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
사과나무에서 출간된 나카무라 우사기의 『나는 명품이 좋다』, 『너희가 명품을 아느냐』, 『쇼핑의 여왕』을 읽었다. 1999~2001년 사이에 일본에서 출간된 이 책들이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 출간된 것은, 차례대로 2002년 2월, 4월, 11월이다. 2002년의 한국은 막 구제금융의 환난을 벗어났을 때로 추측되지만, 이때부터 ‘명품 열기’의 조짐이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나카무라 우사기는 판타지 소설 작가로 이름이 났지만, 일본의 독자들에겐 ‘쇼핑의 여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내가 읽은 세 권의 책도 다름 아닌, 그녀의 ‘쇼핑 체험’을 적은 것으로, 일본의 시사 잡지 <주간 문춘>에 수년간 연재되었던 글을 모은 것이다.
나열된 책 제목에 나오는 ‘명품’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명사 명품名品은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 또는 그런 작품’을 일컫는데, 거기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 ‘럭셔리 상품 luxury goods’은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이 갖고 있는 제품의 가치를 지칭하기보다는, 고급스럽다거나 고가高價라는 뜻에 더 가깝다. 고소득 소비 계층을 겨냥하여 값비싼 재료를 사용하고, 적은 물량으로 고급스럽게 만들어 낸 것이 럭셔리 상품이며, 그것은 사치품이나 호사품을 뜻한다.
지은이는 작가가 되어 부모에게서 독립한 이후, 평생 동안 자신의 전 수입을 샤넬, 에르메스, 루이뷔통, 디오르, 돌체&가바나 등의 옷과 가방을 사는 데 탕진했다. 보통 쥐었다 하면 300~400만씩 하는 패션 용품을 사느라고 집도 없고, 저축도 없는 여왕님, 나카무라 우사기! 세금을 내지 못해 가스와 전화가 끊기고, 의료보험과 주민세가 체납되어 은행 거래가 중지되고 인세가 압류되어도, 여왕님의 브랜드brand 중독은 대책이 없다.
『나는 명품이 좋다』, 『너희가 명품을 아느냐』, 『쇼핑의 여왕』은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브랜드 중독녀’의 체험기다. ‘뭐, 이런 책을 다’라고 하실 독자도 있겠고, 실제로 이런 책을 읽는 나 자신을 한심스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두 권, 세 권째로 넘어가면서 점점 흥미가 붙었으니, 예외적이었다. 원래 이런 책은 한 권만 읽고 나면 끝이 아닌가?
브랜드 상품을 애호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내가 브랜드 상품을 애용하는 것은 그것이 명품이어서가 아니라, 몇십 년이고 사용할 수 있는 튼튼한 상품이기 때문이다.”(『나는 명품이 좋다』, 58쪽), “명품의 매력은 확실한 기술로 만들어진 높은 품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격은 비싸지만, 평생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긴 안목에서 보면 현명한 쇼핑이라고 할 수 있겠죠.”(『너희가 명품을 아느냐』, 100쪽)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지은이에 따르면 그건 헛소리다. 몇십 년이고 쓸 것 같았던 샤넬 정장, 베르사체 코트, 돌체&가바나 벨트, 구치 부츠는 겨우 두세 번 만에 색이 바래고, 뜯기고, 장식이 떨어져 나가곤 했다. 브랜드를 좋아하는 진실한 이유는 그것이 과시이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트로피이기 때문이지, 결코 튼튼해서나 오래 써서가 아니다: “추녀이건 바보이건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건, 끊임없이 명품을 사들여 우쭐해진 기분을 맛보고 싶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란, ‘부자라는 영광의 골을 향해 맹렬하게 싸우는 게임’이다. 그리고 명품은 그 게임의 경품이다.” (『나는 명품이 좋다』, 58~59쪽)
사치가 자본주의 사회의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획득물이라는 것은 베블런의 선구적인 작업과 부르디외의 후속 작업이 입증한다. 부자는 부자이기 때문에 사치품으로 과시하고, 가난뱅이는 가난뱅이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나마 사치품을 통해 위안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내가 정작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지은이가 빌려 온 사회학적 분석이 아니라, 금치산자가 되도록 낭비에 열중했던 나카무라 우사기의 변명(?)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지은이는 미친 듯이 브랜드 제품을 사대는 바람에 정신과 의사로부터 ‘쇼핑 중독증’이란 진단을 받은 사람이며, 가정 경제가 파타난 사회부적격자다. 그런데도 쇼핑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아니, 쇼핑 중독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일까?
<주간 문춘>에 글을 연재할 때 지은이가 자주 받은 질문 가운데 반드시 빠지지 않는 질문은 “에세이에 쓰신 이야기 중, 어디까지가 진실입니까?”였다. ‘쇼핑 광증’에 빠진 지은이의 일화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만큼 황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한 나카무라 우사기의 대답은 이렇다.
이 질문에는 매번 조금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쓰는 에세이는 백 퍼센트 진실이기 때문이다. 여왕님의 단순한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복잡 미묘한 정의가 있다.
‘에세이는 논픽션, 소설은 픽션.’
그러므로 이 분류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머릿속이 혼란스럽기 때문에 절대 쓰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소설 같은 것.
어쨌든 여왕님의 본업은 판타지 소설 작가이다. 마법의 드래곤이 등장하는 호러 이야기만 쓰기 때문에, 에세이에서는 진실만 쓰겠다고 나름대로 다짐했었다.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어, 망상과 허언虛言이 난무하는 에세이가 되고 만다. 사실, 나는, 아랍 석유왕의 딸이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쇼핑의 여왕』, 184~185쪽)
그런데, 이 발언보다 앞선 어디에서, 지은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돌이켜보면, 인세 가불이나 여기저기의 빚 모두 이 ‘소재거리가 되기 때문’이라는 얄팍한 인식이 원인이다. 평소라면 부끄러워해야 할 일도, 이 잘못된 직업의식 탓에 부끄러움의 개념조차 쉽게 내던지고, 인간 실격의 길을 기꺼이 걸어온 결과,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지경에 빠진 것이 아닐까! (『너희가 명품을 아느냐』, 219~220쪽)
첫 번째 인용에 강조된 것처럼, 나카무라 우사기에게 판타지 소설을 쓸 때와 에세이를 쓸 때의 각오는 달랐고, 에세이를 쓸 때, 그녀는 분명 진실만을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인용이 가르쳐 주는바, 그녀는 자신의 글로 과장을 하거나 거짓 조작을 하는 대신, 자신이 쓰는 글에 재미와 극적 요소를 불어넣기 위해 자신의 삶을 연기했다. 하므로 자신은 ‘절대 사소설 따위는 쓰지 않겠다’던 첫 번째 인용 속의 결심은 허사가 됐다. 다시 말해 연재를 더 극적으로 끌어가기 위해 지은이는 점점 ‘쇼핑의 광기’ 속에 자신을 몰아넣었고, 그런 자멸이 글과 원고료로 바뀌는 사소설적인 악순환 속에서 그녀의 ‘쇼핑 중독’은 비로소 의미를 발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온 수입과 재산을 사치품 판매장에 갖다 바쳤다. 그런데 가불을 얻고 카드빚을 긁어서 산 그 옷들은 가게에서 들고 나오는 순간, 무용지물이 됐다. 한 번도 입지 않거나, 한두 번만 입어 본 뒤 집안 곳곳에 던져두거나 쌓아 둔 것이다. 이런 정황은 그녀의 쇼핑 중독이 사소설을 쓰기 위한 재료이기도 했다는 것을 다시금 증명해 준다.
그녀의 연재글을 본 지인과 독자들이 “에세이에 쓰신 이야기 중, 어디까지가 진실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이 염두에 둔 일화가 어떠어떠한 것이었을지를 짐작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나는 명품이 좋다』, 『너희가 명품을 아느냐』, 『쇼핑의 여왕』을 다 읽는 독자는 수시로 튀어나오는 ‘배변(변비)/항문/똥’이란 단어와 상황에 압도된다. 이런 치부는 ‘쇼핑 중독’과 아무 상관이 없을 듯한데, 어쩌면 그토록 자주 나올까? 금치산에 이르게 된 자신의 낭비벽에 대한 단죄일까? 아니면 실제로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집 곳곳에 고급 옷가지를 그득히 쌓아둔 ‘축장적 성격’에 대한 심리적 배설 혹은 반동형성일까?
브랜드라는 말에는 상표라는 의미와 함께, 낙인烙印 또는 소인燒印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하므로 브랜드 애호에는 비주체적인 상황과 노예 상태라는 불명예가 따르지만, 차이를 통해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사회에서는 ‘선민選民’의 표지가 된다. 여기에 덧보탠 나카무라 우사기의 해석은 이렇다: “원래 ‘쇼핑 중독증’에 걸린 동기 중의 하나는, 자신을 헌신짝 취급하는 사람들에 대한 복수심이 있었다.” (『쇼핑의 여왕』, 217쪽).
극단적인 예찬과 혐오가 상존하기 때문에, 사치품에 이미 중독된 지은이에게 사치품에 대한 가치 판단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 가운데 예찬은 『쇼핑의 여왕』에 실린 「여왕님은 화가 나 있다」에, 혐오는 같은 책에 실린 「‘사건’의 진상」과 『너희가 명품을 아느냐』에 실린 「청소년은 황야에서 방황한다」에 분명하다. 아마 이 두 태도가 사치품을 두고 대립하는 양극단의 대표적인 논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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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