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
이성재의 『68운동』(책세상, 2009)을 읽다. - 어제 읽은 잉그리트 길혀-홀타이의 『68운동: 독일?서유럽?미국』에 이어 읽게 된 이 책은, 책세상에서 ‘개념사 시리즈’로 기획한 ‘비타 악티바Vita Activa’ 총서 가운데, 12번으로 나온 것이다. 라틴어로 된 총서의 뜻은 ‘실천하는 삶’.
68운동의 발단에서부터 경과 그리고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는 어제 쓴 독후감에 대략 기술해 놓았는데, 본서에 대한 독후감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대신 이번 독서에서는 좌파와 68운동의 관계를 유심히 보았다. 68세대의 정치적 이론 기반인 신좌파 이념은 기존의 좌파와 상당히 달랐다. 신좌파의 주장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산업 프롤레타리아를 주도 세력으로 하는 계급 투쟁은 더 이상 최우선 관제가 아니며, 계급 불평등 이외의 다른 기준에 근거한 불평등도 똑같이 중요한 의미로 떠올랐다. 둘째, 혁명은 이제 반드시 폭력을 내세워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었다.”(125쪽) 이 요약에 연이어 저자는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거시적 틀에서는 매우 타당하지만 각 나라의 독자적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고 부기해 놓았다.
신구新舊 좌파가 특별히 상이한 점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상像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구좌파는 당의 전통적 기반이 되어 왔던 생산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자의 계급적 관점을 고수했던 반면, 신좌파는 기술 혁신을 통한 노동 시간의 단축과 3차 산업의 확장 및 화이트칼라의 증대에 주목했다. 기존의 산업 사회와 차별된 후기 산업 사회에서는 지식과 정보에 대한 의사 결정권을 가진 새로운 지배 계급(기술 관료)에 대항하는 새로운 주체가 설정되어야 했고, 신좌파는 새로운 노동 계급 즉 새로운 사회 변혁의 주체로 “학생, 대중 매체 종사자, 비서, 교사, 의료 종사자, 그리고 소외된 과학자와 기술자 등”(122쪽)을 전문 지식은 있으나 의사 결정 과정에서 배제된 이른바 새로운 노동 계급으로 보았다.
이런 사정에 더하여 68운동의 ‘사상적 대부’였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같은 이는 고도의 소비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자 계급은 이미 자본에 흡수 통합되어 버렸다”(59쪽)고 까지 말하고 있다. ‘노동자는 죽었다!’는 마르쿠제의 선언은 “운동을 계급 간의 투쟁으로만 보던 기성의 [마르크시즘] 이데올로기적 권위주의”(80쪽)에 이의를 제기하고, 물질주의적 사고와 생산 방식의 해결 방식에 머물러 있던 기성 좌파의 한계를 넘어, 조직(당)의 유효성마저 묻는 창槍이 되었다. 노동자가 혁명의 주체 세력이 아니라면, 기존의 공산당이나 사회당의 역할은 재조정되어야 했고, 투쟁의 방향도 달라져야 했다. 신좌파의 이론적 영향을 받은 68세대는 교조화된 당 조직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68운동에 참여한 노동자들 역시 노동조합이나 당이 단골로 의제화해 온 경제적 불만이 아니라 사업장 내에 존재하는 불평등과 경영에 참여할 수 없는 노동자들의 소외를 해결하기 위해 파업을 벌였다. 실제로 68운동 이후 프랑스와 독일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투쟁 목표를 임금투쟁보다 훨씬 높게 설정했던 결과로, 경영 이사회에 노동자 대표를 파견하는 권리가 법제화됐다.
68운동 기간 동안 스탈린이나 소련공산당은 격하되고, 트로츠키?마오쩌둥?호치민?체 게바라는 숭앙됐다. 그들은 68운동이 심정적으로 헌신했던 반제국주의?제3세계 해방 투쟁과 겹으로 연관되기도 하지만, 특히 호치민이나 체 게바라는 정치적 권위주의나 자본주의의 관리 기술과 같은 모든 종류의 비인간적 속박에 대해 항거했던 68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받아들여졌다. 이렇듯 68세대가 자본주의의 관리 기술이나 사회주의 당 조직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프랑스 공산당은 68운동 기간 동안 68학생운동가들을 적대시하면서 ‘유복한 마마보이 시위대’, 조롱하거나 ‘극좌파’라고 몰아세웠다. 좌우를 막론한 여느 당이나 권력은, 자신들의 추종세력이나 민중들에게 ‘자치’나 ‘자율’을 주려 하지 않는다.
우파와 좌파로부터 협공을 당하면서도 68운동가들은 어느 정당과도 공식적인 제휴를 하지 않았다. 훗날 프랑스의 68운동가들은 대거 프랑스 사회당으로, 또 독일의 68운동가들은 직접 녹색당을 꾸리게 되긴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정당 정치로 환원하거나 직결하지 않음으로써 다양한 사회적 상상력을 표출할 수 있었다. 제3세계 해방 투쟁이나 인종 차별 문제는 물론이고, 소수자와 장애인 문제, 여성과 청소년 문제, 여성의 유산권(낙태), 교수와 학생 간의 위계 문제,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이 사회 문제가 된 것은 “부르주아 혁명은 법률적이었으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경제적이었다. 우리의 혁명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이어야 한다”(101쪽)던 68운동 덕분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68운동은 “체계적으로 운동을 조직하지 않았으며 이를 위한 기구의 설립”과 “중앙 집권적 조직”(74쪽)의 부재로 실패했다. 본서의 저자 역시 “68운동은 경제적 불만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진행된 탓에 그토록 빨리 추동력을 잃었으며, 결국 사회 전복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119쪽)고 평가한다. 이는 어제 읽은 『68운동: 독일?서유럽?미국』의 속표지 제목 밑에 내가 연필로 “사회에 내재한 권위주의는 바꾸었으나, 정권은 바꾸지 못했다. ‘조직’ 없는 ‘운동’만으로는 결코 ‘체제’를 바꾸지 못한다”고 쓴 것과 같다. 그런데 프랑스의 사회학자 알랭 투렌은 68운동을 “통합과 근대화를 주장하는 기술 관료 지배층과 반권위주의, 해방, 참여를 주장하는 새로운 전문가들 사이의 대립”(122쪽)으로 간주한다. 알다시피 학생, 대중매체 종사자, 비서, 교사, 의료 종사자, 그리고 소외된 과학자와 기술자 등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전문가들이 70년대 말부터 서구에서 전개한 게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이다. 환경 운동, 인권 운동, 반전?평화 운동, 대안적 생활 문화 운동 등은 모두 반권위주의와 자율적 구조를 띤 68운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한 마디로 68운동은 근대 세계의 기본적 정치 구조인 ‘국가’를 변혁하기 위해 국가 기구를 장악하고 그 권력을 획득하는 ‘혁명’에는 실패했지만, 새로운 사회 운동에 기반을 둔 새로운좌파New Left를 낳았다. 다음은 신사회 운동이 출현한 세 가지 요인이다: “우선 19세기에 일어난 반체제 운동 이후 관료제 사회와 그 조직의 힘이 너무 커졌다. 둘째, 좌파의 조직들이 기대를 충족할 만한 능력을 점점 상실해갔다. 셋째, 관료제 조직의 틀을 벗어난 직접 행동들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125쪽)
이 책의 마지막 장인 5장은 「68운동과 한국 사회」다. 저자는 이 장에서 “한국에서 68운동과 가장 유사한 사건으로는 2008년 여름 촛불 집회를 들 수 있다”면서 “학생들로부터 운동이 시작됐다는 점, 기성 정당의 조직적 틀을 거부했다는 점, 거리 토론을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인했다는 점 그리고 시위가 축제와 결합했다는 점”(135쪽)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나는 저자와 다르게 생각한다. 우선 앞서 『68운동: 독일?서유럽?미국』의 속표지 제목 밑에 내가 연필로 써 둔 글을 소개했듯이, 2008년의 촛불도 실패했다.
다음으로는 우리도 잊고 있는 1960년 4?19의 의미다. 저자는 “학생들로부터 운동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촛불 집회를 유럽의 68운동과 연관 짓는데, 세계사에 ‘학생운동student power’의 저력을 최초로 보여준 것은 1960년 우리나라의 4?19혁명이다. 이 혁명은 지식인 계급이나 직업 혁명가가 선도했던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과 달리 학생이 주축이 되어 정권을 뒤엎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었던 혁명이다. 나는 유럽의 68혁명이 4?19로부터 ‘원천 영감’을 받았다고 믿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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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