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0일
박정애의 『물의 말』(한겨레신문사, 2001)을 읽다. - 이런 소설을 가리켜 삼대三代소설이라고도 하는 데, 이 소설은 삼대가 나와서 복잡한 게 아니라, 주인공들의 혼맥과 연사가 얽히고설켜, 복잡하다. 러시아 소설처럼 가계도를 그려가며 읽어야 하는데, 그 관계가 파악되고 나야, 흥미가 배가된다.
모든 관계의 중심에는 님이가 있으나, 이 소설을 쓰는 사람은 김복순이다. 이 소설의 주 무대인 달밭골이 고향인 김복순은, 님이와 님이의 친딸 필남과 의붓딸인 권예지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 그런데다가 김복순은 필남과 같은 대학교 법대문학회 회원으로(이 문학회는 운동권 서클이다), 필남이 연모했던 상준과 결혼했다.
그런 김복순이 이 소설의 작가라는 것은, 이 소설의 서장에 해당하는 8~11쪽에 아주 분명한데다가, 272~273쪽 역시 그런 암시를 준다. 그런데 106~107쪽을 보면, 님이의 이름이 복순이기도 하며, 315~316쪽을 보면 마치 님이가 이 소설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대체 이 소설은 누가 쓰고 있는 것일까? 작가는 의도적으로 두 명의 작중 작가를 등장시켜 ‘가부장제 사회의 의미체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친부권親父權, 즉 ‘대代=씨氏’에 대한 맹목을 웃어넘겨 버린 것일까?
소설의 마지막인 313쪽엔 “계곡으로 가는 길옆 우묵한 자리에 들어선 새집.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저 집에서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남자가 만날 것이다. 젊은 여자와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남자는 늙은 여자를 님이 이모라고 부르겠지. 이모야, 이모야, 이모야, 너무 불러서 닳아지도록 그 이모를 부르며 자랐던 한 시절이 있었지.” 이모姨母란 어머니가 아니면서, 어머니라고 불리는 존재다. 숙부叔父도 그런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나, 가부장제 사회의 의미체계 속에서는 아무래도 그럴듯하지 않다. 이모는 자신의 배로 낳지 않은 조카에게도 어머니이지만, 숙부에겐 자신의 씨가 아닌 조카가 제 아들일 수 없다. 가부장 사회가 남자와 여자를 성품을 그렇게 구획했다.
군말이다. 강간을 해서 언니와 결혼을 하게 되었던 데다가 모진 박해 끝에 자살하게 만든 형부, 거기에 더해 네 명의 조카를 거의 유기하다시피 했던 그 최가(형부)와 님이가 정사를 벌이는 것은 의도가 파악되지 않는, 무리한 설정으로 보인다.
12월 21일
고고학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가장 오래된 인공물에는 대개 악기가 들어 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음악은 어느 문화에나 존재해 왔다는 음악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사정은 오늘도 다르지 않다. 카페, 쇼핑몰, 수영장, 공원 등지에서 수시로 소음과 다름없는 ‘음악 고문’을 당해본 사람들은 물론이고,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휴대전화의 컬러링 음악에 짜증이 치밀어 본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조롱일지 모르지만, 라디오와 녹음 기술이 발명되면서 음악은 과거와 비교하지 못할 만큼 일상적인 게 되었다.
『뇌의 왈츠』로 전 세계적인 호평을 얻은 대니얼 J. 레비틴이 새 책을 냈다. ‘The World in Six Song: How the Musical Brain Created Human Nature’ 라는 길지만 축약적인 원제를, ‘음악하는 인간’이란 뜻으로 바꾼 『호모 무지쿠스』(마티, 2009)가 그것이다. 얇지 않은 부피지만 특유의 가독성을 가진 이 책에서 그는 “음악과 인간이 함께해 온 역사를 이해하면 음악이 어떻게 인간 본성의 발달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된다”고 말하면서 “음악은 그저 기분전환용 소일거리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서 언어 같은 더 복잡한 행동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길을 닦았고, 대규모 협력 작업을 용이하게 했으며, 중요한 정보를 후세에 전달하도록 도왔다”고 주장한다.
인용된 두 문단을 보면, 왜 한국의 편집자가 이 책의 한국어 제목을 『호모 무지쿠스』로 바꾸었는지가 짐작된다. 책의 저자가 ‘인간은 음악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하고 나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인간 본성에 대한 여느 정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둘도 없는 완전한 정의이기보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는 그런 것이다. 마치 그건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인간은 옷 입는 동물’이라고 말하고, 개그맨 김제동이 ‘인간은 웃는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이명박 대통령이 ‘인간은 땅 파는 동물’이라고 뻗대는 것과 같다. 참고로 이 책의 저자 대니얼 J. 레비틴은 뇌 과학과 진화심리학을 음악과 결합해서, 음악 인지 분야라는 새로운 인지 심리학을 개척하고 있는 학자다.
음악 인지 분야를 개척하는 학자가 ‘인간은 음악하는 동물’이라는 가설 위에서 작업하는 것은 하등 놀랍지 않다. 밤새워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인간은 독서하는 동물’이라는 신념이 없다면, 애써 이 글을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놀라웠던 것은 한때 대학 학업을 그만두고 로커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현재도 출중한 음악 프로듀서로 활약하고 있는 저자가 “음악을 만들고 듣는 것이 좋게 느껴지는 까닭은 음악에 내재한 본질적인 속성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노래하고 춤추고 머릿속에 노래를 담아두는 것은 노래와 춤이 본질적으로 매력적이거나 기억이 잘 되거나 미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음악이 아름다워서 좋아하는 게 아니다”고 거듭 말하는 대목에서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으로 진화한 영장류의 일부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음악 그 자체에 본질적인 아름다움이 있어서가 아니다. 인간으로 진화하게 된 영장류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음악적인 신호(왜냐하면 그 당시엔 선율과 화성이 모자랐을 테니)에 민감했던 돌연변이가 그렇지 못했던 영장류보다 생존과 진화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장 원시적인 전쟁술 가운데 하나로 심야 기습공격이 애용되었는데 “운 좋게도 남들보다 뛰어난 인지 능력을 타고난 똑똑한 종족의 일원이 어느 순간 북소리를 내면 적들을 무화시키고 결단력을 무너뜨리고 자기 종족의 전사들에게는 힘을 불어넣는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이제 그런 기술은 가차없이 무자비하게 적들을 죽이는 용도로도 전용되어 막강한 저항도 무력화시킬 수 있다.”
인류로 진화한 영장류는 자연선택의 승자가 되기 위해 5만 년 동안 ‘음악적 뇌musical brain’를 발전시켰다. 인류가 음악적 뇌를 단련시킨 5만 년은 인류가 자연선택에 유리한 자리를 차지해 간 기간이면서, 음악이 인간의 마음(감정·신경)을 만들어 온 기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저자는 스스로의 표현으로도 매우 “급진적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의 음악적 뇌를 발전시킨 노래(음악)를 여섯 가지 유형으로 나눈 것이다. 그 여섯 가지 유형이란 ‘우애의 노래’, ‘기쁨의 노래’, ‘위로의 노래’, ‘지식의 노래’, ‘종교의 노래’, ‘사랑의 노래’다.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의 생존에 필수적인 저 여섯 가지 감정을 음악적 뇌 속에 저장하고 또 거기서 흘러나오는 마음의 음악에 맞추어 진화한 끝에 오늘과 같은 인간이 되었다.
앞서 열거한 여섯 가지 유형의 노래를 하나씩 설명하는 6개의 장과 하나의 서장으로 구성된 이 책이 정작 놀라운 것은, 노래의 유형을 여섯 가지로 나눈 것에 있지 않다. 저 유형을 뒤집어 생각하면, 단순히 노래가 아니라, 인간이 저 여섯 개의 감정(신경)으로 만들어졌다는 뜻 아닌가? (성리학의 칠정론이 떠올랐다!) 저자도 그것을 희석하고 싶었는지 이 책의 말미에 가서 “나의 중심 주제는 인간의 문명사를 형성해온 여섯 가지 종류의 노래가 있다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여섯 가지 노래들만 있다고 딱 잘라 말할 생각은 없다 (…) 음악 문화마다 사람들이 음악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실로 다양하다”고 한 발을 뺀다.
『호모 무지쿠스』는 분명 음악 서적이지만 인지심리학, 뇌 과학, 신경과학 등이 발견한 진화와 인간 심리의 비밀을 엿보게 해주는 통섭적인 교양서다. 인간이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가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던 저자는, 우리가 예쁘게 여기는 아이나(“우리가 아이를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이가 ‘본질적으로’ 예뻐서가 아니라”), 성은 물론이고(“성은 본질적으로 기분 좋은 것이 아니다”), 신에 대한 경외마저(“최근의 과학 연구를 통해 ‘신 중추God centers’라 불릴 만한 신경 부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직껏 전모가 드러나진 않았지만 인간의 뇌나 신경이 행하는 역할이라고 보고 있으며, 우리의 뇌나 신경이 그렇게 구조화된 것은 모두 진화와 생존의 필요에 의해서였다고 말한다. “우리가 ‘본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현재 작동하고 있는 자연선택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