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7일
강준만·오두진의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커피와 다방의 사회사』(인물과 사상사, 2005)를 읽다. - 며칠 전에 양세욱의 『짜장면뎐』을 읽고, 작년에 읽었던 강준만·오두진의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커피와 다방의 사회사』를 다시 꺼내 보았다.
커피와 짜장면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라는 사실 외에도 공통점이 많다. 우선 둘 다 시커멓고, 전통적인 우리 먹을거리가 아니면서 한국인의 위와 입맛을 성공적으로 길들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때문에 짜장면과 커피는 오랫동안 물가안정품목에 포함되어 행정부의 가격 지도를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 반점에서 싼 짜장면을 먹고 그보다 더 비싼 커피집을 찾아가면 조소를 받을 만큼, 짜짱면과 커피는 서로 적대적이다. 짜장면은 전적으로 위와 상관되고 커피는 좀 더 입맛에 봉사한다. 짜장면이 위장을 채우는 음식이라면 커피는 오히려 공복空腹의 여유와 연관된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1888년,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과 슈트워드호텔이 생기고 거기에 부속다방이 생기면서부터다. 짜장면이 그랬듯이 커피도 개항지인 인천을 통해 들어온 것이다. 그때는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일본·중국이 쟁탈전을 벌이던 때였고 연이어 구미 제국들과 수호조약이 체결되던 시절이었으니, 커피의 전파와 보급에는 외국 사신들의 궁중 출입이 큰 역할을 했다. 궁중에서 사용된 커피의 그 당시 명칭은 ‘가배차’ 혹은 ‘가비차’였는데, 그것은 일본인들이 커피를 이르는 한자 ‘가배??’(일본 발음은 ‘가히’)를 독음讀音한 것이다. 반면 선교사나 상인들을 통해 커피를 접했던 서민들은 검고 쓴맛이 나는 게 마치 한약 탕국 같다고 해서 ‘양탕洋湯국’이라 불렀다.
왕실의 기호품인 커피는 중앙의 관료, 서울의 양반, 지방의 양반으로 점차 확대되었고, 개화된 지식인들의 애호품이 됐다. 서양에서 건너왔으니 커피는 당연히 서양문물의 상징이었을 테고, 당대의 지식인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개화 바람을 흡입한다고 생각했을 게 뻔하다. 그 가운데 재미난 것은, 조선 사람들은 커피의 쓴맛이나 특유의 향을 즐기기보다, 거기에 넣는 설탕 맛을 즐기고자 커피를 마셨다는 사실이다. 이런 버릇은 꽤나 끈질겼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이 대통령이 내외 기자와 회견을 마치고 나서 기자들에게 커피를 대접했는데, 문제는 우리나라 기자들이 유난히 커피에 설탕을 많이 탔던 것이었다. 하도 설탕을 많이 타니까 외국 기자들의 시선이 모두 설탕을 타는 우리 기자들의 손으로 쏠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은 외신 기자들에게 “Well. Your people use sugar for coffee, but we use coffee for sugar(당신들은 커피에 설탕을 타지만, 우리들은 설탕 먹는 재미에 커피를 마신다)”라고 말해 연신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순수한 커피 맛을 즐기기보다, 설탕이 커피와 어우러진 단맛을 즐기는 한국식의 커피 음용법은, 1974년 동서식품이 자체 개발한 커피 크림(‘프리마’)과 1976년 커피+크림+설탕이 혼합된 ‘커피 믹스’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식당과 겸업이 아닌 전업專業 다방의 원조는 1923년 지금의 충무로 3가에 일본인이 문을 연 ‘후다미二見’ 다방이었다. 거기에 갓 동경에서 새로운 사상과 풍습을 배워 온 문학가나 화가들이 꾀였다. ‘작은 동경’이라는 당시의 진고개(충무로)와 일본인들이 주로 활동하던 명동과 종로엔 일본인이 경영하는 다방이 수없이 들어섰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최초의 다방이 1927년 종로 관훈동 입구에 문을 열었다. 이름은 ‘카카듀’. 명동백작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소설가 이봉구는 카카듀가 러시아 말이라고도 하고 스페인의 여성 이름이라고도 했는데, 강준만·오두진이 밝힌 바에 따르면 프랑스혁명 때 경찰의 눈을 피해 모였던 비밀아지트인 술집 이름이 카카듀였다고.
1940년 당시 일본 동경 시내에만 다방이 3천여 개나 있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 책엔 서울의 다방 숫자가 집계되지 못한 채 “1940년, 서울의 다방은 이미 넘칠 만큼 많았다”고만 적고 있다. 이처럼 커피가 들어오면서 다방과 ‘다방 문화’가 따라서 생겨나는 것은 우리나라나 일본만의 특별난 풍경은 아니다. 커피와 살롱, 살롱과 토론 문화의 연계에 대해서는 ‘지식인과 지식사회’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루이스 S. 코저의 『살롱 카페 아카데미』와 같은 책이 이미 나와 있는데(이 책에 대한 독후감은 나의『독서일기』 1권 63~64쪽에), 최근에 볼 수 있었던 스튜어트 리 앨런의 『커피견문록』(이마고, 2005)의 서문도 커피 하우스와 ‘근대적 공공성 제도’의 연관성을 지지한다.
[커피를 종교 의식에 이용했던 커피의 원산지 에티오피아나 이슬람과 달리] 유럽에서는 종교보다 세속적인 공간에서 커피 문화가 더욱 발달했다. 커피가 들어오면서 런던과 파리를 비롯한 도시 곳곳에서 카페가 속속 등장했고, 사람들은 카페에 모여 정치, 사회, 예술을 이야기했다. 카페에서 예술이 꽃피고, 민주주의와 혁명이 태동했으며, 나아가 근대적 신문이 탄생하고, 보험을 비롯한 근대 금융업이 잉태되었다. “커피의 출현이 창조적 사고에 큰 몫을 했다”는 쥘 미슐레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랬다. ‘다방 취미’라고 불렸던 일제 강점기의 다방 문화는 문인·화가·영화인들에게 휴식과 영감을 주는 사랑방이었고, 각종 정보와 일거리를 나누어주는 사무실이었다. 다방을 근거지로 삼는 이런 다방 문화는 비단 지식인이나 예술가만 향유한 게 아니었다. 전화가 희소했던 시절, 다방은 변변한 사무실이 없는 사업가들이나 실업자들에게도 시대에 변치 않는 든든한 둥지가 되어 주었다.
1967년 체신부 조사통계에 따르면, 전화를 가장 많이 쓰는 업체 1위는 관공서나 일반 기업이 아니라 다방이었다. 다방 전화는 사람들의 연락 장소이자 섭외기관이었고 레지는 손님들의 메모를 챙겨 주는 비서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 다방에는 일반 공중전화와 달리 수신과 발신을 함께할 수 있는 핑크전화라는 것이 설치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상류 계층이나 지식 종사자들이 독차지했던 커피는 해방과 동란 이후 대중과 좀 더 가까운 게 됐다. 미군 식량에 포함되어 있었던 인스턴트커피가 톡톡히 그 역할을 했는데, C레이션 박스째 두메산골 마을에 유포된 커피는 사용법을 모르는 학생들 손에 들어가 회충약으로 둔갑했고, 담뱃진에 물든 노인들의 거처에서는 방향제로 쓰였다. 그러면서 검고 쓴 인스턴트커피는 차츰 한국인의 생활 깊숙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서 또 한 번 스튜어트 리 앨런의 『커피견문록』을 펼쳐 볼 필요가 있다.
미 육군 군수부는 「군용 커피」라는 자료에서, 군은 1800년대부터 ‘군사적으로 유용한’ 커피를 개발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가볍고, 장기 보관이 가능하며, 먹기가 간편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농축된 고체 덩어리’가 처음 탄생했고, 의회는 1862년에 이를 군용 커피로 승인했다.
우리는 지금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커피에 대한 비화를 읽고 있다. 1862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군용 커피는 침으로 녹여 먹는 고체 덩어리였는데 그것은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 사라지고, 1903년 오늘날의 인스턴트커피와 똑같은 형태의 ‘가루 커피’가 생산됐다. 이 가루 커피의 첫 실험 무대는 제1차 세계대전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엔 수요가 급증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군인과 간호사 수백만 명은 인스턴트커피의 맛과 간편성을 퍼뜨렸고, 1958년이 되면 미국 내 커피 소비의 3분의 1을 인스턴트커피가 차지하게 됐다. 지은이에 따르면 “군용으로 개발된 인스턴트커피는 이후 미국의 커피 제조기술을 수십 년이나 후퇴하게 만들었다.”
다시 우리나라 커피 얘기다. 1950년대에 커피 한 잔 값은 쌀 한 되 값이었다. 쌀이 남아도는 요즘은 커피숍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 값보다 쌀 한 되 값이 더 싸지만, 한 가족의 몇 일치 식량이 커피 한 잔으로 날아가는 당시엔 커피가 낭비로 규탄받았다. 때문에 전량이 수입제인 커피는 외화 유출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박정희 정권 때는 자주 규제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군사 정권은 공무원들의 다방 출입을 금지하거나 커피 대체 음료를 개발하는 등의 방법으로 커피 소비를 막으려고 했다. 그래서 당시만 해도 흔치 않던 해외여행객의 우선가는 귀국 선물이었고, 불법 유통되던 미군부대 커피는 애지중지하는 귀물 중의 귀물이었다. 여기서 강준만·오두진이 찾아낸 조영남의 『놀멘놀멘(제1부):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고려원, 1994) 가운데 한 대목.
꼭두새벽부터 해방촌에서 후암동 종점으로 내려와 있으면 우리 합창단원들을 그득 태운 미군 군용 버스가 내 앞에 섰다. 코쟁이 미국 사람이 운전하는 버스에 올라탄다는 자체가 충분한 특권이었다. 그때는 별게 다 촌스럽던 시절이었다. 버스는 삼각지 로터리를 끼고 미군부대로 들어가 예배당 앞에 섰다. 우르르 버스에서 내려 합창단 대기실로 들어서면 거기엔 언제나 뜨거운 커피와 설탕가루가 묻은 도넛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모든 게 공짜였다. 미국이 과연 어떤 나라인지를 최초로 실감할 수가 있었다. 각종 도넛과 커피를 무상으로 먹을 수 있다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도넛은 아침 대용식이었다. 미제 커피와 미제 도넛을 먹는 맛에 합창단에 나온다는 단원도 있었다.
커피의 국산화를 위해 인천시 북구 효성동에 동서식품이 완공된 것은 1970년 9월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커피의 국산화는 암거래와 외화 유출을 막고자 하는 정부의 특단책으로 추진됐는데, 정부가 동서식품을 커피 수입 대체 산업체로 지정하고 커피 생산 공장 건립을 위해 150만 달러의 차관계약을 승인해주자 이번에는 시민들에게서 외화 낭비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에 대해 동서식품 측은 아래와 같이 반문했다.
비합법적 루트를 통해 연간 3~4백만 달러어치의 커피를 소비하고 있는데, 이를 국산으로 대체하고, 수출로 667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커피 생산을 합법화함으로써 관세물품세로 매년 4억 5천만 원의 국고수입을 올리게 되니 차라리 잘된 것 아니냐?
1968년경부터 시작된 70년대의 청년문화와 70년에 완공된 국산 커피 생산은 다방 문화를 만개시켰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다방은 다방의 전문화를 부추겨 ‘얼굴마담’ 혹은 ‘레지’가 활약하는 성인 취향의 다방과 ‘DJ/뮤직박스’가 있는 음악다방 등으로 분화했으며, 동서식품을 뒤따라 미주산업(1978년, 후에 미원그룹이 인수), 한국 네슬레(1989년, 두산그룹과 스위스 네슬레의 합작사)가 창업하면서 커피 3사가 각축하게 됐다.
근대의 상징이면서 강한 차별 기제였던 커피는 1976년 자판기가 처음 생기고(1979년에 이르면 서울 시내 커피 자판기의 수가 서울 시내에 있는 3,640개의 다방 수를 추월한다), 1993년 커피 판매를 다방영업으로만 한정했던 식품위생법이 개정되면서 흔하고 일상적인 소비품이 되었다. 1978년 말 매상의 90% 이상이 커피인 다방의 수는 전국적으로 1만 752개였으나,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 전에는 무려 3만 개를 헤아렸다. 그러나 다방은 경제가 어려워지면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업종으로 IMF 직격탄을 맞고 9,000개로 쪼그라들었는데, IMF 사태로 도심에서 문을 닫게 된 다방이 농촌으로 파고들어 티켓다방을 확산시키기도 했다.
IMF 이후, 우리나라의 위축된 다방업을 새로운 형태로 부흥시킨 것은 미국에서 건너온 스타벅스다. 스타벅스의 성공 비결은 이 책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보다 하워드 슐츠의 『스타벅스: 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 신화』(김영사, 1999)에 더 자세하다. 헌책방에 가면 늘 만나게 되는, 그래서 뒤적여보곤 했던 스타벅스 회장이 쓴 이 책을 보면 ‘지구상에서 가장 촌스러운 사람들이 바로 미국인들’이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만든다. 미국인들이 프랜차이즈franchise를 이토록 좋아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하긴 프랜차이즈나 대형 쇼핑몰shopping mall이 나와 내 가족의 허방을 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디 미국인 뿐일까마는…
스타벅스뿐 아니라 미국의 숱한 커피 체인점이 소형 커피점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에 『커피견문록』의 지은이 역시 동의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커피의 역사와 맛을 따라 전 세계의 커피 원산지를 주유했던 지은이는 안타깝고 내키지 않지만, 스타벅스가 양질의 커피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평가한다. 까닭은 스타벅스가 기껏 ‘졸이는’ 기술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던 미국 고유의 커피 제조기술과는 정반대인 이탈리아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 제조법을 원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데, 아마 이런 품평도 낙후된 미국 커피 문화의 탓이 아닌가 한다(그래서 이 미국인은 스타벅스의 커피를 전반적으로 열악한 커피 문화를 가진 미국에서 맛볼 수 있는 ‘최악 중에 최고 커피’라고 말하는 것이다).
커피와 함께 번성한 커피 하우스(다방)는 근대 시민 사회가 태동하는 데 필요한 공론장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 공론장은 기술의 변화나 풍속의 변화를 따라 활동 무대를 달리한다. 1999년에 원서가 출간된 스튜어트 리 앨런과, 2005년에 출간된 강준만·오두진의 책은 똑같이 그것을 강조한다.
인터넷은 새로운 형태의 커피점 또는 커피점에 비견할 만한 사회적 장치이자,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나 함께 모여 지적 의견을 교환하는 곳이다. (『커피견문록』)
커피와 인터넷은 상호 무관한 게 아니다.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한국형 인터넷 상품 싸이월드는 커피의 대안품으로 탄생한 것이다 (…) 물리적 공간을 근거로 했던 다방과 카페는 상당 부분 인터넷으로 이동해 수백만 카페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