누구이겠는지 아시겠어요? 1등 말입니다… 조선 안에 사람으로는 비밀 운동을 하던 공산당들입니다. 밖에 나온 사람들로는 상해 임시정부 사람들과 중국 군대에 들어간 조선 독립군입니다. 이 만주서는 영만이가 따라간 그 패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1등 상은 그 사람들이 받을 참이에요. (103쪽)
위 인용 중에 나오는 ‘영만’이는 누구며, 영만이가 따라갔다는 ‘그 패’는 또 누굴까? 38~39쪽에 답이 있다. 스무 살 때 집을 나가 지금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스물여덟 살일 영만은 “영호의 배다른 형”이고, 형이 따라나섰던 그 패는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당 빨치산 부대”다.
즉 이 작품은 대한민국 독립에 으뜸으로 기여한 사람으로 김일성을 꼽고 있으며, 대한민국 국부國父라고 숭앙된 이승만은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았다. 때문에 작중의 화자인 영호의 담임선생(영호네와 같은 오씨다)이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작품은 이승만이 권좌에 있을 동안 그리고 한국전쟁의 후유증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동안에는 발표될 수 없었다. 아주 당연한 추측이지만, 유족과 <월간문학> 편집자가 이 작품을 게재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1972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7·4남북 공동성명에 따른 화해 분위기에 고무되었던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