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2일
양세욱의 『짜장면뎐傳』(프로네시스, 2009)을 읽다. - 오가다 데쓰의 『돈가스의 탄생』을 재미있게 읽으면서, 우리나라에도 이런 재미난 미시사·생활사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짜장면뎐(傳)』과 1년여 전에 읽었으나 독후감을 쓰지 않았던 강준만·오두진의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커피와 다방의 사회사』는 그런 아쉬움을 깨끗이 날려 준다.
미시사와 일상사는 자칫 ‘아주 소소한 것들의 역사’라고 알고들 있지만, 실은 하나의 소소한 주제로 굉장히 많은 분야를 아울러야 하는, 만만치 않고 번거로운 분야다. 이번에 읽은 『짜장면뎐』 역시 그렇다. 짜장면에 대해 쓰기 위해 저자는,
인류학: 밀의 재배
동서양 교섭사: 짜장면과 ‘누들 로드’
중국사: 55개 소수민족과 한족의 융합이 낳은 중국 요리
중국 문화사: 한국인이 짜장면을 먹으러 가는 ‘반점飯店’이 중국에서는 호텔이라는 것
언어학: 짜장면의 한자 원음과 한글의 중국어 표기 원칙
한중 역사: 화교 배척의 기원은 청의 비호 아래 급증한 청상들이 조선 상인의 권익을 침탈한 것과, 청일전쟁 이후 일본 정부의 배화 정책과 화교에 일자리를 빼앗긴 한국 실직자들의 갈등에서 비롯. 광복 이후, 대륙에서 모택동 정권이 수립되면서 제2차 화교 배척이 시작
한국 사회사: 산업화와 외식 문화
대중문화: 짜장면이 소재나 주제인 영화와 짜장면이 나온 각종 드라마의 명장면들
문학: 짜장면을 소재나 주제로 삼은 문학 작품
을 두루 섭렵해야 한다. 거기다가 미시사와 일상사 속엔 풍부한 풍속사나 일설이 포함된다. 약간은 ‘믿거나 말거나’ 한 지식이지만, 그런 일화들이 한번 책에 언급됨으로써 새로운 증거나 자료가 더 발굴될 기회를 얻게 되고, 반론 과정을 통해 정교해지게 된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ⅰ) 중국인들은 2차, 3차로 차수를 높여가며 술집을 옮겨 다니는 일이 드물다. 중국인들에게 식자 자리는 동시에 술자리고, 사교와 비즈니스 자리인 셈이다. 이 집 저 집으로 술집을 옮겨 다니는 우리의 음주 관행은 일본 낭인浪人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중국은 우리보다 식민지 통치의 유산이 적다. (75쪽)
ⅱ) 고향을 떠난 중국 화교들은 세 자루의 칼을 들고 한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포목점 비단장수의 가위인 전도剪刀, 이발소의 면도칼인 체도剃刀, 그리고 음식점의 조리용 칼인 채도菜刀. (152쪽)
ⅲ)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은 학교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1964년 1월 24일부터 모든 음식업 종사자는 보리와 국수를 25% 이상 혼합해서 말도록 하고, 같은 해 8월에는 육개장, 곰탕, 설렁탕에 쌀 50%, 잡곡 25%, 국수 25%를 혼합 조리하도록 지시하였다. (국수를 넣은 설렁탕도 이때부터 등장한 듯하다.) (154쪽) * 여기서 증거가 보완되거나, 반론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괄호 속의 내용이다.
자, 그러면 본격적인 짜장면 이야기. 1995년인가 1996년인가, 내가 처음으로 중국에 갔을 때만 해도 호기심 많은 한국인들은 중국 식당으로 몰려가 짜장면이 있는지를 물었다. 짜장면은 과연 중국 음식일까, 한국 음식일까? 성급한 답안 공개일지 모르겠지만, 지은이는 이 책 121쪽에 ‘짜장면 상식’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한국인의 중국 이해도는 대략 네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면서 이런 표를 제시한다.
1. 중국에는 짜장면이 없다 - 초보 단계
2. 중국에도 짜장면이 있다 - 발전 단계
3. 중국 본토 짜장면은 한국 짜장면과 많이 다르다 - 심화 단계
4. 한국 짜장면의 원조는 중국 산둥 짜장면이다 - 원숙 단계
주영하의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책세상, 2000, 책세상문고·우리시대017)에 따르면, 세계 각국의 음식의 이름은 대개 ‘주원료 + 만드는 법’이 조합된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김치찌개는 ‘김치(주원료) + 찌개(요리방법)’가 조합된 것으로 ‘김치를 끓인 것’이란 뜻을 담고 있다. 짜장면이란 작명도 다르지 않아서 ‘짜장을 바른(요리방법) 면(주원료)’이 짜장면이다. 좀 자세히 말하면, 된장醬을 볶은炸게 짜장炸醬이며, 볶은 된장을 각종 야채를 얹은 면麵에 비벼 먹는 게 바로 짜장면炸醬麵인데, 면에 비벼 먹는 된장이라서 중국에서는 면장麵醬이라고 부르는 이 된장은, 원래 중국 산둥 지역이 원산이다.
산둥 사람들이 된장을 만드는 방식은 우리의 된장과 비슷하다. 우리나라 된장이 100% 콩으로 만드는 데 비해, 중국 밀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산둥에서는 콩에다 밀가루를 함께 섞는다. 밀가루와 콩으로 메주를 띄운 뒤, 소금물을 붓고 햇볕에 쬐어 말리는 과정 중에, 장이 익을 때까지 자주 뒤적여 속까지 까맣게 만드는 점도 한국의 된장 제조법과 다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짜장면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된장은, 이 면장에 캐러멜 소스를 섞는 것으로 중국 된장과 완전히 결별했다.
짜장면을 만드는 장에서도 차이가 나지만, 두 나라는 쓰는 재료도 다르다. 우리나라 짜장면은 양파·감자·옥수수·달걀 반쪽·돼지고기를 재료로 쓰지만, 중국 짜장면은 오이 채와 완두콩만 한국과 함께 쓸 뿐, 앞서 열거한 재료를 쓰지 않는다. 완성된 짜장면이나 먹는 방식도 다르다. 우리는 모든 재료를 걸쭉하게 만들어 소스를 만들지만, 중국 짜장면은 각종 야채를 담은 고명 접시와 짜장 종지를 따로 내온다. 또 한국은 갓 삶은 뜨거운 면에 재료를 함께 익힌 걸쭉한 소스를 말듯이 먹지만, 중국은 삶아서 식힌 면에 볶은 면장과 각종 야채를 함께 비벼 먹는다(비빔국수). 또 우리나라의 짜장면은 사철 음식이지만, 중국의 짜장면은 우리나라의 냉면처럼 여름 음식이다. 마르고 찬 중국 짜장면이, 한국에 와서 물이 많고 뜨거운 음식으로 변한 것이다.
2005년 10월 7일부터 9일까지, 인천 중구 제8부두에 인접한 차이나타운에서는 ‘짜장면 탄생 100주년 대축제’가 열렸다. 춘향 축제나 새마을 시발지 등의 논란에서 보듯이 지방 축제나 기념사업에는 항상 발생지나 주최지 논란이 끊이지 않는데, 아무 곳에서도 인천에서 벌어진 ‘짜장면 축제’에 몽니를 부리지 않는 걸 보면, 인천이 짜장면의 발생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인천이 짜장면의 발생지가 된 것은, 면장을 먹는 산둥 출신의 화교들이 제물포(인천)에 대거 진출한 때문이다. 산둥반도와 지척에 있는 제물포는 중국 해상로를 통한 한성(서울)의 입구이기도 했거니와, 산둥 사람들이 대거 몰려든 데에는 중국 내부 사정도 있다. 1898년 의화단운동이 발생하고 1901년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미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일본 등 8개국 연합군이 공격해 왔을 때, 그 진원지인 산둥반도는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 거기다가 훗날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이어지면서, 많은 피난민이 서해를 건너 제물포에 당도했다.
짜장면이 최초로 만들어진 곳은, 2010년 10월 짜장면 박물관이 건립되기도 할 오랜 중국 요릿집 공화춘이라고 한다. 1907년 무렵에 세워진 이곳에서 짜장면이 처음 만들어졌다는 풍설이 있지만, 지은이는 이를 뒷받침할 결정적인 자료가 없다고 말한다. ‘짜장면 공화춘 탄생설’은 그저 당사자들의 희망이 키운 신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발생지는 분명하지만 최초로 우리나라식 짜장면을 만든 식당이 오리무중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장충동 족발에서부터 전주 비빔밥에 이르기까지 숱한 음식점들이 ‘원조 타령’에 휩싸여 있는 까닭도, 음식이 만들어지는 요리법recipe이 특정한 업소나 요리사의 창안이기보다, 그만큼 집단적이고 유구한 시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원조가 어딘지는 불명확하지만, 산둥 된장에 캐러멜 소스를 섞은 우리나라식 짜장, 즉 춘장春醬의 발명자는 1948년 산둥성에서 태어나 서울 용산구에 ‘영화장유’라는 식품 회사를 창업한 왕송산이다. 영화식품이란 이름으로 2008년에 60주년을 맞은 이 회사는 국내 최장수 식품 회사 가운데 하나면서, 여기서 만드는 사자표 춘장은 이 부문에서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캐러멜 소스를 섞은 춘장이 1950년대 중반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현재의 짜장면이 한국인의 입맛을 길들이기 위해 긴 세월 동안 진화해 온 산물이라는 것을 다시금 입증한다.
짜장면이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인의 입맛과 위를 정복한 데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다. 우선은 해방 이후 한국인들이 들릴만한 외식장소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식은 메뉴가 개발되지 않았고, 양식과 일식은 비쌌다. 거기에 비해 짜장면으로 대표되는 중국음식은 저렴하면서도, 먹기 어려운 별식으로 금방 ‘외식의 꽃’이 되었다. 앞서 캐러멜 소스 얘기가 나왔지만, 한국 음식 가운데는 이처럼 ‘달달한’ 미각을 가진 음식이 없었다는 것도 한국인이 짜장면을 찾아 입맛을 다시게 되는 큰 이유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도시화로 외식의 기회가 늘어난 것과, 1964년부터 혼·분식을 강제했던 정부 시책도 짜장면의 번성에 기여했다. 그리고 전화만 하면 어디든 순식간에 달려오는 ‘철가방’이 웅변하듯이 짜장면은 ‘빨리빨리’ 문화에 젖은 한국인 고유의 습성과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구미에 맞았으며, 또한 값싸면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짜장면은 산업화 시대의 전투식량 노릇도 했다.
중국식당은 1970년대 중반부터 일손을 돕던 한국인들이 독립하여 하나 둘 경쟁 식당을 차리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고, 짜장면은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전후로 서구의 패스트푸드점과 프랜차이즈 식당이 늘어나면서 전성기가 꺾였다. 장년들은 아직도 자장면에 인이 박여 있지만, 오늘날의 십 대들은 햄버거와 피자맛에 짜장면을 잊기 시작했다.
하지만 짜장면의 몰락은 중국 음식계로서는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중국 음식은 1882년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청의 군대와 상인, 노동자들이 조선에 장기 체류하면서 한국에 소개되었으나, 적어도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1949년부터 반세기 동안 한국에서 중국음식의 발전은 정체되었다. 중국에는 없는 우동이나 야키만두, 잡채, 단무지 등이 중국식당의 메뉴나 반찬으로 버젓이 올라가 있는 우스꽝스러운 풍경이 보여주듯이 한국의 중화요리에는 ‘중화’가 없고, 짜장면이 중국 음식을 대표해 왔던 게 지금까지의 현실이었다.
한국인이 한중 합작의 짜장면이 아니라(짜장면이 한중 합작품이란 것은 내 의견일 뿐, 지은이는 분명히 중국음식이라고 말한다), 서울에서 북경 오리구이를 즐기고 양고기 샤브샤브를 먹기 시작한 것은, 고작 1992년부터다. 강남구 대치동에 북경 오리구이 전문점이 생긴 것은 1992년으로, 그 해는 한중수교가 맺어진 해다. 한국전쟁으로 한국식 중화요리의 메뉴가 반세기 이상 정체한 끝에, 주목할 만한 변화를 맞은 것이다. 이런 사실은 정치와 아무 상관없어 보였던 입맛과 위장조차 그것의 간섭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한국인이 먹을 수 있는 중국음식 메뉴가 괄목하게 늘어났다고 해서, 짜장면이 금세 몰락할지 어떨지는 간단히 알아맞히기 힘들다. 게다가 한국과 중국의 활발한 경제적·문화적 왕래가 한국식 짜장면 대신, 그것과 같은 또 어떤 합작fusion 음식을 만들어낼지는 더더욱 미지수가 아닐까?
사족이다. 중국에 대한 예측은, 누구도 하기 힘들다. 그저 대세를 따를 뿐. 이 글 속에 언급된 주영하의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은 내가 『삼국지』를 쓰던 2000~2004년 무렵에 닥치는 대로 읽었던 중국 관련서 가운데 하나다. 이 책 87쪽에는 “중국 공산당의 개혁개방 정책은 당장에 보기에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앞날은 그다지 밝지 않다. 20년 넘게 외국 자본을 끌어들인 결과가 그다지 밝지 않다”는 지은이의 진단이 나와 있는데, 딱 1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의 미래를 암울하게 보는 사람은 그제나 지금이나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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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