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6일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소화, 1998,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3)을 읽다. - 중편 분량의 이 작품은 극단적인 일본 소설 양식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소설이 거론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소설이다. 사소설에 대한 획기적인 해석을 보여주고 있는 스즈키 토미의 『이야기된 자기』(생각의 나무, 2004) 역시도 그러한데, 지은이는 『이야기된 자기』의 서문과 본문 가운데 실린 『이불』에 대한 독립적인 작품론의 서두에 이렇게 쓴다 : “일반적으로 ‘사소설’이란 작가가 자기 생활의 세부를 거의 허구를 섞지 않고 충실하게 재현한 자전적 산문작품(내러티브)이라고 생각된다. 통상 문학사가들은 이 자전 장르의 기원을 일본 자연주의 작가들의 작품, 특히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1871~1930)의 『이불』로 소급한다.”(22쪽), “오늘날 ‘사소설’이 화제가 될 대, 보통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이 그 직접적인 기원이라고 이야기된다. 즉 이 작품으로써, 소설가 자신의 쇄말?末적인 실생활의 사실을 숨기지 않고 묘사한, 일본의 독특한 소설의 효시와 원형을 삼는 것이다. 전전戰前에 고바야시 히데오에 의해 명확하게 된 이 계보도를 전후 확고한 것으로 완성한 『풍속소설론』에서, 나카무라 미츠오는 『이불』을 일본 근대 소설의 정상적인 성장을 방해한 ‘왜곡된 리얼리즘’의 원흉으로 본다.” (125쪽)
다야마 가타이가 서른다섯 살 무렵에 쓴 『이불』의 주인공은 서른여섯 살의 소설가 다카나카 도키오. 결혼 생활 8년째인 그에겐 두 명의 자식이 있는데다가 아내는 세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소설가라고는 하지만 평단의 호평이나 대중의 인기를 누려본 적도 없는 그는, 밥벌이를 위해 모 출판사에서 지리책 편집을 하고 있다. 아내와의 애정은 식은 지 오래고, 창작에 진력할 용기도 없는데다가, “사회는 갈수록 진보”하고 “일변”(11쪽)하는데 자신만 자꾸 신식과 멀어져 구식이 되는 것 같다. 이런 그에게 유일한 관심사는 젊은 아가씨와의 연애: “(…) 여기저기로 이사를 다녀 보아도 재미가 없고, 친구와 얘기를 해도 재미가 없고, 외국 소설을 이것저것 찾아 읽어도 만족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원수가 무성하고 빗물이 떨어지고 꽃이 피고 지는 일 따위의 자연현상조차 평범한 생활을 더욱 평범하게 만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몸 둘 곳이 없을 정도로 외로웠다. 길을 걸으면 언제나 만나게 되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 할 수만 있다면 새로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런 절실함은 매일 아침 출근길에서 만나는 여교사와 아내 몰래 연애를 하는 공상을 하게 만들고, 급기야는 임신 중인 아내가 “갑자기 난산하여 죽”(이상 15쪽)기까지 바라게 된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왔다. 고베에 살고 있는, 신식 교육을 마친 열아홉 살 난 요코하마 요시코란 아가씨가 “어떤 일이 있어도 선생님의 문하생이 되어 평생 문학에 종사”(16쪽)하고 싶으니, “제자로 삼아 달라”(17쪽)는 것이다. 도키오는 만류의 편지를 보냈으나 요시코가 거듭 제자 되기를 요청하자, 도키오는 다시 편지를 내어 못 이기는 채 사제관계를 수락한다. 서신 교환이 거듭 된 끝에, 요시코는 아버지와 함께 도쿄에 있는 도키오의 집을 찾아오고, 도키오는 손님방에 제자를 기숙하게 한다. “도키오의 고독한 생활은 이로 인해 깨어졌다.”(20쪽) 이렇게!: “화려한 목소리, 요염한 모습, 지금까지의 고독하고 외로운 그의 생활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산후 조리를 막 끝낸 아내를 도와 양말을 짜고 목도리를 짜고 옷을 꿰매고 아이들을 놀게 하는 등의 생기 넘치는 태도, 도키오는 신혼 당시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대문 가까이에 오면 가슴이 설레었다.”(21쪽)
젊고 예쁜, 사랑스러운 여제자는 그러나 한 달 정도밖에 머무르지 못했다. 불만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내의 기색이 점차 나빠지고, 끊임없는 웃음소리 속에 끊임없는 불안감이 집안에 가득 넘치게 되리란 것은 누구나 짐작하는 일. 도키오는 고민 끝에 요시코를 군인 미망인으로 연금 생활을 하고 있는 처형 집에 기숙하게 하는 한편, 여자 영어 학교에 등록시킨다. 그러고 나서 이번 사건이 생기기까지, 일 년 반의 세월이 지났다. 그 사건이란 여름방학을 고향에서 보내고 상경하는 출발 날짜와 도착한 날짜가 이틀이나 맞지 않다는 것. 힐문 결과 도키오는 “요시코에게 애인이 생”(29쪽)긴 것을 알게 된다. 여제자의 애인은 도시샤同志社를 다니는 스물한 살 난 시골 수재 다나카 히데오. “결코 더러운 행위는 하지 않았”으며 “서로 사랑을 느”끼고 “장래 약속”(30쪽)을 했다는 요시코의 눈물을 보면서 도키오는 “두 사람의 이른바 신성한 사랑을 위해 진력”(30~31쪽)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서도, 마음속 깊디깊은 곳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뺐겼다”(31쪽)는 질투와 아쉬움과 회한이 회오리바람 쳤다. 그날 저녁, 도키오는 엄청난 술을 마시고 취해 쓰러진다.
요 일 년 동안, 도키오가 요시코와 사제 사이의 선을 넘을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도키오의 판단에 그 두 번의 기회는 모두 요시코가 유혹한 거였다. 그때 도키오는 처자식을 거느린, 제자의 스승이라는 생각으로 억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후회막급이란 생각도 든다: “[요시코가] 마치 자연의 힘이 자기 몸을 압박하기라도 하듯 최후의 정을 전해 왔을 때, 그 수수께끼를 남자가 풀어 주지 않았다. 여성의 음전한 성性으로서 어떻게 그보다 더 노골적으로 육박해 올 수 있었겠는가. 그런 심리 때문에 그녀는 실망하여 이번과 같은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10쪽)
제자에게 애인이 생긴 것을 알게 된 도키오는 사흘 동안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신 끝에, 요시코와 애인 사이에 육체관계만 없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이 번민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괴롭지만 사랑하는 제자의 행복을 위해 두 사람의 증인이 되고 중개인이 되며, 요시코의 부모로부터 요시코를 지켜주는 후견인 역할을 하리라고 결심한다. 그런데 상황은 급변하여, 교토에 있어야 할 요시코의 애인이 도쿄에 유람 온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소식을 들은 도키오는 두 사람이 여름방학에 육체관계를 맺은 게 분명하며, 남자가 그리움에 못 이겨 도쿄로 온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번민으로 또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한 도키오는 술에 취해 “바보 같으니! 사랑에 사제師弟의 구별이 있다니 말이 되는가”(44쪽)라고 생각하면서 처형네 집으로 향한다. 처형 집 근처에는 아내의 친정집이 있는데, 옛날과 똑같이 환하게 등불을 켜진 친정집 창을 보면서 “이 무슨 지조 없는 마음인가”라고 자책하다가, 결국엔 “모순이라고 뭐라도 할 수 없다. 그 모순, 그 지조 없음, 이것이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사실! 사실!”(이상 47쪽)이라고 되뇌게 된다.
처형 집에서 밤늦게 요시코를 기다렸던 도시코는 다음 날 아침, 요시코에게 짐을 싸게 해서 자신의 집으로 도로 데려온다. 그 후 도키오는 감독이라는 구차스러운 구실 아래 요시코가 없는 사이에 애인이 보내온 편지를 몰래 읽으며, 성욕과 관련된 비밀스러운 흔적을 찾는데 골몰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요시코의 애인이 학업을 팽개치고 도쿄에 올라와 있다는 엽서를 발견하게 되고, 그를 교토로 되돌려 보내고자 요시코의 애인을 만난다. 하지만 도키오는 능력도 없어 보이는데다가 고집만 센 요시코의 애인을 설득하지 못한다. 두 사람의 사랑의 열쇠를 쥐고 있는 도키오에겐 사랑하는 여제자를 놓아주는 것도 견딜 수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온정어린 보호자처럼 점잖게 처신하는 것도 감당할 수 없었다. 고심 끝에 파멸을 선택한 그는, 요시코를 고향으로 데려가도록 요시코의 부모에게 자초지종을 알리는 편지를 쓴다.
편지를 받은 요시코의 부모는 요시코를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요시코를 역까지 마중한 도키오는, 삼 년 전 요시코가 오기 전의 옛날로 돌아간 쓸쓸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닷새째 날, 고향으로 돌아간 요시코의 편지를 받은 그는 이층에 있는 요시코의 방을 찾는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 커다란 버들고리짝 세 개가 가는 삼노끈으로 곧 보낼 짐처럼 묶여 있고, 그 맞은편에, 요시코가 늘 사용하던 이불 - 연둣빛 당초무늬의 요와 솜이 두툼하게 들어간 같은 무늬의 요기[夜着: 옷과 같은 모양을 크게 하여 솜을 두텁게 넣은 것. 잘 때 이불처럼 사용한다]가 포개져 있었다. 도키오는 그것을 꺼내었다. 여자의 그리운 머릿기름 냄새와 땀 냄새가 말할 수 없이 도키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요기의 비로드 동정이 눈에 띄게 더러운 곳에 얼굴을 갖다 대고, 마음껏 그리운 여자의 냄새를 맡았다.
성욕과 비애와 절망이 홀연히 도키오의 마음을 엄습했다. 도키오는 그 요를 깔고, 요기를 덮고, 차갑고 때 묻은 비로드 동정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어두컴컴한 방, 집 밖에는 바람이 거칠게 불고 있었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다케나카 도키오는 가타이 자신이고, 요코야마 요시코는 문학을 하기 위해 카타이의 집 이층에 기숙했던 오카다 미치요라고 한다. 이렇듯 작중의 익명을 빌어 실생활을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게 사소설이라고 한다. 하지만 앞서 소개했던 스즈키 토미의 『이야기된 자기』는 작중 인물과 작가를 자동적으로 동일시하고, 예술과 실생활의 악순환으로 여겨진 기존의 사소설에 대한 논의를 거부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이제까지의 통설과는 반대로, 사소설은 대상 지시적, 주제적, 형식적 특성 등과 같은 그 어떤 객관적인 특성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그 대신 독자가 해당 텍스트의 작중 인물과 화자 그리고 작가의 동일성을 기대하고 믿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 텍스트를 사소설로 만든다. 사소설은 일종의 읽기 모드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31쪽) 말하자면, 사소설이라는 실체적 장르가 있는 게 아니라, 작품으로부터 작가의 실생활을 발견하고 작품을 작가의 실생활과 연관 지우려는 특정한 독법이 사소설을 만든다는 것이다.
위의 인용에 뒤이어 지은이는 “어떤 텍스트라도 이 모드로 읽힌다면 사소설이 될 수 있는 것이다”고 부연하는데, 예를 들어 사소설적 독법이 보편화 되고 당연시되는 문화 속에서는, 조금이라도 작가의 삶을 반영하거나 작가의 전기적 사실을 떠올리는 작품은 모두 사소설이 되어버린다. 사소설은 특정한 문학 형식이나 장르라기보다 대다수의 문학 작품을 판정하고 기술했던 일종의 “문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한 문화가 소설을 읽는 독법을 한정할 때, 작가는 ⅰ)자연스레 혹은 강제적으로 집단적 기대 지평에 따르거나 ⅱ)그것을 이용한다. 스즈키 토미는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의 경우 ⅰ)의 예를 따라 ‘장르 세탁’이 된 사소설로 본다. 작가는 『이불』이 발표되었던 2년 후인 1909년에는 이 작품이 “참회도 아니고, 일부러 그런 추한 사실을 선택해서 썼던 것도 아니다”고 기술했으나, 발표 후 10년이 지난 1917년에는 “감추어 두었던 것, 그것을 털어놓으면 자기의 정신도 파괴될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것, 그러한 것마저 끄집어내” 쓰려고 결심했다면서, 이전의 말을 번복한다. 그런 변화에는 자신의 작품에 ‘자전적 읽기 방식’을 보강함으로써 당시의 독서 취향에 보조를 맞추고자 하는 작가의 의식적 조작이 있었던 것이다. (이상 163~164쪽)
반대로 ⅱ)는 사소설적 독법이란 패러다임이 성립한 결과 만들어진 ‘자각적인 사소설’이나 ‘자각적인 반反사소설’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작품들 역시 독자들의 기대 지평권 내에서 제작되는 작품들로, 여기서는 작가가 일상생활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정통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사소설을 써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작가 개개인의 생활에 영향을 주게 되는 자기 파괴가 벌어진다. (이상 32쪽)
『이불』의 주인공 도키오는 신식과 구식 사이에 끼인 인물이다. 입만 떼면 ‘여성의 자각’을 강조하는 도키오는 ‘지나치게 하이칼라’인 요시코에 비해서는 구식이지만, 고리타분하게 여겨지는 자신의 아내보다는 신식이다. 그가 신식과 구식 사이에 끼어 있는 인물이란 것은 그에게 완충 역할을 기대하는 요시코의 생각에서도 잘 드러난다(61쪽). 그러나 끼인 인물로서의 도키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든 ‘끼인’ 인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메이지 시대의 무서운 속도가 아닐까?
사회는 날이 갈수록 진보한다. 전차는 도쿄시의 교통을 일변시켰다. 여학생은 수도 많아지고 힘을 얻게 되어, 이미 자기[도키오]가 연애하던 무렵과 같은 구식 아가씨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청년들은 또 청년들대로, 사랑을 설명하는 일에도 문학을 논하는 일에도 정치를 이야기하는 일에도 그 태도가 모두 일변하여, 자기들과는 영원히 서로 맞닥뜨릴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11쪽)
그리고 바로 이런 속도야말로, 서른여섯에 불과한 도키오를 나이에 맞지 않은 늙은이로 만드는 사회적 기제다.
슬프다, 정말 통절하게 슬프다. 이 비애는 화려한 청춘의 비애도 아니고, 단지 남녀의 사랑의 비애도 아니고, 인생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어떤 커다란 비애다. 흘러가는 물, 꽃이 피고 지는, 이 자연의 깊은 곳에 서려 있는 저항할 수 없는 힘 앞에서는 인간만큼 허무하고 비참한 것은 없다. (46쪽)
“젊은 새는 젊은 새가 아니면 안 된다. 우리들은 이제 이 젊은 새의 관심을 끌 아름다운 깃털을 갖고 있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자, 형언할 수 없는 서글픔이 강렬하게 마음을 엄습했다. (76쪽)
근대와 도시화는 청춘을 찬양하고, 노년을 비애스럽게 만든다. 도키오가 근대의 도시 생활자이면서 연애라는 신사조를 실어 나르는 근대 문학기의 소설가만 아니었다면, 고작 서른여섯 살의 나이를 의식하면서 인생의 비애와 서글픔을 떠올리지 않았으리라. 그런 뜻에서 “자기가 애써 쓴 소설을 읽으려 하지도 않고 남편의 고민과 번민은 자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식만 만족스럽게 키우면 된다고 하는 자기 아내를 대하면 아무래도 고독함을 외치지 않을 수 없다”(21쪽)는 도키오의 절규는 절반의 진실이다.
그를 비애스럽게 만드는 것은 “평범한 생활”(88쪽)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빛바래게 하는 세월과 속도다. 그것은 난데없이 요시코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대목(88~89쪽)에 인상적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지나치게 ‘하이칼라’인 요시코에게 마련된 미래 역시, “권태, 피로, 냉혹”에 부딪칠 뿐이라는 도키오의 염세적인 생각은, ‘사회는 날이 갈수록 진보한다’는 그 시대의 피로증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그럴 때 그가 얼굴을 묻고 울었던 때 묻은 이불은 성적인 물상애를 훌쩍 벗어나 있는 무엇일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